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의 영화 '머리 없는 여자'를 분석한 기사로, 중산층의 도덕적 마비와 집단적 망각이 국가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을 조명한다. 과거를 직시하지 못한 아르헨티나 사회가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 등으로 같은 비극을 반복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2001년 12월 19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은 분노한 시민들로 가득했다.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를 탈출하는 장면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냄비를 두드리며 거리로 나선 중산층들, 약탈당한 슈퍼마켓, 39명의 사망자. 이 모든 것은 1998년부터 시작된 경제 침체가 폭발한 순간이었다. 외채 1,320억 달러, 실업률 25%, 빈곤율 57.5%. 숫자들은 차갑지만, 그 안에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수백만 명의 삶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2001년 12월. IMF 구제금융 실패와 은행 예금 동결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 거리에서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한 '카세롤라소'. ⓒ Reuters
아르헨티나의 경제 붕괴는 단순한 숫자 문제가 아니었다. 1990년대 카를로스 메넴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페소화와 달러의 1:1 고정환율제, 무분별한 외채 도입이 만들어낸 구조적 모순이었다. 중산층이 하룻밤 사이에 빈곤층으로 전락했고, 은행 예금은 동결됐다. '코랄리토'라 불린 예금 인출 제한 조치는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정치 엘리트들은 위기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겼고, 2주 동안 5명의 대통령이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국가의 통치 시스템 자체가 붕괴한 것이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의 The Headless Woman은 2008년 칸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중년 여성 베로니카가 운전 중 무언가를 치고도 멈추지 않고 가버린 후, 점차 현실감을 잃어가는 이야기다. 마리아 오네토가 연기한 베로니카는 상류층 치과의사로, 사고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뭔가 어긋나 있다. 카메라는 그녀의 뒤통수와 옆모습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관객조차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녀가 친 것이 개인지 사람인지조차 모호하다.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와 머리 없는 여자가 교차하는 지점은 '외면의 구조'다. 마르텔 감독이 그려낸 베로니카의 도덕적 마비는 개인의 성격 결함이 아니라 계급 구조가 만들어낸 필연이다. 상류층 치과의사인 그녀는 무언가를 치고도 차를 세우지 않는다. 원주민 하인들이 흔적을 지우고, 가족이 증거를 은폐한다. 이것은 2001년 아르헨티나 중산층이 경제위기의 구조적 원인을 외면했던 방식과 정확히 겹친다. 위기의 징후를 무시하고, 책임을 회피하며, 기억을 지우는 것. 영화의 모호함은 그래서 정치적이다.
한국 사회는 경제위기와 집단적 망각의 순환을 직접 경험한 나라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한국판 '코랄리토'였다. 하룻밤 사이에 중산층이 무너졌고, 수만 개 기업이 도산했으며, 가족 해체와 자살률 급증이라는 사회적 참극이 뒤따랐다. 한국은행의 2023년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가계부채는 GDP 대비 100%를 넘어섰고, 이는 아르헨티나 위기 직전의 외채 비율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더 우려되는 것은 위기의 기억이 희미해진 세대가 늘어나면서, 신용 팽창과 자산 버블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르헨티나가 23년 후 극우 포퓰리스트 하비에르 밀레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망각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마르텔 감독의 카메라가 집요하게 따라가는 베로니카의 뒤통수는, 진실을 외면하는 사회의 초상이다. 아르헨티나가 경제 붕괴 후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는 체제의 결함보다 기억의 실패에 있다. 무엇을 쳤는지 확인하지 않는 것,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기억에서 지우는 것. 그것이 한 개인의 비극이 될 때는 영화가 되지만, 사회 전체의 습성이 될 때는 재앙이 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치고 지나가고 있는가.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경제위기의 구조적 교훈
신자유주의 정책과 고정환율제의 결합이 어떻게 국가 경제를 붕괴시키는지 보여주며, 현재의 경제정책 논쟁과 직결된 역사적 사례를 제공한다.
2
민주주의와 극단주의의 악순환
경제 위기로 인한 체제 불신이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며, 사회 안정성과 정치 안정성의 깊은 연관성을 조명한다.
3
집단적 망각의 위험성
과거를 직시하지 못한 사회가 같은 비극을 반복한다는 경고로, 역사 인식과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