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영상 시대로의 전환이 가져오는 주체와 욕망의 고찰... “기존 매체에 대한 SNS와 미디어의 반란”
“뽀로로는 신이야!” 내가 나이 들었다는 걸 가장 실감할 때는 내 주변 사람의 나이듦을 응시할 때다. 어느덧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한다. 아직 미혼인 나에겐 저 사람들이 밞고 있는 경지는 그야말로 신세계다. 그들은 늘 나에게 자랑스럽게 자신이 밟은 코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알려준다. 그중에서도 생명과 관련된 이야기는 늘 경이로울 수밖에 없는데 육아 얘기를 하는 친구들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는 ‘기승전뽀로로예찬’이다. 한국은 두 명의 대통령으로 양분돼 있는데 하나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성인들의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는 투표권이 없는 아이들, 그것도 4세 전후의 유아들을 위한 ‘뽀통령’이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펭귄 모양의 캐릭터가 하는 일은 위대하단 말만으론 그 업적을 전부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는 아이를 멈추게 만들고, 아이의 시야를 잡아 바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지치고 고된 몸을 쉴 수 있게 해주며, 짧게 요기할 시간을 주기도 한다. 뽀로로 애니메이션의 노래 가사가 “노는 게 제일 좋아”라고 하는데, 정작 뽀로로 자신은 전국의 부모를 대신해 육아 일을 해주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성장은 스마트폰과 영상 플랫폼을 통해 더욱 확장된다. 과거 아이들을 모으기 위해선 ‘디즈니 만화동산’처럼 정규방송 시간을 맞춰야 했지만, 지금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유튜브 등을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영상을 보여줄 수 있다. 뽀로로의 성공에 힘입어 ‘꼬마버스 타요’, ‘로보카 폴리’, ‘변신 자동차 또봇’ 등이 다양한 연령층의 아이를 겨냥하며 한국 아동용 애니메이션 산업에 박차를 가했다.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나 서사에서 한 걸음 바깥으로 나와보자.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우는 아이와 그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아이 앞에 놓인 스마트폰이다. 아이가 보는 애니메이션은 아이가 우는 이유를 본질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한다. 이미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그리고 유튜브라는 매체는 이미 완성된 콘텐츠다. 아이에게 유튜브 영상은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모르핀이다.
실제 2011년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한 아이가 주전자에 양다리가 끼여 119가 출동했을 때 TV에서 상영되는 뽀로로를 보느라 아이가 고통을 느끼지 않고 구출에 성공했다. 아이가 고통마저 잊은 채 뽀로로에 집중할 수 있는 까닭은 뽀로로라는 대상이 언제나 아이의 고통과 슬픔을 해결해주는 기호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튜브란 기호는 스마트폰을 통해 원격현전(Telepresence) 된 모성이다, 유튜브와 아이의 관계에서 언어가 필요 없다. 유튜브만큼 모든 욕망을 그 즉시 말소시켜버리는 대리양육자를 찾기 힘들다. 이제 인터랙티브스토리텔링의 영상까지 재현되면서 영상은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와 관계 맺음 할 것이다. 유튜브는 아이의 목소리, 손짓, 표정 등에 반응할 것이며 그 즉시 아이의 삶을 기록하고 데이터의 속으로 편입시킬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삶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개발된 이후에 인지자본주의의 공간으로 편입된 것이나, 지금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태어난 즉시 두 가지의 신체를 받는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아날로그적 신체와, 비트의 공간을 살아가기 위한 조립 주체로서의 아바타.
그렇기에 그들은 태생적으로 바이링구얼(Bilinhgual)일 수밖에 없다. 각 세상에 맞는 언어를 구사해야 하고, 해당 리터러시를 습득한 존재와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아날로그 세계의 언어는 부모에게, 그리고 가상 디지털 세계의 언어는 스마트폰을 매개로 현현된 시뮬라크르적인 의사(疑似) 부모에게 말이다. 그들은 스마트폰의 탄생과 함께 태어났으며 스마트폰과 함께 새로운 감각을 지각하는 사이보그다.
그렇다고 우리가 디지털 시대를 마냥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유튜브와 아이의 관계가 아날로그적 부모와 디지털 부모와 양분돼서 서로의 알력다툼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 기계가 승리한다는 내용의 사이버 펑크 서사가 아니다. 만약 서두의 현상에 대해서 공포를 느낀다면, 그것은 연결 감각을 자각하기 거부한 단절세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초연결이라는 새로운 감각을 향유하고 있다.
10대부터 30대까지 카톡을, 40대부터 60대까지는 라인을 한다는 어플리케이션 세대론은 마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가짜 뉴스가 퍼지는 공간은 종이 매체에서 유튜브 공간으로 변화했고, 나이든 어르신들의 BJ 방송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기술변화를 따라가기 거부하는 그 순간 사람은 제자리에서 멈추게 되고 변화하는 시대와 균열이 일어난다.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공포가 아니라 공포로 위장한 노스텔지어다.
스마트폰의 가상현실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과는 또 다른 주체를 만들어낸다. 데스크탑을 바탕으로 한 PC 통신은 어디까지나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백과전람의 확장이었다.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나눠야 했던 기존의 삶은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뒤져야 했던 과거와 다름없었다. 단지 100권의 책을 뒤져야 했던 것과 달리 키워드를 통해 무한한 정보의 바다를 유람할 수 있고 유형의 자산을 자본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키워드를 통해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빈방에 들어가기 위해 스위치를 켜고 불을 켜는 것처럼, 모뎀을 켜고 끄는 행위는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스위치’의 영역은 스마트폰의 개발과 함께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