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6월 4일, 영국 엡섬 더비 경마장. 수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에밀리 데이비슨이 경주로를 가로질러 뛰어들었다. 조지 5세의 경주마 앤머가 그녀를 들이받았고, 나흘 뒤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서프러제트(여성참정권 운동가)였던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1903년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창립한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수년간 투표권을 요구하며 투쟁해왔다.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강제 급식의 고통을 견뎌냈다. 그날 경마장에서 그녀가 품고 있던 것은 WSPU의 깃발이었다. "행동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여성참정권 운동.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20세기 초 영국 사회는 극심한 계급 갈등과 성별 불평등의 시대였다. 산업혁명으로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했지만, 정치적 권리는 전무했다. 1867년 남성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얻었을 때도 여성은 제외됐다. 평화적 청원은 무시됐고, 의회는 여성참정권 법안을 번번이 부결시켰다. 좌절한 여성들은 점차 과격해졌다. 유리창을 깨고, 우편함에 불을 질렀다. 정부는 이들을 범죄자로 취급했다. 1913년 제정된 '고양이와 쥐 법'은 단식투쟁으로 쇠약해진 수감자를 석방했다가 회복되면 다시 구속하는 잔인한 법이었다. 에밀리의 죽음은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나온 최후의 선택이었다.
사라 가브론 감독의 Suffragette는 이 역사적 순간을 세탁공장 여성 노동자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의 눈으로 재구성한다. 가상의 인물 모드는 처음엔 정치에 무관심한 평범한 노동자다. 하지만 공장에서의 성폭력, 열악한 노동 조건, 자신의 딸마저 보호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며 각성한다. 영화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보다 한 여성의 내밀한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캐리 멀리건은 모드의 고뇌와 결단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기한 약사 이디스, 메릴 스트립이 잠깐 등장하는 에멀린 팽크허스트까지, 영화는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하나의 목표로 연대하는 모습을 그린다.
Suffragette (2015), 사라 가브론 감독. ⓒ Production Company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그 1913년 6월 4일이다. 에밀리 데이비슨의 실제 죽음을 목격한 모드는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영웅의 희생이 아니라, 그 죽음이 평범한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이다. 역사책은 에밀리를 순교자로 기록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죽음을 지켜본 수많은 익명의 여성들을 조명한다. 실제로 에밀리의 장례식에는 5만 명이 참석했다. 영화 속 모드처럼, 그들 대부분은 이름 없는 노동자였다. 역사의 전환점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각성에서 온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폭력에 대한 논란도 정면으로 다룬다. 재산 파괴는 정당한가? 변화를 위해서는 법을 어겨야 하는가? 영화는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
영국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것은 1918년, 30세 이상 재산을 가진 여성에 한해서였다. 모든 성인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1928년이다. 에밀리의 죽음으로부터 15년이 걸렸다. 오늘날 투표권은 당연한 권리처럼 보이지만, 불과 100년 전 누군가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2024년 현재, 전 세계 여성 국가원수는 여전히 10%에 불과하다. 임금 격차, 유리천장, 성폭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형식적 평등은 달성했지만, 실질적 평등은 요원하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폭력은 더욱 교묘해졌다. 100년 전 서프러제트들이 싸운 것은 단순히 투표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었다.
에밀리 데이비슨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사고였는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그녀는 경마장에 갈 때 돌아올 기차표를 샀다고 한다. 어쩌면 그녀는 깃발을 말에게 걸고 살아남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그녀의 의도보다 그 행동이 남긴 파장을 기억한다. Suffragette의 마지막, 모드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 시선은 100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권리들이 정말 당연한가? 그리고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6월 4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그 1913년 6월 4일이다](https://pltpjrfdfxxbnivrtoew.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films/suffragette_backdro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