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와 역사적 사건은 '정상성의 붕괴'라는 주제로 교차한다
세계사 · 영화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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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영화 '12 Years a Slave'는 1841년 자유 흑인 솔로몬 노섭이 납치돼 12년간 노예로 살았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노예제도의 구조적 모순과 '정상성의 붕괴'를 통해 인간 존엄성 부정의 본질을 냉정하게 조망한다. 법적 노예제는 사라졌으나 현대의 인종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은 여전하며, 우리 사회의 편견 극복이 시급하다.
1841년 늦은 봄, 뉴욕주 사라토가의 자유 흑인 솔로몬 노섭은 워싱턴 D.C.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그는 두 명의 백인 사업가가 제안한 서커스단 공연 계약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워싱턴에 도착한 그날 밤, 노섭은 약물에 취해 쓰러졌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노예상인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자유인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의 항변은 묵살됐고, '플랫'이라는 새 이름을 강요받으며 루이지애나의 목화 농장으로 팔려갔다. 이후 12년간 그는 에드윈 엡스라는 잔혹한 농장주 아래서 비인간적인 노예 생활을 견뎌야 했다.
솔로몬 노섭의 자유인 납치, 1841년. 뉴욕의 자유 흑인 바이올리니스트 솔로몬 노섭이 납치돼 루이지애나 면화 농장에서 12년간 노예로 살았다. ⓒ Library of Congress
노섭의 납치는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19세기 미국 노예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은 북부의 자유주와 남부의 노예주로 분열돼 있었고, 1850년 도망노예법은 자유주에서도 도망 노예를 체포해 돌려보낼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법적 장치는 자유 흑인들조차 언제든 노예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시켰다. 노섭처럼 교육받고 재능 있는 자유 흑인들이 납치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으며, 한번 노예가 되면 법적 구제를 받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노예제는 단순히 경제적 착취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부정하는 체제였고, 피부색만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잔혹한 시스템이었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12 Years a Slave는 노섭이 1853년에 출간한 자서전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영국 출신 흑인 감독인 맥퀸은 미국 노예제도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조망하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했다. 치웨텔 에지오포가 연기한 솔로몬 노섭은 자유인의 자존심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며, 마이클 패스벤더가 연기한 에드윈 엡스는 노예제가 만들어낸 괴물적 인간상을 보여준다. 특히 루피타 뇽오가 연기한 노예 소녀 팻시의 모습은 노예제도가 여성에게 가한 이중의 폭력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는 134분 동안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며, 역사의 어두운 진실과 대면하게 한다.
솔로몬 노섭의 납치 사건과 스티브 맥퀸 감독의 12 Years a Slave(2013)가 교차하는 지점은 '정상성의 붕괴'다. 자유 시민이던 노섭이 하룻밤 사이에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 관객은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쉽게 박탈될 수 있는지를 목격한다. 맥퀸 감독은 영국인의 시선으로 미국 노예제의 잔혹함을 포착하며, 치위텔 에지오포가 연기한 노섭의 표정 하나하나에 체제적 폭력이 개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담아냈다. 영화의 가장 잔혹한 장면들은 오히려 일상적이라는 데서 충격이 배가된다. 잔혹함이 정상이 된 사회, 그것이 노예제의 본질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정상성의 붕괴'는 현재진행형 주제다. 법무부의 2023년 출입국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약 200만 명에 달하며, 이 중 상당수가 열악한 노동 환경에 노출돼 있다. 농촌의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인권 침해 사례가 국가인권위원회에 꾸준히 접수되고 있고, 2021년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동사한 사건은 한국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노섭이 자유인에서 노예로 전락했듯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그 꿈과 얼마나 다른가. 인간 존엄성의 문제에는 국적이 없다.
노섭은 12년간의 노예 생활 끝에 자유를 되찾았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증언이 없었다면 역사는 또 하나의 이름 없는 비극을 지워버렸을 것이다. 기록하는 것, 증언하는 것, 기억하는 것. 그것이 부당한 체제에 맞서는 첫 번째 저항이다. 우리 곁에서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당함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과거와 현재의 연결
노예제 폐지 170년 후에도 경찰 폭력, 대량 투옥, 경제적 격차 등으로 그 유산이 지속되고 있다. 역사적 불의가 현대 사회 구조에 어떻게 내재돼 있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2
법과 정의의 한계
노섭처럼 법적 자유인 신분을 가져도 폭력과 권력 앞에서는 무력했던 사례는, 법제도만으로는 차별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구조적 불평등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3
한국 사회의 자기반성
이주노동자, 탈북민, 다문화 가정 등 새로운 소수자 집단을 향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 존엄성 존중이 현재 진행형 과제임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