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세상
세계와 스크린 사이
11월 4째주 · 2025
[11월 4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와 역사는 '침묵당한 목소리'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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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와 역사는 '침묵당한 목소리'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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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26일, 동파키스탄의 다카에서 울려 퍼진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독립 선언은 9개월간 이어질 참혹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서파키스탄 군부는 '서치라이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벵골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시작했고, 특히 다카 대학의 지식인들과 힌두교도들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300만 명이 목숨을 잃고, 20만에서 40만 명의 여성이 성폭력을 당했으며, 천만 명이 난민이 되어 인도로 피신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일어난 대량 학살 중 하나였지만, 냉전의 그늘 속에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역사 사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1971.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이 전쟁은 단순한 분리독립 운동이 아니었다. 언어와 문화를 억압당한 벵골인들의 저항, 경제적 착취에 대한 분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서파키스탄은 우르두어를 강요하며 벵골어를 탄압했고, 동파키스탄에서 생산된 황마의 수익은 서파키스탄으로 빨려 들어갔다. 1970년 선거에서 아와미 연맹이 압승했음에도 군부는 권력 이양을 거부했다. 야히야 칸 정권은 '벵골인의 피를 통해 땅을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조직적인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인도의 개입으로 12월 16일 파키스탄군이 항복하며 방글라데시가 탄생했지만, 상처는 너무 깊었다.

므리티윤자이 데브라트 감독의 Children of War는 이 잊혀진 제노사이드를 정면으로 다룬다. 영화는 1971년 동파키스탄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파키스탄 군대의 만행을 피해 도망치는 네 아이들의 여정을 따라간다. 감독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의 참상을 재현하되, 어린이들의 시선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리다 이샤나와 루드라닐 고쉬의 연기는 순수함을 잃어가는 아이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카메라는 학살 장면을 직접 보여주기보다 아이들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영화 스틸

Children of War (2014), 므리티윤자이 데브라트 감독. ⓒ Production Company

영화와 역사는 '침묵당한 목소리'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희생자들은 냉전 구도 속에서, 국제정치의 계산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아이들은 어른들의 전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로, 그들의 고통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한다. 데브라트 감독은 43년이 지나서야 이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려 했다. 영화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된 기억을 현재로 소환하여 정의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쟁범죄자들이 여전히 처벌받지 않은 현실, 생존자들이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일상은 과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025년 현재,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1971년의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민간인 학살, 성폭력, 난민 행렬 - 전쟁의 양상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국제사회는 여전히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으로 개입하거나 침묵한다. 방글라데시가 겪은 고통은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인류가 반복하는 실패의 원형이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잔혹성은 변하지 않았고, 약자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강대국의 논리에 묻힌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예술은 패자와 희생자의 기억을 보존한다. Children of War가 43년 만에 스크린에 되살린 아이들의 얼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잊혀진 목소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남긴 가장 무거운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의 존엄을 깨닫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비명은 또 무엇인가?

공식 예고편

Children of War (2014) — 므리티윤자이 데브라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