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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째주 · 2025
[10월 3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검은 장갑과 백색 공포
영화로 세상을 보다

[10월 3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검은 장갑과 백색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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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16일, 멕시코시티 올림픽 200m 시상대 위에 선 두 흑인 선수는 신발을 벗고 검은 양말과 장갑을 낀 채 고개를 숙였다. 금메달을 딴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검은 장갑 낀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올림픽 인권 프로젝트(OPHR)’ 배지가 붙어 있었고, 곁에 선 호주 선수 피터 노먼 역시 같은 배지를 달고 있었다. 이 제스처는 흑인 빈곤과 자긍심, 린치와 노예제의 기억을 응축한 ‘인권 선언’이었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를 “올림픽 정신을 훼손한 정치적 행동”이라 규정하고 둘을 즉각 선수단에서 제명했다. 며칠 전 같은 대회에서 조지 포어맨이 성조기를 흔들며 링을 돌 때는 누구도 그것을 정치라고 부르지 않았다. 같은 경기장, 다른 몸짓. 10월 셋째 주의 이 사건은 질문을 남긴 채 지금까지 이어진다. 도대체 스포츠라는 무대에서 ‘정치적’이라는 낙인은 누구의 몸에만 찍히는가.

 

검은 장갑 시위가 드러낸 것은 인종차별의 구체적 실태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층위에는 “흑인의 몸은 언제나 이미 정치적이며, 백인의 몸만이 비정치적·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선의 비대칭이 있다. 스미스와 카를로스의 주먹은 소리를 내지 않는 항의였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텔레비전과 사진, 신문 지면을 통해 세계를 울린 거대한 발화였다. 반대로, 그들을 징계한 IOC와 미국 올림픽 위원회는 자신들의 결정을 “올림픽의 중립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인종차별을 둘러싼 구조적 폭력을 비가시화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흑인 선수들의 무릎 꿇기, 세리머니, 유니폼 문구 하나하나가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이 구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문제는 “운동장에서 정치하지 말라”가 아니라, “어떤 정치만이 허용되고 어떤 정치만이 처벌받는가”에 가깝다.

조던 필 감독의 영화 〈겟 아웃〉(Get Out, 2017)은 이 비대칭의 감각을 가장 날카롭게 시각화한 공포 영화다. 러닝타임 104분, 장르는 심리 호러이자 블랙코미디, 사회 풍자극에 가깝다. 흑인 사진가 크리스는 백인 여자친구 로즈의 집에 초대받아 주말을 보내게 된다. 로즈의 가족과 이웃은 “흑인 문화가 정말 좋다”, “오바마를 세 번이라도 찍었을 거다”라며 친절을 가장한 말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점점 이상한 기류가 드러난다. 집 안의 흑인 하인들은 기이할 정도로 공손하고, 인근 마을 흑인들은 마치 다른 사람의 껍데기를 쓴 것처럼 어색하게 웃는다. 이야기가 진실에 다다를 때, 관객은 이 부유한 백인 가족이 흑인들의 몸을 빼앗아 자신들의 의식을 이식하는 기괴한 수술을 통해 사실상 ‘신체를 거래’하는 집단임을 알게 된다. 영화는 “노골적인 인종 혐오” 대신 “세련된 리버럴의 호의”가 어떻게 흑인성을 전유하고 지배의 도구로 삼는지를, 피와 웃음을 뒤섞은 공포의 형식으로 드러낸다.

1968년 시상대 위의 검은 장갑과 〈겟 아웃〉의 백색 저택은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에 있지만, 둘 다 “누가 흑인의 몸을 소유하고 통제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한다. 스미스와 카를로스의 주먹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몸을 자발적으로 정치화하는 행위였다. 반대로 〈겟 아웃〉 속 크리스의 몸은 카메라 밖에서 타자의 욕망에 의해 은밀히 해부되고 상품화된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수억 명의 시선을 받았던 시위가 하루 만에 제명과 추방으로 정리된 것처럼, 영화 속 백인 가족은 크리스에게 “우리는 인종차별 따위와 상관없다”고 말하며 문제를 농담으로 치환한다. 여기에야말로 블랙코미디의 핵심이 있다. 진짜 공포는 괴물의 등장보다, 폭력의 구조가 “친절”과 “예의”의 얼굴을 하고 미소 짓는 순간에 있다. 〈겟 아웃〉은 검은 장갑 시위가 카메라에 포착된 한 컷의 이미지라면, 그 이미지 뒤에서 수십 년간 축적된 일상의 미시적 폭력을 클로즈업하는 렌즈에 가깝다.

오늘날 ‘검은 장갑’의 후예들은 경기장 안팎에서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미국 NFL의 콜린 캐퍼닉이 경찰 폭력에 항의하며 국가 연주 때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때, 일부 언론은 그를 “국기를 모독한 선수”로 몰아갔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시상대에서의 시위와 특정 제스처를 금지하는 규정을 재확인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반면, 거대 스포츠 브랜드들은 흑인 선수들의 이미지를 광고에 활용하며 ‘다양성과 포용’을 전면에 내세운다. 저항의 몸짓이 다시 상품으로 회수되는 장면이다. 〈겟 아웃〉이 보여주듯, 오늘의 인종주의는 더 이상 노골적인 증오의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는 인종차별자가 아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흑인의 재능과 스타일, 분노와 슬픔을 이미지와 콘텐츠의 형태로 소비해 버리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한다.

결국 10월 셋째 주의 올림픽 시상대와 21세기 공포 영화의 화면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마주 선다. 하나는 세계가 지켜보는 공식 무대 위에서, 다른 하나는 어두운 극장과 스트리밍 화면 속에서, 흑인의 몸을 둘러싼 권력 관계를 폭로한다.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수십 년간 생계와 명예를 잃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뒤늦게 “인권의 상징”으로 재평가되었다. 〈겟 아웃〉은 흑인 감독의 데뷔작이자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 되었지만, 영화가 제기한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제스처를 “정치적”이라고 비난할 때, 혹은 “예술은 정치와 분리돼야 한다”고 말할 때, 사실은 어떤 구조를 보지 않으려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일까. 만약 당신이 오늘의 시상대에 선 선수라면, 혹은 〈겟 아웃〉 속 카메라 뒤에 선 관객이라면, 그 순간 자신의 몸과 시선을 어디에 두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