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의 조용한 시험, 강제징용 판결의 집행 재개 요구와 과거사·경제의 이중 회로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신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1인당 1억 원의 위자료 지급 의무가 일본 기업에 부과됐다. 그러나 이후 8년간 그 판결은 실질적으로 집행되지 못했다. 일본 기업이 자산을 한국 내 보유하지 않거나, 이미 철수했기 때문이다.
2023년 3월 윤석열 정부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기업 대신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고,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재단에 기여하기를 기대하는 방식이었다. 이 해법은 한일 관계의 급속한 개선을 가능하게 했다. 2023년 3월 한일 셔틀외교 복원, 2024년 4월 한미일 캠프데이비드 공동선언, 2024년 일본의 對한국 수출규제 품목 해제 등이 이 방안의 성과로 제시됐다.
그러나 2026년 봄, 제3자 변제안의 한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첫째, 피해자·유족 중 일부가 변제 수용을 거부했다. 피해자지원재단에 따르면 2023년 판결 대상 15명 중 약 3분의 1(4~5명)이 공탁된 위자료 수령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 기업이 직접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한다. 둘째, 대법원에서 2023~2025년 사이 추가 판결이 잇따라 확정되면서 집행 대상 피해자 수가 수백 명으로 확대됐다. 기존 재단 기금(약 40억 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다.
2026년 4월 초,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20여 명이 서울중앙지법에 일본 기업(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 등)의 국내 채권에 대한 강제집행 재신청을 제기했다. 2021년 대구지법 포항지원이 미쓰비시의 상표권·특허권 강제매각 결정을 내린 이후, 상위 법원에서 이 집행이 중지된 상태다. 유족들의 이번 재신청은 '제3자 변제 구조의 실질 붕괴 선언'에 가깝다. 이 사건이 다시 대법원까지 올라갈 경우, 2018년 판결의 최종 집행 가능성이 구체화된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청구권이 해결됐다"는 기존 원칙을 반복한다. 그러나 일본 내부에서도 변화가 없지 않다. 2025년 9월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대체된 후 신임 총리 고이즈미 신지로는 "한일 관계의 장기 안정은 단기적 이익을 넘어 가치가 있다"는 발언으로 기존 노선에서 미묘한 거리두기를 시사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 공식 성명은 여전히 강경 기조를 유지한다.
경제 차원의 이해관계는 점점 커지고 있다. 2025년 한국의 대일 무역규모는 약 1,020억 달러로, 수입 552억·수출 468억 달러 구조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화학 소재, 정밀 부품의 대일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특히 AI 반도체 장비인 EUV 관련 부품에서 한국은 일본 기업에 대한 의존이 유지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쇼크가 한일 공급망 협력의 재평가를 강요하는 가운데, 과거사 갈등이 재점화되면 경제 차원의 연쇄 파급이 크다.
안보 차원의 변수도 무시할 수 없다. 2026년 3월 한미일 국방장관 공동성명으로 3각 안보협력은 제도화 국면에 들어섰다. 실시간 미사일 경보 공유, 합동 해상훈련 반기 정례화가 시작됐다. 강제징용 판결의 집행이 본격화돼 일본 기업 자산이 실제로 매각되면, 이 협력 체제에 구조적 압박이 가해진다. 한국과 일본 모두 '안보 협력은 유지하되 경제 보복도 가능'이라는 이중 시나리오를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여론 지형은 복잡하다. 한국갤럽 4월 초 조사에 따르면 강제징용 '제3자 변제안'에 대한 찬성은 38%, 반대는 52%, 기타 10%였다. 반대 여론이 찬성을 앞지른 것은 2023년 이후 처음이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한일 관계 '개선 필요'는 67%, '악화 감수'는 19%로 여전히 관계 개선 선호가 압도적이다. 여론은 "제3자 변제 방식은 불만이지만, 한일 관계 전체가 악화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복합적 지형을 보여준다.
헌법재판소 변수도 있다. 2024년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이 제기한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에 대한 헌법소원'이 헌재에 계류 중이다. 헌재가 1965년 청구권협정이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지 않았다고 명시적으로 판단할 경우, 한국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은 법적 근거가 크게 약해진다. 2026년 4월 헌재가 내란특검법 헌법소원을 본안 심리에 회부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청구권협정 헌법소원도 본격 심리에 들어갈 가능성이 거론된다.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60년간 '관리 가능한 갈등'의 역사였다. 1982년 교과서 파동, 2005년 독도 분쟁 격화, 2012년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2018년 대법원 판결, 2019년 일본 수출규제, 2023년 제3자 변제안. 각 국면마다 관계는 악화와 회복을 반복했다. 2026년 봄의 국면은 "경제·안보 협력 심화와 과거사 집행 재점화가 동시에 진행"이라는 전례 없는 복합성을 띤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한일 양국이 과거사와 경제·안보를 분리 관리할 수 있는가. 한국 정부가 '과거사는 사법 영역, 경제·안보는 외교 영역'으로 구분한 시도는 2023년 이후 3년간 작동했다. 그러나 강제집행이 현실화되면 이 구분은 유지될 수 없다. 2026년 하반기, 한일 관계는 60년 역사에서 가장 촘촘한 조율을 요구하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2023년 해법의 3년 운영 끝에 유족의 집행 재신청이 제기되면서, 과거사-경제 분리 관리 전략의 지속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시험받는다.
한미일 3각 안보 제도화가 시작된 시점에 과거사 집행이 현실화되면, 안보 협력의 연쇄 손상이 불가피해진다.
내란특검법 헌법소원과 청구권협정 헌법소원이 같은 시기 헌재에 계류되면서, 2026년 하반기 헌재의 정치적 무게가 이례적으로 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