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16일,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가 '집시 문제의 최종 해결'을 명령했다. 이 명령으로 50만 명이 넘는 로마니 민족이 학살당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집시 수용소'에서만 2만 3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로마니 공동체는 체계적인 절멸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유목 생활, 독특한 언어와 문화는 '반사회적'이라는 낙인 아래 말살 위기에 처했다. 천 년 넘게 이어온 그들의 여정이 강제로 중단되었다.
집시 차별과 정체성.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로마니에 대한 차별은 나치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세 이래 유럽 사회는 그들을 '도둑', '거지', '마녀'로 낙인찍었다. 19세기 인류학은 그들을 '열등 인종'으로 분류했고, 20세기 복지국가는 강제 정착과 동화를 추진했다. 1971년 스위스에서야 로마니 아동 강제 입양 정책이 중단되었다. 프랑스는 2010년대까지 로마니 캠프를 강제 철거했다. 정착민 사회는 유목민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인식했다. 국경과 소유권에 기반한 근대 국가 체제에서 그들은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토니 가틀리프 감독의 Latcho Drom은 인도에서 스페인까지 이어지는 로마니의 천년 여정을 음악으로 그린다. 대사 없이 오직 노래와 춤, 표정과 몸짓으로 그들의 역사를 전한다. 라자스탄의 사막에서 시작된 카메라는 이집트, 터키, 루마니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프랑스를 거쳐 안달루시아에 닿는다. 각 지역의 로마니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삶을 노래한다. 결혼식의 환희, 추방의 슬픔, 일상의 고단함이 멜로디에 담긴다. 플라멩코의 격정적인 리듬 속에서 천년 유랑의 끝을 암시한다.
Latcho Drom (1993), 토니 가틀리프 감독. ⓒ Production Company
영화는 로마니의 역사를 선형적 서사가 아닌 순환하는 리듬으로 포착한다. 음악은 국경을 넘어 변주되면서도 근원적 정체성을 유지한다. 인도의 라자스탄 음계가 스페인의 플라멩코로 변신하는 과정은 디아스포라의 본질을 드러낸다. 정착민의 역사가 문자와 기념물로 기록된다면, 유목민의 역사는 몸과 소리로 전승된다. 가틀리프는 로마니가 겪은 박해와 차별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음악 속에 각인된 상처와 저항, 적응과 생존의 흔적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로마니는 유럽에서 가장 차별받는 소수민족이다. EU 회원국들은 여전히 그들을 추방하고, 학교는 로마니 아동을 분리 교육한다. 극우 정당들은 반로마니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동시에 로마니 출신 음악가, 작가,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시'라는 타자화된 호칭을 거부하고 '로마', '신티', '칼레'라는 자기 이름을 되찾고 있다. 정체성은 타인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가틀리프의 카메라가 포착한 로마니의 얼굴에는 천년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노래에는 잃어버린 고향과 도달하지 못한 약속의 땅이 공존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침묵시키며 살아가는가. 정착과 소유의 논리로 유목과 공유의 삶을 재단할 권리가 있는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을 차별하는 것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천년을 떠돌았던 이들이 묻는다. 당신들이 만든 경계는 정말로 필요한 것인가?

![[5월 1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음악은 국경을 넘어 변주되면서도 근원적 정체성을 유지한다](https://pltpjrfdfxxbnivrtoew.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films/latcho_drom_backdro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