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18일,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영국 식민지 로디지아에서 독립을 이끈 해방 영웅은 만델라와 함께 아프리카의 희망으로 불렸다.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받은 지식인이자 게릴라 전사였던 그는 백인 소수 지배를 종식시키고 흑인 다수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37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그는 점차 폭군으로 변모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백인 농장 강제 몰수는 한때 '아프리카의 빵 바구니'로 불렸던 짐바브웨를 기아의 나라로 만들었다. 2008년 인플레이션은 2억 3천만 퍼센트에 달했고,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가 발행되는 초현실적 상황이 벌어졌다.
짐바브웨 무가베 독재. 관련 역사 사진. ⓒ Public Domain
무가베의 독재는 식민주의의 상처와 탈식민 권력의 타락이 얽힌 비극이었다. 백인 농장주들이 전체 농지의 70%를 소유한 불평등은 분명 시정되어야 했다. 하지만 무가베는 정의 실현이 아닌 권력 유지를 위해 토지 개혁을 이용했다. 야당 지지자들의 농장을 몰수해 측근들에게 나눠주었고, 농업 기술을 가진 백인들을 추방하면서 생산성은 급락했다. 경제 파탄으로 인한 국민 불만을 인종 갈등으로 돌리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수법이었다. 해방 영웅이 압제자가 되는 아이러니는 권력의 본질에 대한 씁쓸한 교훈을 남겼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액튼 경의 경구가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증명된 것이다.
2009년 루시 베일리와 벤 프리버그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Mugabe and the White African은 이 비극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영화는 짐바브웨에서 3대째 농장을 운영하던 75세 백인 농부 마이클 캠벨과 그의 사위 벤 프리버그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무가베 정권의 토지 몰수 명령에 맞서 그들은 나미비아의 SADC(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 법원에 제소한다. 카메라는 법정 투쟁과 함께 농장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협박을 생생히 기록한다. 500명의 흑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생계를 의존하던 농장이 파괴되는 과정은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무의미함을 드러낸다. 캠벨 가족의 용기는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식민 시대의 유산이 얼마나 복잡한 매듭으로 얽혀있는지도 보여준다.
Mugabe and the White African (2009), 루시 베일리 감독. ⓒ Production Company
역사적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과 현실의 폭력 사이에서 Mugabe and the White African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백인 농장주들이 식민 시대에 획득한 토지의 정당성은 무엇인가? 하지만 3대에 걸쳐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을 단순히 침략자로 규정할 수 있는가? 무가베는 인종 정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력 유지를 위한 폭력을 자행했다. 영화는 이 복잡성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캠벨이 농장 노동자들과 맺은 관계, 그들이 함께 흘린 눈물은 인종을 넘어선 인간적 유대를 보여준다. 역사적 정의와 현재의 삶, 집단의 권리와 개인의 존엄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2017년 군부 쿠데타로 무가베가 실각한 후에도 짐바브웨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토지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이고,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Mugabe and the White African이 던진 질문은 짐바브웨만의 것이 아니다. 역사적 불의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불의가 생겨나는 딜레마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청산, 미국의 노예제 배상, 팔레스타인 문제까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시도가 현재의 갈등을 낳는 사례는 무수하다. 정의의 실현이 복수가 되지 않으려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세대를 거쳐 모호해질 때, 우리는 어떤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가?
무가베의 몰락은 해방 영웅이 독재자가 되는 전형적 서사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Mugabe and the White African은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 숨은 복잡성을 드러낸다. 백인 농장주 캠벨은 식민주의의 수혜자였지만 동시에 독재의 피해자였다. 흑인 농장 노동자들은 해방되었지만 생계를 잃었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과 마주한다.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현재의 불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역사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환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어쩌면 진정한 정의는 보복이 아닌 화해에서, 배제가 아닌 포용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1월 3째주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는 이 복잡성을 단순화하지 않는다](https://pltpjrfdfxxbnivrtoew.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films/mugabe_and_the_white_african_backdro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