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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째주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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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그 1913년 6월 4일이다
영화로 세상을 보다

[6월 4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그 1913년 6월 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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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1913년 6월 4일 영국 경마장에서 여성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경주마에 치여 숨진 사건을 다룬 영화 'Suffragette'를 소개하는 기사. 영화는 실제 역사적 순간을 평범한 세탁공장 여성 노동자의 각성을 통해 재구성하며, 개인의 희생보다 수많은 익명의 여성들의 연대와 변화를 강조한다.

1913년 6월 4일, 영국 엡섬 더비 경마장. 수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에밀리 데이비슨이 경주로를 가로질러 뛰어들었다. 조지 5세의 경주마 앤머가 그녀를 들이받았고, 나흘 뒤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서프러제트(여성참정권 운동가)였던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1903년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창립한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수년간 투표권을 요구하며 투쟁해왔다.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강제 급식의 고통을 견뎌냈다. 그날 경마장에서 그녀가 품고 있던 것은 WSPU의 깃발이었다. "행동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역사 사건

에밀리 데이비슨의 투신, 1913년 6월 4일. 엡섬 더비 경마장에서 국왕의 말 앞에 몸을 던진 여성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 ⓒ Hulton Archive

20세기 초 영국 사회는 극심한 계급 갈등과 성별 불평등의 시대였다. 산업혁명으로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했지만, 정치적 권리는 전무했다. 1867년 남성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얻었을 때도 여성은 제외됐다. 평화적 청원은 무시됐고, 의회는 여성참정권 법안을 번번이 부결시켰다. 좌절한 여성들은 점차 과격해졌다. 유리창을 깨고, 우편함에 불을 질렀다. 정부는 이들을 범죄자로 취급했다. 1913년 제정된 '고양이와 쥐 법'은 단식투쟁으로 쇠약해진 수감자를 석방했다가 회복되면 다시 구속하는 잔인한 법이었다. 에밀리의 죽음은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나온 최후의 선택이었다.

사라 가브론 감독의 Suffragette는 이 역사적 순간을 세탁공장 여성 노동자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의 눈으로 재구성한다. 가상의 인물 모드는 처음엔 정치에 무관심한 평범한 노동자다. 하지만 공장에서의 성폭력, 열악한 노동 조건, 자신의 딸마저 보호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며 각성한다. 영화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보다 한 여성의 내밀한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캐리 멀리건은 모드의 고뇌와 결단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기한 약사 이디스, 메릴 스트립이 잠깐 등장하는 에멀린 팽크허스트까지, 영화는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하나의 목표로 연대하는 모습을 그린다.

영화 스틸

에밀리 데이비슨의 투신과 사라 가브론 감독의 서프러제트(2015)가 만나는 지점은 '평범한 사람의 각성'이다. 데이비슨은 옥스퍼드 출신 지식인이었지만, 영화의 주인공 모드 와츠는 가상의 세탁공장 노동자다. 가브론은 의도적으로 무명의 여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역사의 변화가 영웅 한 명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각성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경마장에서의 투신이라는 극적인 순간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지만, 진짜 변화는 모드 같은 평범한 여성들이 "나도 인간이다"라고 자각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향한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3년 성별격차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46개국 중 105위로,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남녀 임금 격차는 31.2%로 OECD 1위이며,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9%에 불과하다. 형식적 참정권은 1948년 확보했지만, 실질적 평등까지의 거리는 멀다. 2018년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을 때, 직장 내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2차 피해는 100년 전 서프러제트들이 감옥에서 강제 급식을 당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데이비슨이 경마장에 뛰어든 1913년과 한국의 2024년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전진했는가.

데이비슨이 왕의 말 앞에 몸을 던진 그날, 그녀가 품고 있던 것은 서프러제트 깃발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비극이었지만, 그 비극이 촉발한 변화는 불가역적이었다. 투표권이라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 그것이 데이비슨이 꿈꿨던 세상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꿈에 얼마나 가까워졌는가.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역사의 전환점

불과 100년 전 투표권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과거를 통해 현대의 평등권이 얼마나 소중한 유산인지 깨닫게 된다. 이는 현재의 제도적 성취가 결코 자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
형식과 실질의 차이

투표권 같은 형식적 평등은 달성했으나, 임금 격차, 유리천장, 성폭력 등 실질적 평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00년 전 문제들이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3
익명의 대다수의 힘

영화가 강조하듯 역사의 변화는 한 명의 영웅보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각성과 연대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목소리와 참여가 모여 거대한 사회 변화를 만든다는 메시지가 오늘날도 의미 있다.

공식 예고편

Suffragette (2015) — 사라 가브론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