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7월 1일, 프랑스 솜 강 일대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불과 하루 만에 영국군 사상자는 6만 명에 달했고, 그중 2만 명이 전사했다. 이날은 영국 군사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날로 기록되었다. 서부전선의 참호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벨기에 해안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700킬로미터에 걸쳐 양측이 참호를 파고 대치했다. 병사들은 진흙과 시체, 쥐떼가 들끓는 참호에서 포탄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참호 사이의 무인지대는 철조망과 지뢰로 가득했고, 한 발짝이라도 머리를 내밀면 저격수의 표적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참호.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서부전선의 참호전은 근대 산업문명이 낳은 괴물이었다. 기관총, 독가스, 중포, 전차 등 새로운 무기들이 대량 살상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몇 킬로미터를 전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각국의 지휘부는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여겼고, 무의미한 공격 명령을 반복했다. 참호전은 전쟁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영웅주의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학살이었다. 젊은이들은 국가와 명예를 위해 참전했지만, 참호에서 마주한 것은 죽음의 공포와 인간성의 상실이었다.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은 1차 대전 서부전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1917년 4월, 두 명의 영국군 병사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독일군의 함정에 빠진 1,600명의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을 가로질러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영화는 원테이크 기법으로 촬영되어 관객이 주인공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전장을 횡단하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조지 맥케이와 딘 찰스 채프먼의 연기는 절제되면서도 깊이가 있다. 특히 스코필드가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며 보이는 공포와 결연함의 미묘한 표정 변화는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1917 (2019), 샘 멘데스 감독. ⓒ Production Company
영화와 역사적 참호전은 시간과 공간의 압축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참호전에서 병사들은 좁은 공간에 갇혀 끝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1917의 두 병사 역시 제한된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압박 속에서 움직인다. 참호전이 공간을 고정시켜 시간을 무한히 늘렸다면, 영화는 시간을 압축시켜 공간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한다. 두 상황 모두에서 개인의 생명은 거대한 전쟁 기계 앞에서 무력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무력함 속에서도 인간의 의지와 연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서부전선의 참호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지닌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다시 등장한 참호전의 모습은 1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전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타인의 야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구조는 여전하다. 1917이 보여주는 개인의 용기와 희생은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여전히 국가와 이념의 이름으로 개인의 생명을 소모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참호전의 기억은 인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수백만 명의 죽음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증명했지만, 세계는 곧 더 큰 전쟁으로 치달았다. 1917의 두 병사가 보여준 인간애와 의무감은 숭고하지만, 그들이 속한 거대한 전쟁 기계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의 용기를 찬양하면서도 그 용기가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전쟁 영화가 반전 영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쯤 참호를 벗어날 수 있을까?

![[2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와 역사적 참호전은 시간과 공간의 압축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https://pltpjrfdfxxbnivrtoew.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films/1917_backdro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