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문화

교양의 효용과 한국의 대중문화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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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와 문화연구

 

1) 영국의 대중문화와 노동자계급 문화

 

흔히 글로벌 대중문화라고 하면 미국의 대중문화를 떠올리지만, 영국의 대중문화 역시 미국 못지않은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엘튼 존, 오아시스부터 최근의 샘 스미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국의 대중음악인들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소설 해리 포터반지의 제왕시리즈는 책 그 자체로는 물론 영화로도 제작되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프로축구리그인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프로축구리그로 200개가 넘는 국가에 방송되고 있으며 총시청자 수는 50억에 육박한다. 그 외에도 영국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패션 등도 세계적으로 널리 수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영국의 대중문화가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가령 영국의 록 음악에서 자주 들려오는 힘차고 때로는 거친 느낌마저 드는 남자들의 합창, 그리고 비틀즈 출신의 존 레논이 첫 솔로 앨범 <John Lennon/Plastic Ono Band>(1970)의 수록곡 ‘Working Class Hero’에서 묘사한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 등이 좋은 예이다. 또한 20171월 국내에서 재개봉한 <빌리 엘리어트>(2000)나 영국 탄광촌 브라스밴드에 관한 이야기로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은 바 있는 <브래스드 오프>(1996)와 같은 영국 영화들 역시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를 잘 반영한 작품들이다.

 

더불어 대중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인문사회학적 연구들을 접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문화연구의 주요 저작들 역시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우선 문화연구 분야의 선구자인 저명한 영국의 인문사회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각종 저작들(문화와 사회(1958), 기나긴 혁명(1961), 시골과 도시(1973) )이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를 다루고 있다. 또한 문화연구의 고전인 폴 윌리스(Paul Willis)학교의 계급 재생산(1978)이나 딕 헤브디지(Dick Hebdige)하위문화 스타일의 의미(1979) 역시도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분석, 연구를 담고 있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영국의 대중문화와 문화연구에서 노동자계급 문화가 중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문화연구에서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에 관한 연구가 가지는 의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문화연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간단히 정의를 내리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2) 문화연구와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

 

문화연구란 말 그대로 문화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문화란 소위 고급문화(highbrow culture)’고전 문화(classical culture)’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대중문화(人衆文化, propular culture)’를 한다. 즉 문화연구는 대중문화에 대한 진지하고 비판적인(eritical) 접근을 특징으로 하는 연구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비판적인 접근이란 단지 대상이 되는 대중문화의 잘못된 점을 찾아내어 지적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길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연구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저급문화 (lowbrow culture)’에 불과했던 대중문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진지하게 접근하여 그것의 가치와 의의를 탐구하는 연구 방법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연구는 기본적으로 학제 연구 (學制硏究, Interdisciplinary Studies)’, 즉 여러 학문 분야가 제휴하여 수행하는 연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화연구는 문학,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연구, 역사, 철학, 미학, 사회학, 인류학은 물론 경제학, 경영학, 교육학 등과 같은 실증적인 학문 영역까지 모두 아우르는 연구 분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문화연구자들이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에 천착해 온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문화연구가 영국 학계를 중심으로 성립·발전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연구의 시작은 대체로 1964년 영국의 버밍엄대학교(University of Birmingham)의 현대문화연구소(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이하 CCCS) 설립으로 보는데, ‘문화연구라고 하는 용어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CCCS의 제2대 소장을 역임했던 문화연구의 거장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비롯하여 폴 윌리스, 딕 헤브디지, 리차드 존슨(Richard Johnson), 안젤라 맥로비(Angela McRobbie)와 같은 명망 있는 문화연구자들이 모두 이 연구소를 거쳐 갔을 정도로 CCCS는 새로운 학문 분야였던 문화연구의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COCS와 영국 학계를 중심으로 학문적 토대가 구축된 문화연구는 1970년대 말을 기점으로 미국

 

을 비롯한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마침내 우리나라의 학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가 문화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두 번째 원인으로는, 대중문화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일군(一群)의 영국 문화연구 학자들이 노동자계급 문화야말로 중산층 혹은 상위 계층이 즐기는 문화와는 다른 진정한 대중들의 문화라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급문화를 중심으로 발달해 온 상류층의 문화나 노동자계급과 상류층 사이에서 나름의 교양과 품위를 확보하려 노력했던 중산계급의 문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로서 노동자계급 문화를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영국 노동자계급의 문화는 상류층 및 중산층 문화에 비해 다소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면이 있지만 그만큼 실제 민중(民衆)들의 삶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노동자계급 문화에 관한 연구야말로 대중문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문화연구자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자국의 노동자계급 문화야말로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상업문화와는 차별화되는, 문화산업과 자본의 입김에서 비교적 독립적이고 진정성이 담긴 문화라고 생각했다. 우리말로는 똑같이 대중문화라고 번역되지만, 이들은 산업과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상업적인 대중문화는 매스 컬쳐(mass culture)’라는 용어로 불렀다. 이는 20세기 초반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장했던 문화 산업론’, 즉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대중문화는 예술적인 가치를 결여하고 있으므로 문화가 아닌 산업(공산품)’과 다름없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매스 컬쳐와는 달리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는 수용자들의 직접 참여를 통해 생산·향유되어온 자생적이고 진정한 대중문화로 여겼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취했던 영국의 초기 문화연구 학자들은 이후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문화연구의 접근법을 통해 다양한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시도한 전 세계의 많은 학자가 영국 노동자계급문화에 대한 그들의 선행연구를 전범(典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가령 1980년대 우리나라 학계와 대학 사회의 주요 담론 중 하나였던 민중문화론역시 실제 민중들의 삶과 유리되어 있는 상업문화와는 구분되는 진정성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이었다는 점에서 초기 영국 문화연구자들의 관점과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2. 리처드 호가트와 교양의 효용

 

1) 리처드 호가트의 생애

 

초창기 문화연구의 토대를 닦은 많은 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는 바로 리처드 호가트(Richard Hoggart)이다. 잉글랜드 중북부의 주요 공업도시인 리즈(Leeds) 지역의 가난한 노동자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호가트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여덟 살이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할머니 집과 고모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학문에 재능이 있던 그는 노동자계급 출신 청소년으로서는 드물게도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3)에 진학할 기회를 얻었으며,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계속한 끝에 영국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리즈 대학교(University of Leeds)에 입학할 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전후()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던 영국의 대중문화와 노동자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여러 대학을 거쳐 1962년 버밍엄대학교에 부임한 호가트는 본격적인 대중문화 연구를 위해 1964CCCS를 설립하였다. CCCS의 초대 연구소장을 역임한 그는 스튜어트 홀을 선임 연구원으로 임명하는 등 후배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홀은 1969년 호가트에 이어 제2대 연구소장이 된다. 이후 호가트는 유네스코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고, 골드스미스 런던대학교(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 재직하다 은퇴한 후 2014년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호가트는 문화연구라는 학문 분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COCS의 창립자이자 초대 연구소장이라는 점에서 향후 문화연구 전개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 및 후배 학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기리기 위해 골드스미스 런던대학교 측에서는 학교 본관 건물을 리처드 호가트 빌딩으로 명명하기도 할 정도로 그의 명성은 영국의 인문사회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2) The Uses of Literacyj: 'Literacy'9 9.1

 

호가트는 영국 노동자문화와 대중문화에 관한 다양한 저작을 남겼고, 특히 그의 초기 저서들은 문화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중에서도 1957년에 호가트가 발표한 책이자 문화 연구적인 관점에서 집필된 초기 저서인 The Uses of Literacy는 그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다. 이 책에서 호가트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2차 세계 대전 직후’(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 사이)라고 하는 특정한 시기의 정치·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변화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발전하며 변화하는지를 상세하게 밝혔다.

 

IT 책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여가()이 각서서 왜 The Uses of Literacy라는 책의 제목을 교양의 효용이라고 보여야 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해야 할 것 같다. 'literacy'라는 영어 단어의 사전의미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 즉 문해력(文解力)이다. 그런데 (많은 영어 단어가 그렇듯) ‘literacy’의 의미가 언제나 문해력과 일대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최근 몇 년 사이 미디어 리터러시 (rnecdlia literacy)’ 라는 용어가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채 영어 그대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아마도 이 용어를 원래 의미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매체를 읽고 분석·이해한 후 활용하는 능력이라는 긴 어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우리말로 바꾸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컨버전스'(convergence)라는 용어가 우리말의 융합()’과 비슷하지만 완벽하게 그 의미가 일치하지 않기에 컨버전스라는 영어 단어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과도 비슷하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literacy’ 역시 문해력이라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뜻을 담고 있다. 호가트는 전후 영국 노동자계급은 대중소설, 일간·주간신문, 잡지 등의 출판물과 방송, 음악, 영화 등과 같은 문화상품을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폭넓게 소비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출판물 및 미디어상품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중산층 혹은 중상류층(upper middle class) 이상의 사람들이나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소득이 증가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며 이들은 대중 출판물과 방송을 중심으로 한 문화상품을 많이 요구하게 되었다. 특히 호가트 자신처럼 노동자 계층 출신이지만 교육을 통해 중산층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비록 실제로 중산층에 들어오지는 못하지만 늘어난 소득과 개선된 생활환경을 토대로 중산층처럼 보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신문과 잡지를 읽고 방송을 즐기며 소설을 읽는 등의 행위가 일종의 교양으로서의 문화 행위가 되었다고 호가트는 생각했다. 따라서 The Uses of Literacy문해력의 효용(이용)’이 아닌 노동자계급이 갖추게 된 혹은 추구하게 된 교양의 효용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와 더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3) 교양의 효용속에 나타난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

 

교양의 효용에서 호가트는 1930년대 이후,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종전(終戰) 이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영국 대중문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흐름에 주목한다. 그가 주목한 새로운 흐름은 바로 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라디오 방송, 전후 폭발적으로 구독자 수가 증가한 황색 언론과 잡지, 미국 소설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값싼 페이퍼백(paperback) 형태의 폭력 섹스 소설 및 역시 미국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영화와 대중음악의 유행이었다.

 

호가트는 이러한 변화들이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한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국가이며, 특히 19세기 후반 화학공업과 제철 산업의 발달을 통해 세계 최고의 공업 국가로 성장하여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큰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그로 인해 영국에서는 근대적인 의미의 노동자계급이 다른 나라에 비해 일찍 형성되었었으며, 이는 곧 노동자계급 고유의 문화가 생성·발전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환경이 갖춰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호가트는 시골에서 태어났으나 산업화로 인해 도시 지역으로 이주한 전형적인 1세대 노동자계급이었던 자신의 할머니가 사용했던 언어 및 그녀의 취향이나 미적 감기, 생활 태도 등을 통해 노동자계급 문화의 뿌리를 밝히고 있는데, 이는 19세기 중후반의 영국에서 상류층의 문화 및 과거 농촌 지역의 문화와는 다른 생산지이고 독특한 노동자계급만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음을 드러낸다.

 

교양의 효용은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다. 1<낡은 질서>에서 호가트는 다양한 예시와 비교를 통해 과거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 고유의 특성에 대해 서술한다. 그가 묘사하는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의 본질은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강건함이며, 동시에 노동자 스스로가 문화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의 역할을 겸하는 직접성이다. 더불어 이는 다분히 가족과 동네 이웃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지역 공동체 문화이며, ‘그들(other)’로 불리는 외부인들(주로 공무원이나 회사 관리자 계급 및 중산층)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독립성이 강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는 종종 타자(他者)에 대한 배격이나 지나친 현실 중심주의, 혹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동자계급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냉소주의 및 순응주의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호가트는 노동자계급 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균형을 언급하며 노동자들이 스스로 적절한 수준에서 능동적으로 열심히 삶을 영위하고 있고, 그것이 노동자계급 문화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1부에서 묘사되는 노동자계급 특유의 다양한 생활습관 및 문화와 구어(口語)체 표현들은 노동자계급 출신인 호가트가 어린 시절 직접 겪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굉장히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그러나 2<새로운 것에 밀려나다>에서 호가트는 어조를 조금 바꾼다. 전후 영국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는데, 영국이 승전국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은 1954년까지 배급제를 실시해야만 했을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1960년까지 유지된 징병제는 노동자계급의 생활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반면 전후 미국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며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최강대국지위를 물려받았으며, 그 결과 영국은 다방면에서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특히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미국 대중문화가 영국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은 날로 커졌는데, 호가트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즉 오랜 시간에 걸쳐 자생적으로 형성된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의 전통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상업적인 미국 대중문화로 인해 큰 폭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호가트는 대중소설, 방송, 신문과 잡지, 대중음악 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호가트의 분석에 따르면, 이 모든 것들의 변화 방향은 바로 중앙집중화’, ‘산업화’, 그리고 표준화이다. 원래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는 지방 분권적인 공동체 문화의 성격이 짙었으나 제2차 대전 이후에는 런던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미디어 대기업의 힘이 지나치게 커졌다. 이로 인해 신문, 잡지, 소설의 양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어디에 사는 사람이건 중심부에서 만들어진 비슷한 것들을 접하게 되고, 이는 곧 과거 노동자계급 문화의 활력과 개성을 잃게 만든다고 호가트는 지적한다. 더불어 이러한 변화는 우민화(愚民化)를 초래하는데, 예전부터 복잡하고 어려운 것, 고차원적인 것을 피하고자 했던 노동자계급의 전통적인 성향이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특성을 지닌 현대 대중문화와 맞물리며 부조리한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호가트의 주장이다.

 

호가트는 전후 암울한 영국 사회상 및 미국 상업문화의 침투로 인해 냉소적이고 무기력한 태도로 일관하게 된 일반적인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이들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 즉 노동자계급 출신이지만 장학제도의 수혜를 입어 고등교육을 받고 그 결과 노동자계급에서 벗어난 똑똑한 노동자계급 출신 청년들의 성장 과정과 심리 상태를 명료하고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호가트 자신은 과거 노동자계급 문화만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영국 사회의 침체, 문화의 산업화, 미국 문화의 집투 등으로 인해 과거 노동자계급의 진정성활력이 사라지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아쉬워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특히 9장과 10장에서 잘 드러난다. 1950년대의 영국 노동자계급은 다양한 대중매체와 교육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교양을 얻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 교양이라는 것은 매우 한정적인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는, 껍데기뿐인 교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짜 교양때문에 진정성 있는 노동자문화의 활력이 말라가는 상황에 처했다고 호가트는 주장한다. 비록 마지막 장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노동자계급 문화 특유의 건전함과 활력에 대한 희망을 서술하고 있지만, 1950년대 영국 노동자계급문화에 대한 호가트의 시각은 우려로 가득하다.

 

3. 교양의 효용과 현재 한국의 대중문화

 

1) 교양의 효용의 의의

 

교양의 효용을 통해 호가트가 보여준 연구 방법론은 문화연구자들이 이상적인 연구 방법으로 생각하는 실증적 연구와 이론적 연구의 결합을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사회학, 문학, 언어학, 역사학, 인류학,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접근 방식 역시 학제 연구라는 문화연구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양의 효용을 통해 독자들은 두 개의 세계 대전 직후 커다란 변화의 시기를 겪던 영국의 역사와 정치 사회적 흐름을 읽을 수 있고, 당시의 미디어 한계와 발전상을 엿볼 수 있으며 그 결과 이 책은 미디어 연구의 고전으로 여기기도 한다. 또한, 당시 계층별로 가지고 있던 의식 및 생활 태도와 더불어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영국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

 

올해는 교양의 효용이 세상에 나온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미디어 환경과 문화산업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였고, 영국 노동자계급의 성격도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가령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방송이 대부분 라디오 방송인 것에 비해 현재의 방송이란 텔레비전과 인터넷 미디어 중심이다. 더불어 호가트가 이 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묘사하고 있는 인쇄 매체들, 특히 종이 신문과 잡지의 경우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영향력이 감소했다. 신문과 잡지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이제 인터넷에게 잠식당한 지 오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에 비해 가장 빠르고 급격한 변화를 겪은 분야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부분은 당연한 것이며, 일부 독자들은 여기에서 오는 시대적 괴리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대중문화에 대한 과거 영국 학자 특유의 냉소적인 엘리트주의적 태도는 대중문화 자체에 애정이 있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즐기며 살아가는 (필자를 포함한) 요즘의 일반적인 수용자들에게는 다소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이는 대중문화 혹은 문화산업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관점 차이에서 오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2)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과 능동적인 수용자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한 인터넷 서점의 교양의 효용독자 리뷰란에서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의견을 발견했다.

 

() 마지막으로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문화에 대한 비판과 이러한 문하에 노출되어 지적 고민 없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 동의를 하면서도 이런 시선을 가져도 되는지 막연한 지체감이 들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노동가 계급 형성은 아무래도 광복 이후, 특히 본격적인 산업화로 인해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심화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과 비교하면 거의 100년 이상 늦고, 따라서 호가트를 포함한 많은 영국의 문화연구 학자들이 주목했던 노동자계급 문화와 상업적인 대중문화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노동자계급 문화의 독자적인 형성 이후 미국에서 비롯된 상업적 대중문화가 침투한 영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노동자계급 형성과 서구 대중문화 유입이 같이 이루어지며 자생적인 노동자계급 문화의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1980년대의 민중문화론처럼 노동자계급 문화와 시장 지향적 대중문화를 구분 지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문화 산업이 급격히 성장한 1990년대로 들어오며 이러한 움직임은 퇴조하였고, 특정한 계급적 정체성을 지닌 문화의 존재를 규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더불어 1990년대 말부터 대중음악과 텔레비전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한국 대중문화 상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이른바 한류(韓流)’가 문화산업의 주요 화두가 되면서 산업화·표준화·중앙집중화된 문화상품은 비판의 대상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는 한류의 대표주자인 케이팝(K-Pop)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연습생의 발탁부터 아이돌로 데뷔하여 스타가 되는 모든 과정은 소수의 연예기획사에 집중되어 있으며(중앙집중화), 음악과 아이돌의 생산-소비-유통 과정은 철저한 분업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져 있고(산업화), 고도로 제도화되어 있다(표준화), 그리고 앞서 인용한 교양의 효용독자 리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계층과 교육 수준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수용자들이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이러한 문화상품들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다시금 호가트, 그리고 그 이전에 대중문화의 산업화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아도르노의 시각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호가트와 아도르노가 지적한 것처럼 문화의 산업화와 표준화는 분명 수용자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그들의 비판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용자들은 사실 그렇게 단순하고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수용자들이 능동성을 띤다는 것, 즉 수용자 개개인이 자신이 처한 정치·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비판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문화상품을 해석하고 재창조한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문화연구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60년 전 영국의 노동자계급 문화에 유효했던 비판의식이 지금도 적용 가능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수용자들의 능동성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으며, 미디어 산업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수용자들의 비판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일견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교양의 효용이 지금도 호소력을 지닌다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며, 그것이 이 책을 문화연구의 고전이자 인문사회학의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 조교수. 저서로 케이팝의 시대, 대중음악의 세계화

와 디지털화, 미디어와 문화(공저), 역서로 교양의 효용, 모타운: 젊은

미국의 사운드(공역)가 있다. gleeg@gmu.edu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