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3일, 몰타 해협에서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마주 앉았다. 이른바 ‘몰타 회담’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불과 한 달 만이었다. 양국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20세기 후반 세계 질서의 근본적 전환을 알렸다. 그러나 그날 이후 35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여전히 ‘벽’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물리적 장벽은 무너졌지만, 이념·경제·기후·기술의 벽은 새로운 형태로 세계를 분열시킨다.
냉전은 단순한 체제 경쟁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구조를 양분한 사유의 전쟁이었다. 자유와 평등, 시장과 국가, 개인과 공동체라는 이항 대립의 틀은 냉전 해체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화의 급류 속에서 더 미세하고 교묘한 형태로 변주되었다. 국경은 열렸지만, 인종·종교·이민 문제로 인한 ‘보이지 않는 장벽’은 더욱 단단해졌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 아래서, 인간은 다시금 서로 다른 진영의 ‘정보 장벽’에 갇히게 되었다.
이러한 주제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Snowpiercer〉(2013, 126분, SF·드라마)를 떠올릴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4년 후에 나온 이 영화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실험의 실패로 얼어붙은 세상에서 단 하나 살아남은 열차 속 인간들의 계급 반란을 그린다. 봉 감독은 좁은 객차 안에 수직적 사회구조를 축소해 넣음으로써, ‘벽’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불평등과 통제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상: 2013 청룡영화상 작품상, 2014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후보)
〈설국열차〉의 열차는 몰타 회담 이후 세계의 축소판이다. 선두칸의 권력자 윌포드는 초강대국을, 꼬리칸의 빈민들은 냉전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배제된 제3세계와 노동자 계층을 상징한다. “세상은 닫힌 체계다. 칸은 정해져 있고, 위치를 벗어나면 혼돈이 온다”는 윌포드의 대사는 냉전적 질서의 유령이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장벽이 무너져도, 시스템은 여전히 인간을 구획하고 서열화한다. 열차가 탈선하며 폭발하는 결말은, ‘체제 너머의 인간 가능성’을 향한 봉준호식 선언으로 읽힌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벽들 앞에 서 있다. 미·중 기술 패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자지구의 분쟁, 그리고 인공지능이 만든 정보 격차까지 — 몰타 해협에서 선언된 ‘냉전의 종식’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다. 세계는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점점 더 복잡한 형태로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벽은 사라지지 않고 ‘데이터’와 ‘인식’이라는 형태로 내면화되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탈냉전’은 무엇인가. 장벽이 무너진 세상을 사는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구획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봉준호가 그린 설국의 폐허 속에서, 인간이 다시 눈 덮인 대지를 밟는 순간은 결국 묻는다. “당신이 믿는 자유는, 누구의 벽 위에 세워져 있는가?”

![[12월 1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의 벽](https://pltpjrfdfxxbnivrtoew.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films/the_hurt_locker_backdro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