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21일,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 21일간의 긴 협상 끝에 보스니아 내전을 종식시킬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서명한 이 협정은 3년 반 동안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종전 협정이 체결되는 그 순간에도, 사라예보의 폐허 속에서는 전쟁이 갈라놓은 연인들의 흐느낌이 멈추지 않았다.
보스니아 전쟁과 사랑.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보스니아 전쟁은 단순한 민족 분쟁이 아니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터져 나온 이 전쟁은 이웃이 이웃을, 친구가 친구를 적으로 돌리는 비극이었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 무슬림이 뒤섞여 살던 마을들은 하루아침에 전장이 되었고, 함께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서 총을 겨누어야 했다. 특히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자행한 '민족 청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악의 집단학살로 기록되었다. 스레브레니차에서만 8,000명이 넘는 보스니아계 무슬림 남성들이 학살당했다.
2011년,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감독 데뷔작으로 이 전쟁을 다룬 영화 In the Land of Blood and Honey를 선보였다. 영화는 전쟁 전 사라예보에서 사랑에 빠진 보스니아계 무슬림 여성 아일라와 세르비아계 경찰 다닐로의 이야기를 그린다. 전쟁이 발발하자 다닐로는 세르비아군 장교가 되고, 아일라는 포로수용소에 갇힌다. 재회한 두 사람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계 속에서도 과거의 사랑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 자나 마르자노비치와 고란 코스티치의 절제된 연기는 전쟁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잔혹한 선택의 무게를 생생히 전달한다.
In the Land of Blood and Honey (2011), 안젤리나 졸리 감독. ⓒ Production Company
졸리의 영화가 포착한 것은 전쟁이 파괴하는 것이 단지 건물과 생명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족이라는 집단 정체성이 개인의 정체성을 압도할 때, 사랑조차 생존의 도구가 되고 만다. 아일라와 다닐로의 관계는 보스니아 전쟁의 축소판이다. 한때 공존했던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증오하게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연결의 흔적이 어떻게 남아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다닐로가 아일라를 '보호'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것은 폭력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권력관계가 뒤바뀐 상황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의미가 전도된다.
보스니아 전쟁이 끝난 지 거의 30년이 지났지만, 민족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자지구에서, 미얀마에서 우리는 같은 비극의 반복을 목격한다. 졸리의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증오의 씨앗이 뿌려진 땅에서 사랑이 싹틀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야 할 때, 화해는 가능한가? 보스니아의 경험은 평화협정이 전쟁을 끝낼 수는 있어도 마음속 전쟁까지 끝낼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전쟁은 인간을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넣어 그 본질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 생존을 위해 사랑하는 이를 배신하는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을 지키는 것인가? 졸리의 카메라는 이 질문에 섣부른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선택의 여지를 갖고 있으며, 그 선택의 무게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과연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1월 4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아일라와 다닐로의 관계는 보스니아 전쟁의 축소판이다](https://pltpjrfdfxxbnivrtoew.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films/in_the_land_of_blood_and_honey_backdro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