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엄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복원
신자유주의 시대의 끝자락, 노동으로 증명하는 인간의 조건
세상이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2000년대 초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밀어닥칠 때만 해도 사람들은 연대를 통해 충분히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기회를 박탈하고, 이미 벌어진 격차에 대해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온갖 선전 선동으로 부조리한 시스템을 정당화할 때도 나아질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라는 위선의 이름표를 내건 무한 경쟁 시대의 진정한 무서움은 속도에 있다. 세상은 더 이상 올바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빠르게 사라져 간다. 무엇이 옳은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시간이 없다.
영화가 삶과 노동을 포착하는 방식
신자유주의로 포장된 경쟁 구도는 사람들이 연대하고 고민하고 투쟁할 시간을 앗아간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시간을 끈다.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는 논의 자체는 얼핏 정당해 보인다. 문제는 결론이 나기도 전에 빠르게 다음 고난과 불행이 밀어닥친다는 점이다. 노동으로 삶을 증명해야 하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오늘의 생계 앞에서 조금이나마 덜 손해 보는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끝없이 밀어닥치는 파도 앞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운 것부터 손을 놓는 셈이다. 그렇게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고 부조리에 침묵하는 데 익숙해지는 사이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빠져 있는 주변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쯤 깨닫는다. 이미 돌이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 함께 허우적거릴 뿐 사람들은 더 이상 안전망의 부재를 문제 삼을 여력조차 없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와 싸울 기회를 박탈당한다.
신자유주의는 교묘하고 은밀하게 약자가 약자와 경쟁하는 구도를 구축했다. 이것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다. 사건을 사건으로 덮고 작은 이익에 목매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상황의 문제다. 우리는 속도를 무기로 세상을 더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서있다. 구태여 끝자락이라고 말하는 건 눈앞에 종말적인 파국을 앞두고있기 때문이다. 자국중심주의가 첨예해지고 국가간 경쟁으로 전 세계가 블록화되어가는 지금, 신자유주의 체계 자체도 빠르게 붕괴 혹은 변형중이다. 최악은 구조적인 결함을 그대로 남겨두고 고립주의 노선으로 전환된다는 점에 있다. 안전망은 붕괴되고, 개인의 책임은 커지는데 각자 알아서 생존해야 한다는 공포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세계가 급변할 때 종종 사람은 지워진다. 정확히는 미시적인 개인사, 각자의 사정이 희석된다. 여기서 새삼 영화는 빛을 발한다.
영화는 힘이 있다. 지워진 것들을 복원하고, 누락된 기억을 재현하고, 거대한 흐름이 미처 보지 못한 것들에 카메라를 비춘다. 카메라는 언제나 거시사보다는 미시사에 호기심을 느낀다. 역사의 흐름이나 사회문제의 경향을 짚어주는 거대한 담론보다 오늘 내 옆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사랑한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모든 개인적인 것은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존경과 헌사를 보냈다. 이 말은 다시금 돌아와,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와도 공명한다. 모든 개인사, 자잘한 사연들, 뉴스와 역사가 기억해주지 못한 이야기들을 영화는 기억한다. 널리 퍼트리고 공명을 일으켜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우리의 모두의 이야기로 되돌린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노동이 삶과 어떻게 그물망을 형성하는지를 목격할 수 있도록 넉넉한 공감의 자리를 마련한다. 여기 세 편의 영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연대하고 끝내 살아남는가. 그들 각자의 이야기 속에 오늘의 진실이 숨 쉬고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여기 사람이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 '블루 칼라의 시인'으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의 2016년 작으로 같은 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수상이 작품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수상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보다 메시지, 시대에 공감하는 이야기의 필요성에 손을 들어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복지제도와 관료주의 앞에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한 시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목적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켄 로치 감독은 단호하게 고한다.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당신은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거냐고. 왜 지금 함께 분노하지 않느냐고.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잠시 일을 쉬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은 다니엘은 여러 가지 벽에 가로막힌다. 관공서에서는 컴퓨터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는 다니엘에게 인터넷을 이용해 신청서를 제출하라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수혜자를 고려하지 않는, 정확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숫자로만 계산하는 관료들 앞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조용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 와중에 공무원과 말다툼 중인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만나고,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다니엘은 케이티 가족을 도와준다. 그것은 케이티에 대한 연민과 보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을 노동을 통해 삶을 증명했던 한 노동자는 시스템 바깥으로 자신을 밀어내고 투명인간 취급 하는 사회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행보는 그 자체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실업급여 관리자가 당신에겐 질병수당과 실업급여를 받는 선택지가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지금의 결과가 당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 이라는 정부 측의 변명을 대변한다. 당신이 복지제도에 접근하기 위한 컴퓨터를 못 하는 건 당신의 책임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다니엘의 말처럼 우리에겐 사실 선택지가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평생 목수로 살았던 다니엘이 컴퓨터와 거리가 먼 건 당연한 일이지만 시스템은 그런 사각지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의 가난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행동, 즉 게으름에 따른 책임이라는 말로 확장될 수도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시스템은, 그리고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늘 당신의 책임을 묻는다. 너는 제대로 한 거냐고 이들이 알리바이를 확보하는 방식은 교묘하다. 몇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꾸미고 실질적으로는 한 가지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갖가지 유리 장벽을 설치해 방향을 유도한다. 그러고는 단언한다. 시스템은 최선을 다했다고. 정말 그런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유리 장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구걸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다니엘처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지는 굴욕을 수하고 개가 되느냐, 인간으로서 굶느냐 둘 중 하나다. 이것이 영화적 과장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스템의 자기변명과 환상을 하나씩 깨부숴나간다. 대단한 호소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고집스럽고 자기 삶에 떳떳한 노인 한 명을 그 상황에 가져다 놓을 뿐이다.
영화 말미 다니엘은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심장질환으로 일을 쉬어야 했던 목수는 정부로부터 정당한 의료수당을 받지 못했고, 당장의 생계를 위해 실업급여를 구걸해야 했으며, 끝내 잘못된 행정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존 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닙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소개하는 데 이 이상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이 한 장면을 제대로 공명시키기 위해 90분을 바친다. 다니엘의 죽음은 관객 모두 마음의 빛이 되어, 다시 한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되묻는다. 인간사회에서 부조리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을 멈춰서도 안 되고 비단 고발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켄 로치의 영화가 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항상 부조리에 대한 자각 그 다음 단계, 그러니까 분노를 매개로한 공유와 연대다. 당신은 이 상황을 용인할 수 있는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니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화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이러한 결말은 다소 작위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보일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래서 효과적이다. 켄 로치의 영화가 현실참여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미학적인 완성보다 관객을 일깨우는 신파를 선택한다. 시스템을 예리하게 해부하는 이성보다 그 앞에 선 인간의 표정에 좀 더 주목한다.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하는 힘이다. 켄 로치의 비극이 서사로서 소모되지 않는 까닭은 눈물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웃음은 인간을 바라보는 근간이고 눈물은 설득의 도구다. 그는 미학보다 인간을 우선한다. 이 지독한 비관론자는 끝끝내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희망을 품는다. 지쳐버린 다니엘이 더 이상 케이티의 집을 찾지 않을 케이티의 딸 데이지는 다니엘의 집을 찾아와 말한다.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이보다 강력한 설득의 언어는 찾기 어렵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연민과 연대가 당위의 영역에 있는 감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를 위로하고 돕는 연대의 증명. 그리하여 영화는 한 줌의 낙관에 기대 시스템의 불합리, 제도의 자기변명,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지배층의 변명에 일갈을 날린다.
켄 로치가 관객을 설득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는 게 전부다. 다니엘 블레이크와 의료심사관의 대화로 시작하는 오프닝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의료심사관은 다니엘에게 기계적이고 의미 없는 질문들을 반복한다.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리 외쳐 봐도 자동응답기 마냥 매뉴얼을 따를 것을 지시한다. 이 어둠 속의 대화가 모든 문제의 출발이자 본질이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마주 앉은 자리에 사람은 없다. 의료심사관의 말투가 기계음에 가까운 건 아마도 그가 그렇게 응대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장벽, 장애로 설정된 심사관과 공무원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준다는 거다. 그들은 복지를 바라는 이들을 기계적으로 응대하고 스스로 포기한 채 발걸음을 돌릴 수 있도록 설정된 유리 장벽들이다. 숫자와 효율을 최우선에 둔 시스템은 공무원들에게도 인간성을 포기하길 강요한다. 밥줄을 담보로 잡힌 공무원들은 기계로 학습되어 눈앞에 있는 대상을 인간이 아니라 제거해서 돌려보내야 할 귀찮은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효율을 먼저 생각한 제도는 응당 필요한 복지를 받아야 할 자와 이를 수행하는 자 양쪽을 동시에 멸시한다. 다니엘은 그들을 미워해야 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당장 눈앞에 대고 고함을 치는 편이 후련할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대신 곁에서 또 다른 모욕을 받고 있던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도와준다. 함께 괴물이 되는 대신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니엘은 우리를 부품 취급하는 시스템에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혹은 있었다는 외침. 그리하여 (케이티의 말을 빌리자면) 다니엘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준 영웅이 된다.
<내일을 위한 시간>, '나'의 존엄에서 출발하는 '우리'로의 연대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5)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 제시하는 시스템의 문제는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윤리적 선택을 강요하는 약자와 약자가 서로 싸우게 만드는 과정이다. 태양열판 제조 회사를 다니는 산드라(마리옹 코티야르)는 우울증으로 병가 중이다. 그런데 회사로 복귀하려고 보니 상황이 바뀌어 있다. 쉬는 사이 그녀의 업무는 다른 직원들이 나누어 처리하고 있었고 회사는 한번 줄어든 인력을 다시 늘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산드라의 복귀 대신 그녀의 몫보다 조금 못한 금액을 나머지 직원들에게 보너스로 제시하며 해고를 위한 투표까지 진행하는 것이다. 사측의 압력으로 첫 번째 투표 결과가 보너스를 받는 쪽으로 나온다. 하지만 일부 직원들의 반발로 다행히 두 번째 투표 기회가 주어지고 산드라는 주말 동안 몇몇 동료의 도움을 받아 주말동안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일일이 직장동료들의 집을 방문한다.
다르덴 형제는 <내일을 위한 시간>을 통해 “신자유주의 이후 경제위기로 소외된 사람들”의 사연을 다루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영화는 비단 유럽의 오늘만이 아니라 세계의 오늘, 우리의 오늘을 이야기한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국경을 넘어 세상을 잠식해가는 자본주의 민낯을 직시한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다르덴 형제는 이 문제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사측과 노동자의 단순한 대결 구도로 끌고 가지 않는다. 대신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산드라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와 그녀가 마주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통해 이 사태가 얼마나 끔찍하고 폭력적인지를 드러낸다.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는 조금씩 양보해서 동료를 살려주는 게 옳은 일이라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도 당장 한 푼이 아쉬운 처지다. 보너스 1천 유로는 누군가에는 그저 1천 유로지만 어떤 이에게는 자식의 학자금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족의 약값이다. 약자가 약자를 밀어낼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앞에서 섣불리 개인의 윤리를 외칠 수는 없다. 그조차 또 다른 폭력이자 강요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딜레마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에 있지 않다. 시스템이 다수결 등 민주적 방식을 위장해 개인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내몰 수 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준다는 게 영화의 핵심이다.
어떤 경우 자유의지는 일종의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지만 종종 양자택일의 선택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다. 영화 속 공장 노동자들은 얼핏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 사이 윤리적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에겐 처음부터 선택지 따윈 없었다. 신자유주의라는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욕망이 이 모든 상황을 제어할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복직이라는 미끼, 희망고문을 통해 해고자와 노동자 양쪽 모두를 길들인다. 다르덴 형제가 애써 드러내고 고발하려는 지점도 여기다. 이전 작품들에서 한 인물의뒤를 철저히 따르던 다르덴의 카메라는 이제 산드라가 만나는 12명의동료들이 내놓은 답변에 좀 더 신경을 기울인다. 동료들의 집을 방문해 읍소해야 하는 산드라의 지친 발걸음만큼 중요한 건 그녀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각양각색 반응들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산드라를 외면하고, 누군가는 용기 내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기로 한다. 이들 각자의 선택은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내놓는 반응의 압축판이라 해도 무방하다. 동시에 영화가 현실의 그림자를 포착하는 효과적인 접근법이기도 하다. 흐름 속에 있을 때는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신자유주의 하에 생존 중인 우리는 정작 우리의 얼굴을 마주 볼 기회가 거의 없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극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우리가 갈 수 있는 길, 가지 않은 길, 가야할 길을 미리 그려본다.
때문에 <내일을 위한 시간>은 유럽 어딘가에서 일어난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기득권으로 매도하는 실로 비이성적인 현실 속을 살아가는 2022년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미리 보여준 예언서라고 해야 할까. 2022년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파업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은 소름 돋을 정도로 이 영화를 빼다 박았다. 원청과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서로의 생존을 두고 다투는 사이 정작 부조리한 노동환경을 만들어 놓고 이익을 취한 이들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다는 소박한 요구는 자본가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설치한 복잡한 미로 속에서 쉽게 무력화된다. 그리하여 미디어에 새겨지는 건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이기적인 노동자라는 소름 끼치는 꼬리표다. 시스템 뒤로 숨은 자본의 욕망 앞에서 노동, 노동자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 <내일을 위한 시간>의 결말에는 그 소박한 희망이 담겨있다. 최후의 순간 찬드라는 양자택일의 함정을 거부하고 제3의 길로 나아간다.
마지막 순간 찬반 투표는 동률이 되고 산드라의 복직은 무산된다. 이때 동료들을 설득하여 동률을 만들어낸 산드라의 행보에 인상을 받은 사장이 또 다른 제안을 한다. 직원들의 보너스를 그대로 지급하되 계약이 만료된 또 다른 계약직 노동자 대신 산드라를 복직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이에 산드라는 그것이 또 다른 해고일 뿐이라며 단호히 거절한다. 어쩌면 판타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산드라의 행동은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지의 발현이라 할만하다. 자본의 제어되지 않는 욕망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다움과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길. 물론 그 길을 선택한다는 건 몹시도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나의 존엄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연대로 나아갈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본래 '우리'로 연대하고 힘을 모으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약자와 약자의 대결로 갈라치기를 하는 지금, 우리로서 연대하기 위해먼저 필요한 건 나의 자존을 우선 지키는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생존이 아닌 자존. ‘내일을 위한 시간’이 오기까지 필요한 오늘의 작은 인내. 오늘날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선 이토록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휴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출발하여 <내일을 위한 시간>을 경유한 질문의 답을 한 편의 한국영화에서 마주한다. 이란희 감독의 <휴가>(2020)는 일할 권리와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고군분투했던 한 남자, 아니 한 가족의 초상을 그린다. 어느 장기 해고노동자가 잠시 투쟁의 현장을 벗어나 보낸 시간을 따라가는 이 비범하고 독창적인 영화는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삶과 노동의 관계의 조정을 시도한다. 해고 후 5년째 길에서 천막농성 중인 재복이봉은 해고무효소송에서 패소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 시간 투쟁으로 비워둔 집에는 아버지를 반기지 않는 두 딸이 있다. 복직운동은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하는 동료들과 함께 가치를 향한 투쟁으로 연결된다. 개인적인 삶의 이익을 위해선 빨리 포기하고 다른 일을 구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막농성을 이어간 사람들은 그 이상의 가치, 공공이 선을 추구하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한 사람들의 모임이라 봐도 무방하다. 재판에서 패소한 후 눈앞의 벌이를 포기하고 복직 투쟁에 매진한 재복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냉혹하다. 처음엔 재복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한 가족들도 시간 앞에서 지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리하여 대학 입학을 앞둔 첫 딸의 등록예치금이 필요해진 재복은 돈을 빌려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결국 친구의 도움으로 인근 목공소에서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게 된 재복은 그곳에서 준영(김아석)을 만난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준영이 마음에 든 재복. 그러던 어느 날 준영이 일을 하다 다리를 다치자, 재복은 준영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다시 팔을 걷어붙인다.
<휴가>는 무언가를 강변하지 않는 영화다. 구성은 단촐하고 인물들은 대체로 무표정이며 메시지도 달리 도드라지지 않는다. 대신 이란희 감독은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 당연한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묘사한다. 가령 재복이 준영을 대신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려 하는 건 마치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주려는 행위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을 돕는다. 올바른 일을 한다는 당연한 걸 당연하게 하지 못하는 건 주변의 압력과 현실의 무게 때문이다. 양심을 말하면 바보가 되고, 좀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 말하며, 원칙을 말하는 이를 고지식하고 답답한 사람 취급하는 건 우리가 이미 그런 식으로 현실의 보이지 않는 장벽에 길들여진 까닭이다. <휴가>는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재복의 여정을 통해 그 위악의 장벽에 균열을 낸다.
<파마>(2009), <결혼전야>(2014), <천막>(2016) 등 단편영화를 연출해 온 이란희 감독은 자신의 첫 장편 <휴가>에서 천막 농성장 바깥으로 관심을 확장시켰다. 어쩌면 우리는 노동, 투쟁의 현장을 특별한 권리 투쟁의 운동이라고 분리시킨 채 무의식중에 노동운동을 대상화시켜 왔을지도 모르겠다. 투쟁의 현장은 치열하고,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한 사람들의 고난이 이어진다. 고난의 골이 깊을수록 그들이 택한 길은 더 값져 보이는 건 습관적인 반작용일 것이다. 하지만 <휴가>는 그러한 투쟁의 끝에서부터 입을 뗀다. 농성장 천막에서 가족이 있는 집으로 생계를 위한 일터로, 그리고 결국 다시 동료들이 기다리는 천막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 영화의 원제는 <밥줄>이었는데, 카메라는 인물들이 함께 밥을 나눠 먹는 순간을 집요하게 담는다. 노동의 본질이 먹고사는 일, 생존을 위한 일임을 잊지 않는 영화가 끝까지 애정을 드러내는 건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과정이다. 재복은 두 딸을 위해 밥을 만들고 일터에서 밥을 먹고 동료들을 위해 밥을 준비한다. 이란희 감독은 함께 먹는 것으로 성립하는 진실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이 영화의 제목이 최종적으로 '휴가'로 낙점된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핵심은 단순하다. 무엇으로부터의 휴가인가 적어도 재복이 천막을 떠나서 경험한 시간은 포기나 도피가 아니라 잠깐의 외유, 그러니까 일종의 휴가에 가깝다. 투쟁의 현장, 천막 바깥의 시간이 휴가라면 천막 안쪽의 일들, 그러니까 복직투쟁은 노동의 연장이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단호하고 엄격한 선언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복직 투쟁은 일을 멈춘 파업이 아니다. 인간에게서 부당하게 노동을 빼앗아 간 회사를 상대로 한 가장 치열한 노동 행위다. 투쟁이라는 일터에서 잠시 내려온 재복은 우리가 일상이라는 부르는 삶 속으로 잠시 휴가를 나왔다가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복귀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재복의 행동은 우리가 형편을 핑계로 잊고 있던 가치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 시대의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은 밥벌이다.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한발 나아가, 노동은 자아실현의 장이다. 우리는 노동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꿈을 성취한다. 마지막으로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노동은 균열과 반목을 억지하는 최후의 보루다. 세상을 한꺼번에 개혁하고 뒤바꿀 구원자 같은 건 없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것은 시류에 떠내려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외치는 자존의 목소리다. 영화는 한 명 한 명의 사소하고 위대한 시간을 담아내고 알릴 수 있다. 카메라는 기록한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카메라는 고백한다. 여기 우리가 있다고 염치가 희미해지는 시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의 땀방울이 모여 나빠지는 세상의 얼룩을 그나마 씻어내는 중이다.
송경원, 영화주간지 <씨네21>의 기자이자 영화평론가,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평론가로 데뷔했고 2012년 동국대 영상대학원 영화이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미지의 거장, 숨은 걸작>(2015), <격조의 예술가, 파격의 모험가>(2019), <프로듀서>(2019)를 공저했고, <이충호-만화웹툰작가평론선>(2019) 등을 집필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게임, 애니메이션, 문화산업에 대한 비평도 함께하고 있다. enki@cine21.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