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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째주 · 2024
[5월 5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재현은 '역설'이라는 주제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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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재현은 '역설'이라는 주제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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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오키나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한 미군 위생병이 총 한 자루 없이 75명의 전우를 구했다. 데스몬드 도스, 재림교회 신자였던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마에다 고지, 일본군이 '해크소 리지'라 부른 그 절벽에서 도스는 "한 명만 더, 주님"이라는 기도를 되뇌며 밤새 부상병들을 밧줄로 내려보냈다. 82일간 지속된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 최악의 격전지였고, 민간인 10만 명을 포함해 20만 명이 희생된 지옥도였다. 그 한복판에서 도스는 살상이 아닌 구원을 택했다.

역사 사건

오키나와 전투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양심적 병역거부는 당시 미국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선택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애국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 도스는 동료들의 조롱과 상관의 압박을 견뎌야 했다. 군사법원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몰았고, 부대원들은 겁쟁이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미 헌법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했고, 도스는 비전투원으로 복무할 권리를 얻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을 넘어, 전체주의와 개인의 양심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한 개인의 투쟁이었다.

멜 깁슨 감독의 Hacksaw Ridge는 이 실화를 영화화했다. 앤드류 가필드는 도스의 내적 갈등과 확고한 신념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전반부는 도스의 성장 과정과 군대 내 갈등을 다루며, 후반부는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깁슨은 극도로 사실적인 전투 장면을 통해 전쟁의 잔혹성을 드러내면서도, 그 속에서 빛나는 인간애를 대비시킨다. 특히 도스가 절벽에서 부상병들을 구하는 장면은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숭고함을 담아낸다. 영화는 폭력을 거부한 한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영화 스틸

Hacksaw Ridge (2016), 멜 깁슨 감독. ⓒ Production Company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재현은 '역설'이라는 주제로 만난다.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지 않는다는 것, 살육의 현장에서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도스는 이 역설을 통해 전쟁의 본질을 드러낸다.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군을 살리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메시지다. 영화는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포화가 쏟아지는 전장에서 홀로 기도하는 도스의 모습은,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의 신념이 집단의 광기를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전쟁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된다.

도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으며, 개인의 신념과 국가의 요구 사이의 긴장은 계속된다. 한국을 비롯한 징병제 국가들에서 대체복무제 논의가 이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 나아가 이는 다수의 압력 앞에서 소수의 신념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된다. 기후위기, 성소수자 권리, 난민 문제 등 현대사회의 갈등 상황에서도 우리는 도스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주류의 흐름을 거스르더라도 옳다고 믿는 길을 갈 용기가 있는가.

오키나와의 절벽에서 도스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다른 용기'였다.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용기가 아니라, 총을 내려놓고 부상자를 등에 업는 용기. 이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 폭력을 행사하는 힘인가, 폭력을 거부하는 힘인가. 전쟁이 일상화되고 혐오가 만연한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도스가 보여준 '역설의 용기'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만약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총을 들었을까, 아니면 밧줄을 들었을까. 역사는 때로 가장 단순한 질문으로 우리를 시험한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공식 예고편

Hacksaw Ridge (2016) — 멜 깁슨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