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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째주 · 2024
[10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둘 다 전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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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둘 다 전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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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2월 8일, 상하이에 거주하던 영국인들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일본군이 상하이 조계지를 점령하면서 수천 명의 서구인들이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중에는 열한 살 소년 제임스 그레이엄 발라드도 있었다. 부유한 영국인 가정에서 자란 이 소년은 하루아침에 전쟁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졌다. 룽화 포로수용소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은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훗날 작가가 된 발라드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 『태양의 제국』을 발표했고, 이는 전쟁이 어린아이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언이 되었다.

역사 사건

2차대전 소년의 눈.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상하이 조계지의 몰락은 단순한 군사적 점령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19세기 중반부터 형성된 이 국제도시는 서구 제국주의의 상징이자 동서양이 충돌하는 최전선이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가 치외법권을 행사하던 이곳에서 중국인들은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일본의 침공으로 이 질서가 역전되었다. 어제까지 지배자였던 백인들이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었고, 그들이 누리던 특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는 아시아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종언을 고하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전쟁은 기존의 인종적 위계질서를 뒤흔들었고, 식민지 체제의 허약함을 드러냈다. 열한 살 소년의 눈에 비친 이 극적인 전환은 20세기 세계사의 거대한 변곡점을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렌즈가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mpire of the Sun은 발라드의 자전적 경험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한 소년 짐은 상하이의 부유한 영국인 가정에서 자라다가 전쟁으로 부모와 헤어진다.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며 그는 생존의 기술을 배운다.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소년의 시선으로 본 기이한 모험담처럼 전개된다. 짐은 비행기를 동경하고, 일본군 조종사들에게 매혹되며, 수용소의 미국인 바시(존 말코비치)와 우정을 쌓는다. 어린 베일의 연기는 순수함과 광기 사이를 오가며 전쟁이 아이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스필버그는 거대한 스케일의 전쟁 장면과 소년의 내밀한 심리를 교차시키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한 아이의 초상을 그려낸다.

영화 스틸

Empire of the Sun (1987),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 Production Company

발라드의 실제 경험과 스필버그의 영화는 전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공유한다. 둘 다 전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소년에게 일본군은 단순한 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들의 규율, 충성심, 그리고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숭고한 죽음은 오히려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는 전쟁의 도덕적 복잡성을 드러낸다. 제국주의의 붕괴, 문명의 야만성, 생존의 본능이 뒤엉킨 가운데 소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영화와 실제 경험 모두에서 전쟁은 단순한 파괴가 아닌 기존 질서의 전복이자 새로운 세계의 잉태로 그려진다. 이러한 시각은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역사의 복잡성을 일깨운다.

2024년 현재,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진행 중이다. 그곳에도 전쟁의 한복판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발라드가 그랬듯, 그들도 폭격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폐허 속에서 놀이를 찾는다. 전쟁은 여전히 아이들에게서 순수함을 빼앗고, 너무 일찍 어른이 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놀라운 적응력으로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아낸다. 80년 전 상하이의 소년이 그랬듯이, 오늘날의 전쟁 속 아이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증언은 훗날 우리가 이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발라드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썼다. 그리고 스필버그는 그것을 영화로 만들어 전 세계에 전했다. 이는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질문이다.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전달해야 하는가. 특히 가장 무력한 존재인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제국의 몰락과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목격한 한 소년의 이야기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이 겪는 혼돈과 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질서도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변화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공식 예고편

Empire of the Sun (1987) —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