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만이 답은 아닌, 새로운 폭로가 담겨야 할 영화의 현재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 그리고 비정규직 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카트>. 상업영화로 만들어지기 어려운 소재이니만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이 컸다. 몇 부분 빛나는 순간도 있었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뻔한 전개 때문에 지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 영화를 보고 나서 왜 소위 사회 참여적 영화들은 투박하고 재미가 없는 것인지 찬찬히 따져볼 필요를 느꼈다.
물론 가장 쉬운 설명은 태생적 한계라고 보는 시각이다. 의미를 내세우다 보면 재미가 떨어지고 재미를 내세우면 의미가 퇴색하기 때문에 사회참여를 내세운 영화들은 어쩔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런 설명만으로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볼 수 있는 변호인 같은 영화의 흥행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지리멸렬한 현실의 복기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두 영화의 문제는 뭐였을까. 혹 실제 사건 복기에 지나치게 치중했던 게 문제는 아닐까. 영화의 스토리가 실화에 기반하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영화적 상상에 근거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투쟁의 경과를 평이하게 나열했다는 느낌이 든다. 두 영화 모두 자세히 뜯어보면 ‘백혈병’과 ‘해고’라는 사건의 발단이 주어지고 이에 맞서는 주인공의 싸움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싸움 자체가 별다른 긴장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다. 실제 현실을 보더라도 이런 싸움들은 그 당위성과 절박함과는 별도로, 이야기적 매력은 크지 않다. 힘의 비대칭성이 워낙 크고 몇 년씩 출구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싸움이 흥미롭기는 힘들다. 현실이 이럴진대, 이를 스크린으로 정직하게 옮기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메인 플롯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두 영화 모두 서브플롯을 활용한다. 주인공이 투쟁 과정에서 주변 가족과 겪는 갈등과 화해. 하지만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족주의 정서를 감안한다면 이런 서브플롯은 필연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고 신파로 흐를 위험이 다분하다. 정서적으로 쉬어 갈 자리를 주고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이 드러나기는 하나, 진부하다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플롯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 제작비의 문제나 감독의 역량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 이전에 사건 자체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다른 어떤 영화적 욕망보다 컸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이들 영화는 영화적 성취보다는 언론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사건을 관객에게 알리는 것이 애초 기획 의도였다. 시나리오 작법 책에 나오는 분류법에 따르자면 인물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 중심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사건이라는 것은 대중적으로 생소하여 설명할 거리도 많다. 자연히 각각의 인물에 할애할 시간이 줄어들면서 인물은 평면화되고 도식적인 느낌과 더불어 감동은 떨어진다.
극영화의 르포르타주화
그렇다면 어쩌다가 극영화가 사건 폭로에 천착하게 되었을까. 본디 사건을 알리는 건 저널리즘 또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일 텐데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했지만 최근 실화 기반 사회참여 영화들은 수구 정권 아래에서 대중들이 느끼는 정치적 불만과 피로감을 기반으로 생겨났다. 장애인 성폭력 사건을 다룬 도가니, 그리고 사법 폭력 문제를 다룬 부러진 화살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이런 흐름의 출발이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이런 경향은 영화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나타났다. 시사 문제를 다룬 팟캐스트들이 인기를 얻고, TV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권력과 비정규직의 애환을 다루게 되고(추적자, 유령, 직장의 신, 미생) 웹툰이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었다(26년, 송곳).
이런 현상은 언론-매체 환경의 보수화와 궤를 같이한다. 언론이 정권에 의해 장악되고 대중매체에서 진실을 접하기 점점 어려워짐에 따라 영화를 비롯한 많은 예술 장르들이 이러한 정보의 불균등성을 교정하는 유사 언론의 기능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맡게 되었다. 여기에는 몇 단계의 연쇄적인 이동이 나타나는데 먼저 방송국에서 쫓겨난 언론인들의 팟캐스트나 인터넷 뉴스 같은 대안 언론으로의 이동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방송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극영화는 다큐멘터리 또는 언론의 자리로 이동한다. 이런 가운데서 극장용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간 분업이 이뤄지기도 한다. 극영화는 준비 기간이 기므로 아무리 빨라도 5~7년 전 사건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다큐멘터리는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시의성 있는 이슈를 다루게 되었다. <MB의 추억>, <천안함 프로젝트>, <블랙딜>, 같은 작품이 그 예이다. 사실 2014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또 하나의 사회 참여적 영화는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이다. 이 영화 역시 공중파 언론이 다루지 않는 세월호 사건을 다루었고 6개월 만에 제작되어 부산국제영화제부터 개봉까지 정치적 쟁점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극장가는 점점 정치적 대리전이 벌어지는 격전지가 되어버렸다. <두 개의 문>으로 대규모 상영 운동이 펼쳐진 이래, 여러 사회참여 영화들은 이와 같은 집단적 관람운동을 펼쳐왔다. 이제 전방의 관람운동뿐만 아니라 후방에서의 보급 투쟁도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영화의 제작비나 마케팅비를 마련하고 영화를 홍보하는 것이 일반화된 것이다. 문화 전쟁의 중요성을 반영하듯 우파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에 대응하고 있다. <26년> 같은 영화는 투자 단계에서부터 어깃장을 놨고 <또 하나의 약속>은 상영관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관객과 만남을 방해했다. 또한 <국제시장>처럼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를 응원하는가 하면, <연평해전> 처럼 직접 선수를 육성해서 출전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극장가가 치열한 전쟁터로 변하면서 사회참여 영화들은 분노를 통해 정치적 행동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도가니> 의 경우 법 개정까지 이뤄내는 등 성과도 분명 있었지만 정치적 대리전의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우려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먼저 소재의 선정성 특히 성폭력 고문을 이용해 손쉽게 분노를 끌어올리려는 경향을 들 수 있다. 일종의 정치적 조급증도 지적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경우가 <남영동 1985>라 할 수 있다. 대선 직전에 개봉되어 모든 대선 후보를 시사회에 초대한 이 영화의 정치적 의도는 명백했다. 영화는 고문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며 관객을 자극했다. 이래도 분노하지 않을래, 이래도 행동하지 않을래, 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전략이 물론 일면 효과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관객에게 어떤 사유의 여백도 주지 않는 전략을 과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소위 우리 진영을 결집시키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진영의 벽을 넘어 상대를 부드럽게 설득하기엔 역부족이다. 되레 손쉬운 반감을 키우기 십상이다. 이런 식의 정치적 조급증은 불편한 에필로그에서도 드러난다. <남영동 1985>와 <변호인>은 에필로그에서 영화 속 이야기를 실제 역사와 연결시키려 한다. <남영동 1985>에서는 노골적으로 참여정부 시절의 각료 회의가 나오고 변호인에서는 인권변호사가 된 1987년 당시 송변을 통해 노무현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어찌 보면 영화의 정치적 입장을 선명히 한 것인데 특정 정파의 지지자들에게는 환호할 이유를 주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관객이 스스로 영화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닫아버리면서까지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게 과연 효과적이었을까?
보편에서 특수로의 이동
다른 미학적/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잠시 우회해보자. 형식적 민주화가 이뤄지던 1980년대 말 1990대 초, 한국 영화계에서는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와 작가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현안이나 실화를 다루기보다 풍자나 알레고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칠수와 만수>, <구로 아리랑>, <그들도 우리처럼>,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꽃잎> 등이 그 예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처럼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도 있었지만, 대다수 영화는 당시의 시대상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회 비판을 수행했다. 검열의 영향도 있었으나 당시 보급되었던 리얼리즘 이론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이들 영화는 시대정신을 감지하고 있는 전형적 인물과 전형적 사건을 통해 대중의 의식 고양을 도모하였다. 전형성이 갖는 문제도 많이 지적되었지만 어쨌든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당시 영화들이 보편적 서사에 대한 갈망이 강했다는 점과 특수한 사건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가장 선동적이고 직접적인 정치적 효과를 노린 <파업 전야>라는 노동 영화도 이런 리얼리즘 작법에 충실하였다. 제작 단체인 장산곶매 회원들이 직접 노동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과 생활하며 생생한 에피소드를 취재했으나 오히려 어느 사업장에나 있을 법한 보편적 이야기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런 전통에 비춰봤을 때 현재 한국 사회참여 영화는 보편에서 특수로 그 초점이 이동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을 꼽자면, 작가주의에서 기획 영화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리얼리즘 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것은 몇몇 대표적인 작가들이었다. 박광수, 장선우, 홍기선, 정지영, 장산곶매, 이창동 등은 리얼리즘 안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쳐왔다. 일관된 세계관이 있었기 때문에 개별 작품들도 나름의 깊이와 미학이 있었다. 하지만 근래의 실화 기반 사회참여 영화들은 사정이 다르다. 제작사에 의해 소재가 발굴되고 영화가 기획되기 때문에 감독의 일관된 작품 세계의 소산으로 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게다가 사회참여 영화와는 거리가 먼 감독들이 종종 발탁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감독의 독자적인 비전이나 미학보다는 소재의 비중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과거 영화들을 돌이켜보며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에 개입하려고 한 흔적이 엿보인다. 즉자적인 분노 자극적인 소재 정치적인 선명성을 주된 전략으로 삼기보다 풍자와 해학 은유와 상징 등 다양한 화법이 존재했다. 현실과의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관객에게 스스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도 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양한 영화적 실험과 상상은 참고했으면 좋겠다. 멀리 가지 않아도 전례들은 있다. 1980년대에 대한 은유가 돋보였던 <살인의 추억>, 시스템에 대한 풍자가 신랄했던 <괴물>, 다른 어떤 신화보다도 강한 여운과 메시지를 주었던 <박하사탕>, <한공주> 등이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도가니처럼 성폭행 사건-수사 과정-재판을 보여주며 손쉬운 공분을 자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성폭력 생존자의 사건 이후 시간이 어떨지 질문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 역시 같은 밀양 성폭행 사건에 모티브를 두고 있지만,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가해자 가족의 입장이 어떨지 질문하는 영화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실화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면서도 새로운 화법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평론가들은 모든 작품이 꼭 작품성이나 예술적 성취로만 평가받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나 재미가 떨어질 경우 더 넓은 관객층에게 다가갈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 선정적인 소재에 기대어 관객을 불같이 타오르게 하는 영화 역시도 관객을 피로하게 만들 위험이 크다. 그런 일시적인 분노로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하지 않았는가? 보다 차분하고 긴 호흡이 필요한 때다. 새로운 화법과 실험을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영화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박문칠
1978년생, 영화감독 2013년 다큐멘터리 <마이플레이스> 연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