77년간 ‘반란’으로 규정되었던 여수·순천 10·19사건이 새로운 역사적 조명을 받고 있다. 과거 이 사건은 남로당 좌익 세력이 신생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을 시도한 반란으로 공식 기록되었다. 그러나 2025년 10월 19일, 이재명 대통령이 여순사건 77주기를 맞아 SNS에 발표한 메시지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14연대의 명령 거부를 '부당한 명령에 맞선 행위'로 평가하면서, 사건의 성격은 재규정되고 있다. 이는 여순사건을 국가의 비인도적 명령에 저항한 ‘항거’로 보는 새로운 관점이 힘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국가와 군인의 사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당시 14연대가 거부한 명령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사건 이해의 핵심이다. 이들에게 내려진 제주 출동 명령은, 제주 4·3사건의 '초토화 작전'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제주도민의 70%를 좌익 동조자로 간주하고 군경 및 우익단체를 동원해 무차별 진압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 대다수는 무장대와 무관한 노인, 여성, 어린이들이었다. 특히 호남 지역 출신이 많았던 14연대 장병들에게 제주도민은 동포이자 이웃이었다. 결국 '동족 학살'에 동참하라는 명령은 군인으로서의 충성과 인간적 양심 사이의 갈등을 유발했고, 이는 명령 거부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14연대의 봉기에 지창수 상사 등 남로당 조직원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건의 동력을 이념적 배경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복합적인 본질을 간과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군 내부에는 친일 경력 경찰 고위직에 대한 반감과 군의 열악한 처우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 속에서 ‘동포 학살’ 명령은 일반 병사들의 저항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봉기군의 핵심 요구는 이념적 구호 이전에 “제주도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는 양심적 판단에 근거했다는 분석이다. 이는 부당한 국가 명령에 맞선 ‘적극적 저항권’의 행사로도 해석된다.

 

항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가폭력은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 최초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여수와 순천에 진압군을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진압군은 봉기군과 민간인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다. ‘부역자 색출’을 명분으로 재판 없는 즉결 처형이 자행됐으며, "죽은 후에 좌익으로 분류"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는 단순한 진압을 넘어 공포를 통해 통치 기반을 확립하려 한 행위로 평가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대신 폭력의 주체가 되었으며, 이는 14연대가 저항했던 국가폭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사건 이후 ‘반란’이라는 규정은 반공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다. 여순사건은 국가보안법 제정의 빌미가 되어 비판적 목소리를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군 내부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숙군' 작업으로 이어져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했다. 또한 국가는 사건의 참상을 ‘공산주의자의 만행’으로 선전하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 ‘반란’이라는 낙인은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유가족들에게는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오랜 고통을 안겼다.

여순사건을 ‘항거’로 재조명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묻고 저항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73년 만에 제정된 여순사건 특별법,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사법부의 판결,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항소 포기 결정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다. 여순사건을 ‘항거’로 기록하는 것은 과거 국가폭력의 비극을 치유하고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작업이다. 나아가 이는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