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재현은 '역설'이라는 주제로 만난다
세계사 · 영화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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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 데스몬드 도스가 무기 없이 75명의 전우를 구한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 '해크소 리지'는 전쟁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킬 수 있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전한다. 도스의 이야기는 개인의 신념과 국가 요구 사이의 긴장, 그리고 다수의 압력 속에서 소수의 신념을 존중하는 문제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1945년 5월, 오키나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한 미군 위생병이 총 한 자루 없이 75명의 전우를 구했다. 데스몬드 도스, 재림교회 신자였던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마에다 고지, 일본군이 '해크소 리지'라 부른 그 절벽에서 도스는 "한 명만 더, 주님"이라는 기도를 되뇌며 밤새 부상병들을 밧줄로 내려보냈다. 82일간 지속된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 최악의 격전지였고, 민간인 10만 명을 포함해 20만 명이 희생된 지옥도였다. 그 한복판에서 도스는 살상이 아닌 구원을 택했다.
오키나와 전투와 양심적 병역거부자 데즈먼드 도스, 1945년. 총을 들지 않고 위생병으로 참전해 75명의 부상병을 구한 도스 일병. ⓒ U.S. Army
양심적 병역거부는 당시 미국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선택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애국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 도스는 동료들의 조롱과 상관의 압박을 견뎌야 했다. 군사법원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몰았고, 부대원들은 겁쟁이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미 헌법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했고, 도스는 비전투원으로 복무할 권리를 얻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을 넘어, 전체주의와 개인의 양심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한 개인의 투쟁이었다.
멜 깁슨 감독의 Hacksaw Ridge는 이 실화를 영화화했다. 앤드류 가필드는 도스의 내적 갈등과 확고한 신념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전반부는 도스의 성장 과정과 군대 내 갈등을 다루며, 후반부는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깁슨은 극도로 사실적인 전투 장면을 통해 전쟁의 잔혹성을 드러내면서도, 그 속에서 빛나는 인간애를 대비시킨다. 특히 도스가 절벽에서 부상병들을 구하는 장면은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숭고함을 담아낸다. 영화는 폭력을 거부한 한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오키나와 전투의 역사적 사실과 해크소 리지의 영화적 재현은 '역설'이라는 주제로 만난다. 전쟁에서 무기를 거부한 사람이 가장 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역설. 살상이 의무인 전장에서 구원을 택한 인간의 역설. 멜 깁슨은 극도로 사실적인 전투 장면 속에 도스의 비폭력을 대비시킴으로써 이 역설의 무게를 극대화한다. 실제 도스는 전쟁 후 명예 훈장을 받았지만, 그 훈장의 의미는 군사적 공훈이 아니라 인간성의 승리에 있었다.
이 역설은 한국 사회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은 징병제 국가로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오랫동안 회피해왔다. 2018년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의 부재를 헌법불합치로 결정하기까지, 수천 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실형을 살았다. 2020년부터 대체복무제가 시행됐지만, 복무 기간이 36개월로 현역의 두 배에 달하고 교정시설에서 합숙해야 하는 등 사실상 징벌적 성격이 강하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병무청의 2023년 통계에 따르면 대체복무 신청자는 연간 약 500명 수준이다. 개인의 양심과 국가 안보 사이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는 도스의 시대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질문이다.
도스가 절벽에서 부상병을 내려보내며 되뇌인 "한 명만 더, 주님"이라는 기도는 신앙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 존엄에 대한 선언이었다. 전장의 광기 속에서 한 사람이 끝까지 지킨 것은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생명의 가치였다. 다수의 압력 속에서 소수의 신념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면, 우리 사회는 그 본질에 얼마나 충실한가.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역설의 철학
폭력의 현장에서 비폭력으로 진정한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전쟁과 인간성의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도스의 선택은 힘의 본질의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2
현대적 대의제 논의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는 여전히 한국을 포함한 징병제 국가들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개인의 신념과 국가의 의무 사이의 긴장은 현재진행형의 사회 이슈다.
3
소수의 신념 존중
다수의 압력 속에서 옳다고 믿는 길을 가는 용기는 기후위기, 인권, 난민 문제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 상황에 적용되는 보편적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