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세상
세계와 스크린 사이
5월 4째주 · 2025
[5월 4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와 역사가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일상의 파괴'다
영화로 세상을 보다

[5월 4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와 역사가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일상의 파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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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의 평범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주부 모리타 시즈코는 새벽 5시에 일어나 가족의 아침을 준비했고, 여학생 사다코는 학교에 갈 준비를 했으며, 간호사 야마구치는 병원으로 출근했다. 오전 8시 15분,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직전까지 히로시마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폭심지에서 불과 260미터 떨어진 은행에서 근무하던 여직원 아키야마는 그날도 평소처럼 8시 정각에 출근했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히로시마 여성들이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전시 체제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이었다.

역사 사건

히로시마 여성의 일상.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순간이었지만, 그 전까지 히로시마는 군사 도시이면서도 수많은 시민이 거주하는 생활 공간이었다. 여성들은 전쟁 동원 체제 속에서 남편과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고, 배급 줄에 서며, 방공 훈련에 참여했다. 그들에게 전쟁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기 이전에 매일의 불편함과 불안으로 다가왔다. 죽순으로 만든 대용식, 몸뻬 바지, 천인침, 그리고 공습 경보 사이렌은 그들의 일상이었다. 정치적 프로파간다 속에서도 그들은 가족을 돌보고, 이웃과 교류하며, 작은 기쁨을 찾아가며 살았다.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In This Corner of the World는 히로시마 인근 쿠레에서 시집온 한 여성의 삶을 따라간다. 주인공 스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성으로, 전쟁 중에도 요리를 하고, 옷을 수선하며, 시댁 식구들과 부대끼며 산다. 논의 성우는 특별한 기교 없이 담담하게 스즈의 일상을 전달한다. 영화는 폭격과 기총소사, 원폭 투하라는 극적 순간들조차 스즈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부엌에서 밥을 짓다가 들리는 공습경보, 빨래를 널다가 목격하는 전투기, 그림을 그리다가 마주하는 버섯구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은 오히려 이런 일상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영화 스틸

In This Corner of the World (2016),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 ⓒ Production Company

역사는 히로시마를 원폭의 도시로 기억하지만, 영화는 그곳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스즈가 잃어버린 오른손, 폭격으로 죽은 조카, 원폭으로 사라진 친정 식구들은 통계가 아닌 구체적인 상실이다. 영화와 역사가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일상의 파괴'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개인에게는 밥상 위의 빈 자리, 더는 그릴 수 없는 그림,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사람으로 체험된다. 전쟁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매일의 결핍과 상실로 존재했고, 평화 역시 소박한 일상의 회복으로 인식되었다.

2025년 현재, 우리는 여전히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살아간다.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에서도 누군가는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전쟁의 양상은 변했지만, 일상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80년 전 히로시마와 다르지 않다. 역사는 승자와 패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기록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개인의 삶이 있다. 특히 여성들의 일상은 종종 역사에서 누락되거나 각주로만 처리된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전쟁의 참혹함을 가장 구체적으로 체현한 존재들이었다.

히로시마의 여성들과 영화 속 스즈가 우리에게 묻는다. 역사적 비극 앞에서 개인의 일상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거대한 폭력 앞에서도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행위는 단순한 생존인가, 아니면 인간성을 지키는 저항인가? 어쩌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라는 광기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아닐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버섯구름의 형상뿐 아니라, 그 아래서 사라져간 수많은 아침 식탁과 저녁 기도가 아닐까?

공식 예고편

In This Corner of the World (2016) —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