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특집

[특집] 영상 시대로의 전환이 가져오는 주체와 욕망의 고찰... “기존 매체에 대한 SNS와 미디어의 반란”

조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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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로로는 신이야!” 내가 나이 들었다는 걸 가장 실감할 때는 내 주변 사람의 나이듦을 응시할 때다. 어느덧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한다. 아직 미혼인 나에겐 저 사람들이 밞고 있는 경지는 그야말로 신세계다. 그들은 늘 나에게 자랑스럽게 자신이 밟은 코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알려준다. 그중에서도 생명과 관련된 이야기는 늘 경이로울 수밖에 없는데 육아 얘기를 하는 친구들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는 기승전뽀로로예찬이다. 한국은 두 명의 대통령으로 양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성인들의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는 투표권이 없는 아이들, 그것도 4세 전후의 유아들을 위한 뽀통령이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펭귄 모양의 캐릭터가 하는 일은 위대하단 말만으론 그 업적을 전부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는 아이를 멈추게 만들고, 아이의 시야를 잡아 바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지치고 고된 몸을 쉴 수 있게 해주며, 짧게 요기할 시간을 주기도 한다. 뽀로로 애니메이션의 노래 가사가 노는 게 제일 좋아라고 하는데, 정작 뽀로로 자신은 전국의 부모를 대신해 육아 일을 해주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성장은 스마트폰과 영상 플랫폼을 통해 더욱 확장된다. 과거 아이들을 모으기 위해선 디즈니 만화동산처럼 정규방송 시간을 맞춰야 했지만, 지금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유튜브 등을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영상을 보여줄 수 있다. 뽀로로의 성공에 힘입어 꼬마버스 타요’, ‘로보카 폴리’, ‘변신 자동차 또봇등이 다양한 연령층의 아이를 겨냥하며 한국 아동용 애니메이션 산업에 박차를 가했다.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나 서사에서 한 걸음 바깥으로 나와보자.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우는 아이와 그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아이 앞에 놓인 스마트폰이다. 아이가 보는 애니메이션은 아이가 우는 이유를 본질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한다. 이미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그리고 유튜브라는 매체는 이미 완성된 콘텐츠다. 아이에게 유튜브 영상은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모르핀이다. 실제 2011년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한 아이가 주전자에 양다리가 끼여 119가 출동했을 때 TV에서 상영되는 뽀로로를 보느라 아이가 고통을 느끼지 않고 구출에 성공했다. 아이가 고통마저 잊은 채 뽀로로에 집중할 수 있는 까닭은 뽀로로라는 대상이 언제나 아이의 고통과 슬픔을 해결해주는 기호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튜브란 기호는 스마트폰을 통해 원격현전(Telepresence) 된 모성이다, 유튜브와 아이의 관계에서 언어가 필요 없다. 유튜브만큼 모든 욕망을 그 즉시 말소시켜버리는 대리양육자를 찾기 힘들다. 이제 인터랙티브스토리텔링의 영상까지 재현되면서 영상은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와 관계 맺음 할 것이다. 유튜브는 아이의 목소리, 손짓, 표정 등에 반응할 것이며 그 즉시 아이의 삶을 기록하고 데이터의 속으로 편입시킬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삶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개발된 이후에 인지자본주의의 공간으로 편입된 것이나, 지금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태어난 즉시 두 가지의 신체를 받는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아날로그적 신체와, 비트의 공간을 살아가기 위한 조립 주체로서의 아바타.

 

그렇기에 그들은 태생적으로 바이링구얼(Bilinhgual)일 수밖에 없다. 각 세상에 맞는 언어를 구사해야 하고, 해당 리터러시를 습득한 존재와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아날로그 세계의 언어는 부모에게, 그리고 가상 디지털 세계의 언어는 스마트폰을 매개로 현현된 시뮬라크르적인 의사(疑似) 부모에게 말이다. 그들은 스마트폰의 탄생과 함께 태어났으며 스마트폰과 함께 새로운 감각을 지각하는 사이보그다.

 

그렇다고 우리가 디지털 시대를 마냥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유튜브와 아이의 관계가 아날로그적 부모와 디지털 부모와 양분되어서 서로의 알력다툼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 기계가 승리한다는 내용의 사이버 펑크 서사가 아니다. 만약 서두의 현상에 대해서 공포를 느낀다면, 그것은 연결 감각을 자각하기 거부한 단절세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초연결이라는 새로운 감각을 향유하고 있다.

 

10대부터 30대까지 카톡을, 40대부터 60대까지는 라인을 한다는 어플리케이션 세대론은 마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가짜 뉴스가 퍼지는 공간은 종이 매체에서 유튜브 공간으로 변화했고, 나이든 어르신들의 BJ 방송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기술변화를 따라가기 거부하는 그 순간 사람은 제자리에서 멈추게 되고 변화하는 시대와 균열이 일어난다.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공포가 아니라 공포로 위장한 노스텔지어다.

 

스마트폰의 가상현실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과는 또 다른 주체를 만들어낸다. 데스크탑을 바탕으로 한 PC 통신은 어디까지나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백과전람의 확장이었다. 정보를 습득하기 위하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나눠야 했던 기존의 삶은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뒤져야 했던 과거와 다름없었다. 단지 100권의 책을 뒤져야 했던 것과 달리 키워드를 통해 무한한 정보의 바다를 유람할 수 있고 유형의 자산을 자본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키워드를 통해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빈방에 들어가기 위해 스위치를 켜고 불을 켜는 것처럼, 모뎀을 켜고 끄는 행위는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스위치의 영역은 스마트폰의 개발과 함께 24시간 스탠바이 되어있는 가상의 세계로 변화된다.

 

아침에 일어나 밤새 밀려온 톡 메시지들을 확인하고, SNS에 올려둔 글에 달린 댓글과 다른 사람들의 글을 체크한다. 카페나 밴드 등의 글들을 체크하다 보면 비트 세계의 자아도 잠에서 깨어나 활동할 준비가 마무리된다. 로그인, 로그오프의 이분법은 가상의 세계에 내가 존재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던 기준이었고, 과거의 메신저들은 로그오프 상태의 사람에겐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도록 막아놓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소셜미디어는 다르다. 새벽 3시든, 4시든 언제라도 그 사람에게 글을 남길 수가 있다. 상대방이 자고 있든, 접속하지 않든,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든 아무 상관없다.

 

이것은 PC 통신과 웹브라우저 시대의 홈페이지와 이메일 같은 것이다. 그 사람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개인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것.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글을 남기는 공간이 공적인 공간, 또는 플랫폼에 존재하는 메일함이 아니라 개인의 파편이 편집적으로 조합한 SNS 공간이란 점이다. 라캉의 주체가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에서 위치설정이며 하나의 기표가 또 다른 기표에게 대표하는 무엇임을 상기하자면, 현대 사회의 주체는 그야말로 스마트폰이고 SNS고 어플리케이션일 수밖에 없다. 이제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접속해 있다. 고로 존재한다.”로 변화해야 한다.

 

통신망 사이에서 나는 단독자가 아니다. 홀로 생각하는 건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내가 존재를 증명받기 위해서 나는 내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어야 한다. 통신공간 속에서 나는 언제나 수많은 기표의 조합일 수밖에 없고 거대한 망 속에서 데이터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초연결사회(Hyper Connected Society)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SNS 중 페이스북을 하나의 예시로 살펴보자.

 

페이스북은 의 공간이지만, 나의 영역을 채우기 위해서 내 글을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 페이스북 친구 관계를 맺어 확장하는 것이다. 타인의 타임라인을 나의 타임라인으로 전유하고, 그 사이사이에 나의 삶을 끼워 넣는 것으로 나를 완성한다. 타인의 의견을 공유해서 내 의견을 덧붙이고, 타인의 게시글 밑에 답글을 달고 좋다/싫다/슬프다/화난다등의 기초적 감각을 표기한다. 이러한 복잡한 사회적 과정을 거쳐야만 나라는 주체가 페이스북에 입적된다.

 

해당 매커니즘을 통해 인간이 초연결사회에 맞는 초연결지능과 초연결 감각으로 신체를 변화시킨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리터러시를 익히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삶으로의 환생이다. 손에 연결된 스마트폰은 인간을 유사 사이보그로 만들었고 인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식사시간에 흔히 마주하는 한 풍경을 소환하자. 가족이 모여서 밥을 먹고 있는데 자녀가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다. 게임을 하거나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과거에는 공부하다가, 또는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다가 놓기 싫어서 식탁으로 가져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 아이가 아무거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어놓지 않는 이유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는 거라곤 그저 간간이 친구에게 오는 메시지에 답변하는 것뿐이다. 결국, 부모가 아이에게 잔소리하고 만다. 밥 먹을 때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라고 말이다. 그러자 아이가 반발한다. 친구랑 대화하고 있는데 어떻게 중간에 끊냐는 소리다.

 

이 사소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기계가 만들어낸 감각과 세대 단절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초연결 감각이 없는 세대에게 아이가 말하는 대화는 먼 거리에 있는 친구와 주고받는 편지의 감각이다. 이 자리에 부재한 사람을 신경 쓰기보다는 눈앞에서 마주하고 함께 자리한 사람의 존재를 직시하길 바란다. 그러나 초연결 감각이 형성된 세대에게 스마트폰 너머의 친구는 이 공간에 원격으로 현전 되어있다. 스마트폰의 대화는 바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주고받는 문자는 ㅋㅋㅋㅋㅠㅠ등의 자모를 통해서 풍부한 영상 언어를 제공하고, 이러한 반응은 동물적이고 즉발적이다. 의성어는 실시간으로 나의 웃음소리를 전달하고, 액정에 찍힌 글자 숫자가 나의 감정 적도를 측량한다. 그러니 윗세대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하란 소리는 적어도 아이의 눈앞에 존재하는 친구를 무시한 채 식사만 하라는 소리와 다름없다.

 

스마트폰으로 기계화된 인간에게 언어의 구조는 양극으로 분리되어 기의 부재는 기표 또는 기의 과다의 기표가 된다. 전자는 시스템적 언어이고 후자는 ’(Meme)이다. 2016년 시스템적 언어의 형상을 잘 보여주는 시기가 있다. 2016년 발생한 인공지능과 문학 사이의 일련의 사건들이 그러하다. 20163월 일본의 문학 공모전인 호시 신이치 상에서 전자정보시스템 전공인 사토사토시 교수의 팀의 AI 작품인 컴퓨터가 소설을 쓴 날1차 통과했다.

 

하코다 테미미래 미쓰바라 히토시 교수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프로젝트 보고회에서 “2년 뒤에는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소설을 쓸 수 있게 하겠다라고 단언했다. 온라인 매체 <아르스테니카>에서는 공상영화 축제 사이파이 런던에서 굿윈과 오스카 샤프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벤자민각본의 영화 <선스프링>(Sunspring)이 선보여지기도 했다.

 

미쓰바라 히토시 교수가 이끌었던 프로젝트 변덕쟁이 인공지능 프로젝트 작가예요는 무려 4년 동안 호시 신이치 상에 맞춰 호시 신이치 풍의 소설을 쓰고자 준비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예술이 과연 예술인지 아닌지의 선택은 예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의 결정에 맡겨졌다. 사람들은 결국 해당 소설이 본심을 통과하지 못하자 인공지능은 예술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비관적 시선을 내놓았다.

 

이러한 비관적 시선은 해당 창작들의 매커니즘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자 더욱 강화되었다. 해당 소설들은 인공지능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 아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간다면 이것은 프로그램을 통해 말뭉치화된 언어의 배열이었다. 사건의 토대인 뼈대를 잡고, 그 뼈대를 만들 주어, 서술어, 목적어 등의 단어를 모두 프로그램 안에 넣어두고, 해당 단어를 무작위로 배열하게끔 하는 것이다.

 

미쓰바라 히토시 교수는 해당 작업이 AI20%, 인간이 80%의 비중으로 이루어졌다고 발표하였으나 사토 사토시 교수는 그런 이야기를 부정하였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레고 블록을 예시로 들며 레고로 매뉴얼에 나온 그대로 모형을 조형했다고 할 때 그 조형을 인간이 했다고 하지 메뉴얼이 만들었다고 하니 않는다며 현재 완성된 소설 역시 인간의 작업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한겨레>,소설 쓰는 알파고는 없었다, 2016.06.26) 엄밀한 의미의 인공지능은 학습(learning)과 진화(evolution)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의 개입 없이 업데이트가 이루어지고,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토 사토시 교수의 프로그램은 아직 창의적 창작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단순히 파편들을 인간에 의해 끌어모으고 배열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렇게 끌어모은 텍스트 파편을 다시금 연결해 텍스트 형태에 가깝게 끊임없이 다듬고 배열하는 몫은 인간에게 있다. 호시 신이치 상의 예심 1차를 통과한 것은 인공지능이 창발적으로 글을 잘 써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호시 신이치의 소설을 4년 동안 연구해온 연구자 자신이 글을 문학적으로 잘 배열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기의 부재의 기표, 시스템 언어는 의미망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구조와 형상 속에서만 한정적으로 작동된다. 오로지 기표의 이미지를 최소단위와 점과 선으로 분절하여 분석하고, 이를 통해 요구되는 정보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의 ‘Image-embodied’ 방식이 최근 인공지능 시스템의 학습 방법론이다. (이지용, 새로운 인지방식의 탄생, ‘야민정음현상의 의미와 가치,한국사전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18.2, 86) 해당 알고리즘을 거쳐 나온 문장은 단어와 단어의 의미적인 결합이 아니라 수많은 데이터베이스의 용례에서 얼마나 인접하게 연결되었는가?’, ‘단어들끼리의 배열 속에서 단어는 어떠한 형태소로 구현되었는가?’의 정합성에 따라 나열될 뿐이다.

 

문학적 언어는 문학 구조 속에서 일상어의 의미를 벗어나 작가의 의도에 따라 독자적 의미망을 형성하는데, 소수의 데이터나 특정 작가의 스타일을 학습시킨 결과물에서는 텍스트의 의미 바깥에서 과도하게 수사된 언어적 나열체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사토 사토시 교수가 기계는 소설을 인식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소설 개발을 더이상 진행하지 않고 그만둔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다.

 

텅 빈 기표 속에는 어떠한 의미도 다 들어갈 수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더욱 소수로 파편화된 인간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신념, 공유된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기의들을 하나의 기표로 집어넣었다. 리처드 도킨스가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하기 위해 명명한 밈은 인터넷 공간에서 수많은 이미지 파일로 재생산되었다. 짤방이라고 불리는 한 컷, gif 포맷으로 움직이는 그림의 형상은 이제 언어를 대체하기에 이른다.

 

카카오톡 오픈 카톡방을 이용한 고독한OO은 언어기능의 기계화를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독한~’ 오픈 카톡방은 문화콘텐츠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급부상했다. 하나의 주제가 정해지면 익명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에 자유롭게 들어온 익명 주체들은 주제에 관련된 이미지 파일로만 대화를 할 수 있다.

 

고독한 박명수 오픈 카톡방으로 308명이나 들어있는 저 공간에서 그 누구도 텍스트로 이루어진 채팅을 치지 않음에도 그들의 대화는 이미지로서 이어진다. 대화가 유기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주제가 있으면, 그 주제와 주제를 이어붙이는 수많은 이미지의 파편들이 산발적으로 존재한다. 저 속에는 서사가 없다. 병렬적 그림들을 이어붙여도 만화 같은 독해는 불가능하다. 저들에게 대화는 그저 발화하는 그 자체, 그리고 그 공간에서 함께 접속해 있고 이미지 기표로 대화한다는 자체가 소속감과 존재감의 전부다.

 

유튜브 플랫폼을 유랑하다 보면 기이한 영상들을 마주하게 된다. 주로 어린아이들의 영상에서 일어나는 방식인데, 어린아이가 등장해서 별달리 독특하지 않은 일상의 조각을 영상으로 녹화해 올려놓는 것이다. 이를테면 친구에게 나 점심 맛있게 먹었는데 너는 뭐해?’ 하는 일상의 대화가 유튜브로 올라와 있다. 그리곤 그 링크를 친구에게 보내는 것이다. 카톡으로 동영상을 찍어 보내거나, 텍스트로 써도 되는 평범한 대화가 그렇게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접속 주체는 끊임없이 가상의 주체가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영상 그 자체가 삶이자 기호이다. 이들에게 노모포비아(nomophobia)는 단순히 핸드폰에 대한 강박감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감각으로 전유 된다.

 

현대 사회의 지배하는 감각은 그야말로 유튜브 리얼리즘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과거의 리얼리즘들이 세계의 개연에 골몰하며 콘텐츠를 탐닉하였다면 유튜브 리얼리즘은 개별 콘텐츠에 골몰하지 않는다. 이것은 종적 사고의 형태가 아니라 횡적 확장의 세계다. 시작과 끝이 없다. 횡적으로 확장되는 콘텐츠는 복제의 복제의 복제일 뿐 사고를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생성 이전의 욕망이 해결되는 플랫폼으로 들어간다. 나는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생성 이전의 욕망이 해결되는 플랫폼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큐레이션의 역설이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나라는 데이터베이스의 집합을 통해 욕망이 명명되기 이전에, 욕망하기 이전에 욕망을 해결해버린다. 유튜브나 각종 영상 콘텐츠가 모르핀으로 작동하는 것은 플랫폼 큐레이션이 욕망에 대해서 사고하는 걸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들의 리얼리즘이 영상 이미지의 선명함이나 현실적 재현을 의미하진 않는단 점이다. 그들의 리얼리즘은 철저히 현대 스마트폰 기술의 재현 정도에 맞춰져 있다. 아래의 영화에서 해당 현상을 확인해볼 수 있다.

 

2018년 상영된 영화 <서치>는 우리 일상의 수많은 카메라를 통해 재현된 추리 영화로 스마트폰, CCTV, 노트북 등에 설치된 카메라뿐만 아니라 수많은 메신저를 통해서 영상을 재현한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러한 영상의 화질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조잡하고 저급하다는 사실이다. MCU 영화를 비롯해 수많은 SF영화에서 재현되는 CG만 보더라도 현대 영상기술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치>에서 바라보는 이미지는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깨진 픽셀의 세상을 재현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이 리얼하기 때문이다.

 

영상세대들이 주목하는 리얼리즘의 기준이 유튜브이며, 그들의 삶은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면 파편화되는영상기호들에 의해서 구현되고, 그렇기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영상을 향해 몰입해 서사를 채워나간다. 그들에게 기표는 불완전할수록 완전하다. 오히려 선명한 독해는 접속을 끊어낸다. 이미지의 파편으로 가득한 고독한 카톡방이 대화의 장이자 사회로 작동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과거 카를 만하임이 세대위치라고 이야기한 것은 시대를 같이 경험하고 역사적인 사건들에 공통으로 참여하며 경험을 공유함을 전제했다. 그러나 이제는 같은 시대와 경험으로도 같은 세대로 엮일 수 없다. 세대를 나누는 것은 사건의 경험이 아니라 기계적·기술적 체험에 기반한 감각 형성이다. 이것은 리터러시를 갖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비극적이게도 기술이 발전되고 기술에 적응하는 텀이 점차 짧아질수록 세대간 간극은 더욱 커져가며, 이것은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인간 개별의, 또는 집단의 사고를 괴신하는 건 삼가하자. 억지로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해봤자 속도에 패배하고 매몰당할 뿐이다. 그보다는 더욱 기계의 극단으로 사고를 밀어내자. 사회적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서 오히려 기술이 필요하다는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와 닉 스르니체크(Nick srnicek)의 가속주의적 정치를 위한 선언(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의 말을 상기하자. 우리의 언어는 지금보다도 더욱 유튜브화 될 것이다.

 

가상의 주체는 현대의 기표와 기의로 명명할 수 없는 디지털 형식의 욕망을 더 첨예하게 다룰 것이다. 확장되는 욕망의 방식은 쉽사리 국가를 연결하고 공유된 수행성을 바탕으로 한 팬덤이 중요해질 것이다. BTS의 성공은 상징적인 지표다. 한국 문화콘텐츠 산업의 주축이었던 K-POP과 아이돌이 방송 산업에서 유튜브로 옮겨가 무한히 확장하는 BTS 월드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 쉽게 초연결 감각을 자각하고 라는 가상의 주체를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이미 그러한 상태다. 단지 인정을 거부하고 있었을 뿐.

 

 

 

이융희

 

소설가 겸 문화연구자.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2006년 장르 판타지 소설 마왕성 앞 무기점으로 데뷔 이후 6, 19권의 소설을 출간하였으며 현재 장르 비평팀 '텍스트릿'의 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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