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21일,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 보스니아 내전 종식을 위한 데이턴 협정이 체결되던 바로 그때, 헤이그에서는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가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의 기소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이들의 이름은 곧 20세기 말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잔혹한 인종청소의 상징이 됐다. 1993년 설립된 이 재판소는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국제사회가 만든 첫 전범재판소였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라예보 포위전, 코소보 알바니아계 추방. 재판정에 오른 범죄들은 문명사회가 목격한 야만의 민낯이었다.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1993–2017년. 보스니아·코소보 전쟁의 전범들을 재판한 UN 국제형사재판소. ⓒ ICTY
세르비아 전범재판은 단순한 법적 절차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티토의 죽음 이후 붕괴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민족주의는 가장 원시적인 폭력으로 변질됐다. '대세르비아주의'라는 이념 아래 자행된 학살은 20세기 유럽이 극복했다고 믿었던 파시즘의 망령이었다. 국제사회는 르완다 학살을 방관한 죄책감 속에서 발칸반도의 비극에는 개입했지만, 이미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재판소는 161명을 기소했고, 그 중 9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정의의 실현은 더뎠다. 카라지치는 13년간, 믈라디치는 16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밀로셰비치는 재판 중 옥사했다. 국제법의 한계와 정치적 타협이 정의구현을 가로막았다.
2018년, 세르비아계 미국인 감독 미라 브라노비치를 포함한 여러 감독들이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 The Trial이 공개됐다. 이 작품은 ICTY의 24년간 활동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법정 속기록, 증인들의 증언, 검사와 변호인들의 대립, 그리고 생존자들의 침묵. 카메라는 재판정의 일상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포착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통역부스에서 일하는 통역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증오와 복수의 언어를 중립적인 법률 용어로 번역해야 했다. 영화는 묻는다. 언어가 중립적일 때, 진실도 중립적이 되는가? 피해자의 울부짖음이 법정 기록으로 전환될 때, 무엇이 소실되는가?

![[12월 1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역사적 사건과 다큐멘터리는 '기록'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api/image?url=https%3A%2F%2Fcdn.asia24.co.kr%2Fimages%2Ftmdb%2F336be0b9c52bbfc0de3b31f49c71c18a.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