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K-’ 시대와 한국문학
1. 한국 문화의 비상
2022년 여름, 한국 문화의 비상이 눈부시군요. 여기에서 비상이라 함은 물론 비상(非常)이 아니라 비상(飛翔)이지요. 최근 한국의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성과는 K-팝이나 K-드라마 같은 개별 분야를 넘어, K-콘텐츠나 K-컬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준까지 진행되고 있군요. 게다가 이런 흐름은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와 생활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어, 바야흐로 ‘K-’ 시대가 열려가고 있다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니겠습니다.
물론 이런 진술에 대해, 지나친 '국뽕' 의식의 산물이 아니냐는 반문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또한 국제 사회에서 그동안 한국이 차지하던 관심의 수준이 낮고 부정적이었던 탓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세계적 매체의 국제 뉴스에서 취급되던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북한의 미사일이나 역사적으로는 한국 전쟁 같은 안 좋은 소재와 연관되곤 했지요. 또한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외부적 시선을 보더라도,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두 거인 사이에 끼여 있어 흐리마리한 존재라는 것이 표준적인 틀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최근의 스포트라이트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측면도 있겠습니다. 약간의 긍정적 관심도 대단해 보인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한국의 대중문화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기념비적이라 할 만한 사건들이 최근 들어 속출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이 보이밴드 BTS 라 해야겠군요. 2022년 봄까지 6년 연속 미국 빌보드 음악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대단찮게 느껴질 정도여서, BTS는 이미 존재 자체가 사건이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이 역대 시청시간 1위를 기록하며 국제적 신드롬을 만들어낸 일,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이 비영어권 영화로서 사상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일 등이 함께 거론될 수 있겠네요.
이 셋은 최근 들어 너무나 많이 회자되었던 사건들이고, 각각이 지닌 의미 역시 작지 않지요. 그럼에도 한국 문화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개별 사건들보다 좀더 현저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눈부시다 함은 그런 점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인데, 이런 사건들이 예외적이거나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곧 그것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사건들은 흡사 빙산의 일각처럼, 음악과 영상을 포함한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지닌 역량 전체의 표현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한두 번은 예외적일 수 있지만, 반복되는 사건들의 행렬은 어떤 흐름의 필연성과 방향성을 보여주곤 합니다. 이를테면 <오징어 게임>이후로도 또 다른 한국산 드라마와 영상물들이,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또한 국제적 화제가 되고 있는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새로운 K-팝 그룹이 족출하는 대중음악계와 국제 영화제에서 연속 수상을 하고 한국 출신 감독과 연기자들이 국제적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계의 현실도 이런 흐름에서는 마찬가지이고, 또한 한국식 플랫폼과 함께 해외로 나간 한국 웹툰과 웹소설 등도 같은 흐름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질문이 있습니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물론 한국의 문화산업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역량 때문이라 함은 당연한 대답이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제대로 된 답이 될 수 없음 또한 당연해 보입니다. 문화와 예술은 흔히 꽃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그 같은 비유의 연장에서 말한다면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뿌리와 줄기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 착안한다면, 한국 문화의 현재 상태를 만들어낸 몇 가지 맥락들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문학의 최근 동향과 문학성의 향배 역시 그런 흐름과 무관할 수는 없겠습니다.
2. 코로나19와 ‘K-’ 시대
코로나19 감염병 사태가 발생하던 초기에도 그러하였지만, 만3 년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 뚜렷해진 것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지요. 미국 중심의세계 체제를 뜻하는 것이 곧 지구화이기도 했습니다. 초 연결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구는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번의 팬데믹 사태는 그 사실을 여실하게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감염병으로 인해 나라 사이의 교통이 차단되자 오히려 뚜렷하게 드러났던 것이 곧 국제적 교통로와 교통량의 존재였지요.
숙주의 국적을 가리지 않는 바이러스는 제트 비행기와 같은 속도로 전파되어, 감염병 사태가 세계적 수준의 재난으로 확장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요. 지구 전체가 감염병 방어라는 동일한 과제를 부여받게 되고, 그럼으로써 팬데믹이라는 사태 자체가 한나라 거버넌스의 수준을 보여주는 공통의 플랫폼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어떻게 자국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지에 대한 성적표를 모든 나라들이 실시간으로 받아들게 된 것입니다. 감염병 환자들의 치명률과 사망률, 백신 접종률 등만이 아니라 각종 경제 지표들, 그리고 의료 관리의 체계나 효율성, 통계 관리의 신뢰도 등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각국의 역량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셈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의 대처 모델이 받아온 긍정 평가는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는 면도 있어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K-’ 시대의 발흥과 코로나19 감염병 사태가 동시적인 현상으로 보이기도 했지요. 이것은 단순히 두 현상이 시간적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둘의 겹침 자체가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이 한국 대중문화의 홍기와 인과적으로 연관성을 가진다는 말은 물론 아니지요.
특정 문화에 대한 애호와 존중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산출한 사람과 나라에 대한 호감을 바탕으로 합니다. 또한 거꾸로, 특정 국가나 사람들에 대한 애호가 그들이 누리는 문화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팬데믹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한국은 세계적 재난에 임했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국제적 총아가 되었습니다. 발병 초기부터 현재까지 질병과 환자 관리에 효율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사회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해왔기 때문입니다. 올해 6월 불룸버그 통신이 산출한 코로나 회복력 지수에서 한국이 1위에 올라 있는 것1)도 그런 평가의 한 지표라 하겠습니다. 국제적 거버넌스 비교의 플랫폼이었던 팬데믹 사태는, 그러니까 한국에 대한 국제적 호감 상승의 플랫폼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물론 한국에 대한 국제적 인식 변화가 곧바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지요. 그러나 한국에 대한 국제적 호감도의 상승이 이미 진행되던 한국 문화 열기에 또 다른 연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니겠습니다.
팬데믹 사태가 없었다고 해도, BTS는 BTS 일 것이고 블랙핑크는 블랙핑크일 것입니다.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감독들의 영화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20여 년 전 한류를 만들어냈던 한국 드라마의 역량은 적지 않은 시간을 진화하면서 이제는 울창한 숲과 거대한 늪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팬데믹이나 그로 인해 영향력이 커진 넷플릭스 같은 매체가 없었다 해도 그렇게 온축된 힘이라면 어떤 식으로건 국제적인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구화된 세계 자체가 수많은 연결망을 통해 이미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팬데믹이 만들어낸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만들어낸 다음 두 가지 반향 때문입니다.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인식과 관심의 복합이 한국산 대중문화에 대한 메타-인정, 즉 팬덤이나 열광에 대한 인정을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것을 좋아하거나 즐기지는 않지만, 당신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이고 그것을 나는 인정한다는 태도가 곧 그것입니다. 대중문화에 대한 취향은 연령대나 성별이나 세대에 따라 성층화되곤 합니다. 이를테면 한 세대가 다른 세대의 팬덤 현상을 바라보면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그 대상이 감성세계 일반의 시민권을 확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한국문화에 대한 열기 역시 마찬가지이겠습니다. 팬데믹 사태를 통해 확인된 한국에 대한 국제적 인식 변화는, 이를테면 한국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기를 기성세대가 동참할 수는 없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양상은 특정 문화의 전파와 수용에 있어 질적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인들 자신에게 만들어낸 반향입니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 돼 있었다"2)라는 한 칼럼 제목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는 2021년 1월 7일 현재 6만7천358 명인데, 같은 기간 영국은 죽은 사람 숫자가 7만8천508명이다. 미국은 2천170만여 명의 확진자에 사망자는 36만5천여 명, 2차대전 때 죽은 미군 숫자보다도 많다."라는 문장이 그 칼럼의 초두에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국가적 자부심이 팬데믹 사태로 인해 한밤의 도적처럼 들이닥친 셈이지요. 미국이나 영국을 앞선 나라라고 우러러보았던 사람들이라면 팬데믹으로 인해 벌어진 이런 모습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염병 방역과 대처에서 한국 정부가 거둔 성과도 성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요. 한국이 감염병 대처의 모델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점이 곧 그것입니다. 팬데믹 초기에 한국은 대량으로 환자가 발생했던 국가여서 국제적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지요.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상태에서, 한국 정부는 검사/추적/격리라는 초기 감염병 대책의 표준 모델을 만들어냈고 이를 위한 드라이브 쓰루 검사 같은 멋진 디테일들을 확보했지요. 그것이 국제적 화제가 되었고, 역병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여러 나라들에서 좇아가야 할 전범이 되었습니다. K-방역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던 것도 그런 때문이죠.
말하자면 위기에 대처하는 국가 차원의 거버넌스가 K-' 대열에 합류한 셈인데, 한국이라는 나라가 외부에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 모델을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은 얼마 전에 있었던 한 정치적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이에 따른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혼란도 유혈도 없이 대통령을 파면시켰던 2016-7년의 촛불집회가 곧 그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자기 힘으로 세계의 표준 모델을 만드는 일이란 남들 따라 하기에 바빴던 나라 사람들에게는 비할 데 없는 자부심의 근거가 됩니다. 물론 그런 정도로 자부심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는 수준이 되는 것, 자부심이라는 단어에 대한 의식조차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부심의 모습이겠으나, 아직 그런 수준을 논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요.
요컨대 비상사태가 벌어지자 공동체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진짜 힘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 공동체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다수의 한국인들이 확인하게 되었던 셈입니다. 2021년 말에 개봉한 할리우드의 종말론 영화 <마더/안드로이드>를 본 한국인이라면 기묘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겠습니다. 기계 인간들의 반란으로 미국이 폐허가 되었고, 살아남은 주인공들이 가고자 하는 곳이 한국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거기 나온 한국이라는 고유명사는 북한의 이미지와 겹쳐져 있는, 매우 독특하게 개념적인 것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3. 한국 드라마와 민주주의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 변화도 난데없는 변화는 없는 법이지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과 <오징어 게임> 신드롬이라는 사건 역시 마찬가지라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그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지요. 놀라움에 뒤이어 현격한 격세지감을 느낀 것은 제가 속한 세대라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외화'의 반대말로 '방화'라 불렸던 한국 영화는 한때 싸구려 문화의 대명사였기 때문입니다.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도 그런 취급을 받았지요 1996년, 한국 영화에 대한 사전 심의가 철폐되기 이전의 일이었음은 물론입니다.
독일사람 훔볼트는 대학과 학문의 필수 조건으로 자유를 손꼽았거니와, 자유는 학문만이 아니라 문화의 융성에 필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와 대중음악의 사전 검열이 폐지된 1996년은 그런 점에서 한국 문화사에서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넘어선 시점입니다. 이제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는 예술성이라는 점에서도 사전 검열 시대 수준의 반대 극점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오징어 게임>은 수없는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는 산맥의 연봉 중에 다만 한 봉우리라고 하는 것이 합당한 생각이겠습니다.
세대나 성별로 보자면, 제가 속해 있는 5,60대 남성은 아마도 드라마 시청으로부터 매우 멀리 있는 계층이 아닐까 합니다. 이따금씩, 중년 남성들이 드라마를 본다는 것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곤 했던 것이 그런 증좌이겠습니다. 저 역시 그 세대의 일원으로서 드라마 시청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던 사람이지만, 최근 화제가 되었던 <오징어 게임>과 <괴물>, <지금 우리 학교는>, <킹덤>, <스위트 홈> 등의 넷플릭스 드라마를 시청해 왔습니다. 화젯거리에 동참하기 위해 의무적인 느낌으로 그랬던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화면을 열고 즐겼던 쪽에 속합니다. 문화 상품의 소비자로서 저는 이미 한국산 드라마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확보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기대하고 누리고 음미하는 수준입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된 것은 팬데믹 이전, <나의 아저씨>(2018)라는 드라마를 보고 소감을 좀 말해 달라는 한 동료의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평론가라니, 당신의 평가가 궁금하다는 식의 조금은 점잖은 권유였지요. 몇 번에 나눠서 본 16부작 <나의 아저씨>는 매우 잘 만들어진 드라마더군요. 극본과 연출, 배우들의 연기 등이 흠 잡을 데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극화를 위한 과장 같은 것은 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징으로 이해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평가에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합니다. 드라마 보는 일 자체에 흥미를 느끼느냐 아니냐는 물론 다른 문제이겠지요. 새삼스러운 일이 지면 저로서는 한국 드라마의 수준을 확인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아저씨>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드라마의 핵심에 놓여 있는 도청이라는 극적 장치입니다. 한 여성이 한 남성의 목소리를 몰래듣습니다. 도청은 당연히 불법적인 것이고, 또한 드라마 안에서도 범죄를 위한 것이라서 극적 긴장을 만들어내지요. 그러면서도 도청은 한 사람의 숨겨진 내면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편지나 일기와 같이 진정성을 드러내는 서사적 장치 역할도 하지요. 범죄적 성격이 사라진 도청은 그러니까 우연히 듣게 된 어떤 사람의 숨겨진 목소리는 진정성의 한 극점에 해당합니다. 서정시를 읽는 경험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 독백과 도청의 형식이기도 하지요. 혼자 중얼거리는 시인, 그것을 우연히 듣게 된 독자라는 틀은 우리 시대의 서정시가 소통되는 근간에 해당합니다. 게다가 진정성을 드러내고 추구하는 일이란 문화적 근대성의 기본 형식이기도 합니다. 문학적 근대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나의 아저씨>에서의 사람들의 진정성에 다가가는 일은, 도청과 같은 범죄적인 방식의 부산물로 획득됩니다. 그런 점에서 도청이라는 상자는 구석 건강과 동시에 선악이 뒤섞이는 아이러니를 지니게 되지요 내 설치의 역학 관계가 만들어내는 음모와 반격의 드라마, 또한 시위 상승에 대한 다양한 열망과 좌절들이 그 위에 펼쳐집니다. 그리고 보는 것들을 감싸고 있는 햇빛과 달빛이 있습니다. 가장 큰 현실적 위력의 소유자인 회사 소유주가 한 편에 있고, 다른 편에는 가장 깊은 성장의 소유자인 모성의 신들이 있어 두 개의 정서적 중심을 이룹니다. 하나는 올바름으로 다른 하나는 따뜻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이런 구도는 작위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희랍 드라마에 등장하는 데우스 마키나와 같이 장르의 문법으로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나의 아저씨>가 제게는 한국 드라마의 존재와 가치를 발견하게 한 계기가 되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계기일 뿐이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이어져 왔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명작으로 지칭되는 한국 드라마의 다양한 세계는 울창한 숲이나 거대한 늪이라 표현해도 좋은 수준으로 보였습니다. 극본이 만들어낸 서사의 줄기도 극적 디테일도, 그리고 그것을 재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더군요. 전성기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들의 행렬을 연상시켰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요. 그렇다면 한국 드라마들을 한번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군요. 이미 한국 드라마를 보고 계시다면 거꾸로 매우 유명하지만 잘 읽히지는 않는 아테네 비극들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려야겠네요.
드라마의 기본 기능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표현하여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지만, 한 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올바름의 감각을 도야하는 것 또한 대중적 형식으로서 드라마가 수행하는 중요한 기능이기도 합니다. 드라마에 교육이나 계몽적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지요. 그런데 드라마를 중심으로 말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주권자의 존재야말로 뛰어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원천의 하나라 해야 하겠습니다. 무슨 말이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드라마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주권자가 절대 왕정기의 왕일 수도 혹은 민주정 하의 시민들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 여기에선, B.C 5세기 아테네와 함께 21세기 한국의 예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민주주의는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체제입니다. 힘 있고 욕심 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을 그릇 인도할 수 있는 이상한 사람들이 도처에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행보는 휘청거리는 갈지자걸음이 오히려 정상입니다. 이런 사정은 2천5백여 년 전 페리클레스 시대와 현재 한국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정성을 연료로 자기 유지의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 체제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체제의 위기를 자기 본질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위기에 무심해져서 주권자 대중의 관심과 참여가 사라지면 민주주의도 생명을 다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의 침묵은 민주주의에게 독약과도 같습니다.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제는 대화와 토론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건강하면 말이 많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 경연이 이뤄지는 아테네의 극장은 직접적이고 또한 우회적인 정치적 언어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언어는 동료 시민들을 향한 것이지만, 그보다 두 살 많은 정치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그 시민들 안에 포함되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소포클레스 자신이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사령관으로 참전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지요. 풍자와 해학에 입각한 희극의 언어는 말할 것도 없지만, 비극의 언어 역시 민주주의 정치의 언어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세상에 언어의 성찬이 펼쳐지니, 그 세계를 재현하는 매체들에게 민주주의 사회는 황금어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의 사회적 성숙이 드라마의 수준 상승을 이뤄냈다고 함은 조금 지나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역량이 한국 사회 전체의 성숙성과 나란히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K-드라마와 한국 사회는 성숙성을 향해 가는 동반자인 셈이네요.
4. K- 시대의 문학
한국문학에 관한 국제적 관심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질적 변화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영상이나 음악 분야에 비하면, 문학의 경우는 언어라는 벽이 훨씬 높은 장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자막처럼 어렵지 않게 건너뛸 수 있는 ‘1인치의 장벽’ 같은 것이 아니라, 문학에게는 언어가 벽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한국문학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것은, 한국문학에 관한 소구의 벡터가 바뀐 탓입니다. 한국문학이 국가 홍보의 대상이었던 시절에서 벗어나, 이제는 해외의 관심이 자국의 출판 시장을 위해 한국문학을 호출하게 되었습니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같은 경우가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이겠습니다.3) <채식주의자>의 영역본이 맨부커 상을 받았을 때, 제 동료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더군요. 맨부커 상의 담당자들이 이제 작품 보는 눈이 생긴 것 같다고. 노벨문학상 같은 것을 향한 해바라기가 아직도 여전한 상황이라서, 이런 태도는 제게 매우 흡족해 보였습니다.
한국문학은 지난 백여 년 동안 험로를 걸어왔습니다. 때로는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었지요. 민주주의 체제와 드라마의 상관성에 대해 말했지만, 드라마의 자리에 문학이 들어가면 관계가 좀더 역동적이 됩니다. 문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몸이 가벼운 존재입니다. 반민주적 압제는 드라마의 숨통을 조이지만, 몸이 가벼운 문학에게는 오히려 양질의 자양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백여 년간 한국문학은 역사와 정치가 만들어낸 질곡을 오히려 도약판으로 삼아 근력을 키워왔습니다. 그 백여 년을 두 토막으로 나눈다면, 시민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진 1987년에서부터 투표를 통한 실질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1997년까지의 10년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전반부의 문학에서 강조되었던 것이 한국이 거쳐온 역사적 특수성이라면, 후반부에서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한국 특유의 역사성이감수성과 정서의 차원에서 엷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여백을 새로운 상상력이 채워나가는 식이지요. '한국문학'이라는 단어를 놓고 보자면, '한국적인 문학'에서 '한국인의 문학'으로 혹은 '한국에서 생산된 한국어 문학'으로 변해왔다고 해도 좋겠습니다.4) 이런 이행 속에서 한국문학은 이미 세계문학이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를 보는 감각 자체가 이미 그러했던 것이지요. 세계문학에 대한 열등감을 고백하면서 한국문학도 어서 발전해서 당당한 세계문학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1972년 한국의 한 원로 평론가의 시선으로 보자면5) 오늘날의 문학은 격세지감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의 문학적 동향을 보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문학의 스펙트럼 자체가 확장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문학성의 개념적 재배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해도 좋겠네요. 지난 세기 한국문학 안에서 선연했던 엘리트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의 경계가 이제는 현저하게 옅어졌습니다. 서브 장르의 경계는 분명하지만 그들 사이의 서열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초 연결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동의 속도는 빨라지고 그에 따라 지구는 점점 굴곡 없이 평평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취향과 감각의 경계 역시 낮아지고 허물어져 서로 뒤섞이며 혼종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문학도 다른 재현의 양식들이 그렇듯이 자기 앞의 현실 세계 속에서 서사를 뽑아내지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현실 세계는 장차 노래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서사를 축장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재현 장르들은 동일한 세계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자기 방식의 고유한 왜곡률을 지녀 서로 구분됩니다. 대중을 상대해야 하는 드라마에 비하면, 소설이 만들어내는 그림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색채를 지니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 편이 피차에 안전한 선택이었던 탓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문학이 보여주는 스펙트럼의 다양성은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드라마도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반된 색조가 서로 섞이고 있습니다. 그 한복판에 산업성과 문학성을 아울러 갖춘 웹툰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스펙트럼 상에서 김호연 작가의 장편 <불편한 편의점>(2021)이 한쪽 극단에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이우연 작가의 장편 <악착같은 장미들>(2022) 같은 경우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다. 한쪽은 사람들이 원하는 희망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반대쪽은 작가 자신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악몽을 활자로 채록해 냅니다. 한쪽은 그 자체가 현재의 드라마와 흡사한 서사를 지니고 있는 반면에, 다른 쪽은 웹툰이라면 모를까 실사 영상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물론 이런 구도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것이라 해야 하겠지요. 지금 우리 시대가 지난 시대와 구분된다면, 그 양극단을 대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그러할 것입니다. 두 방식의 차이를 옳고 그름의 프레임 없이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태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문학성을 규정하는 마음이 바뀌어 있는 것이죠.
김금희 작가의 장편 <경애의 마음>(2018) 같은 경우는 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 작품이 경탄스러운 것은 서사가 지닌 다층성 때문입니다. 생존과 대의는 인간 삶에 필요한 두 개의 필수 요소입니다. 생존하지 못하면 삶은 사라집니다. 또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면 생존을 위한 분투가 불가능해집니다. 경애의 마음이 그려내는 것은 이 둘이 겹쳐지는 지점입니다.
점차 가중되는 고용 불안의 시대에, 마음 없는 생존 기계와 같은 태도는 생존 자체를 위한 훌륭한 동력이 됩니다. 미싱 회사에 다니는 30대의 주인공 경애 씨는 그런 씩씩한 태도를 사랑하지요. 누구라도 그런 태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대빈곤이 사라졌다지만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날로 심해지는 자산 규모의 양극화입니다. 기업주나 건물주는 지주가 되고, 고용인과 자영업자들은 소작농 신세가 됩니다. 경애의 마음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이런 마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생존 기계들의 공백처럼 보이는 마음입니다. 게다가 경애씨의 마음에는 자기 자신도 개입되어 있는 사회적 원인으로 인한 친구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가 잠복해 있습니다. 소설의 전면에는 생존 기계들의 애틋한 연애 감정과 추억과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일상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그 밑에는 경애 씨의 트라우마에 깃들어 있는 묵직한 분노의 음성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경애의 마음의 진짜 매력은 그 둘 너머를 그린다는 점, 생존과 대의 너머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에게 신뢰감을 느낀다면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속된 현실에 대한 분노 너머에 있는 것,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안타까움 너머에 있는 것, 그것은 그 두 마음 밑에 달려 있는 스산함입니다. 존재론적 갈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마음은 작은 디테일들 속에서, 예를 들면, 젊은 경애 씨가 꾸벅꾸벅 졸다가 "비디오테이프가 탁 하고 돌아가 멈추면 잠에서 확 깨곤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 허무해지고 세상 모든 일에 신물이 나곤 했다."6)와 같은 회상 대목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주로는, 희미해지고 느슨해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서사적 배치와 문체를 통해 표현됩니다.
이와 같은 세 겹의 구조, 한 개인의 실존과 사회적 정의와 그리고 인간 일반의 존재론적 문제를 겹의 형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작가, 한 사태의 여러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시선의 존재는 귀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두 개의 회사 이야기, 경애의 마음과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같은 해에 나왔군요. 둘을 비교해보는 것도 양식적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것이나, 이미 주어진 지면이 많이 넘쳐 간략하게 한 가지 점만 지적해 두고 싶군요.
드라마에는 있기 쉬우나 문학에는 없기 쉬운 것, 즉 서사의 경로의존성에 대해 말해두어야 하겠습니다. 커다란 초기 투자자본과 무거운 하드웨어를 가진 드라마는 한번 이루어진 성공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 드라마가 상승기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그런 경로 의존성이 드러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식이 만들어지면 전성기는 사라지고 쇠락이 시작됩니다. 문학은 몸이 가볍기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가보는 게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지요. 길이 많으면 그 앞에 있는 한 개인으로서는 난감하고 힘든 일이겠으나, 집합적인 수준에서 말한다면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양성은 독창성의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5. 문학, 클리나멘의 저장고
‘K-’ 시대 한국문학에 대해서도 긍정적 가능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다양성 때문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젊은 작가들의 최근의 몇몇 작품들을 거론해볼 수 있겠습니다.
박상영 작가의 장편 <일차원이 되고 싶어>(2021)와 임솔아 작가의 장편 <최선의 삶>(2015)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격렬한 성장의 서사를 보여주네요. 어른이 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더 어려운 것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장류진 작가의 장편 <달까지 가자>(2021)와 정세랑 작가의 장편 <시선으로부터>(2020)의 명랑성은 이미 승자가 되어 있는 낭만주의의 위력을 보여주네요. 명랑성은 주인의 감수성이지만, 거꾸로 명랑성을 선택함으로써 이미 벌써 주인이 될 수도 있지요. 이들은 모두 힘이 센 작가들입니다.
이서수 작가의 장편 <헬프 미 시스터>(2022)는 197,80년대식 산동네 이야기의 21세기 버전으로 보입니다. 플랫폼 노동자의 고된 삶은 육체를 잠식하지만, 전망 없는 미래를 향한 불안은 영혼을 갉아 먹지요. 이 소설에 김혜진 작가의 <너라는 생활>(2020)이 겹쳐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상처에 취약한 영혼들과 공격적인 세상의 모습이 한 쌍으로 얽혀 있네요. 이인칭 소설인데도 자기 심문의 형식이 아니라 외부 세계를 향한 비판이라는 점이 특이하지요. 이른바 수난의 한국사가 여성의 눈으로 소환되면 어떤 식의 공감의 영역이 생겨나는지를, 최은영 작가의 장편 <밝은 밤>(2021)이 보여주네요. 역사보다 가족사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 간의 공감임을, 그것이 설사 얼굴도 모르는 증조모와 증손녀 사이의 것이라도 그러하다는 것을 그려냅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 시대 마음의 현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문학이 클리셰 되기의 위험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은, 문화산업의 서사가 지닌 경로 의존성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쿠팡플레이 드라마 <안나>와 그 원작, 정한아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2017)을 견주면 어렵지 않게 드러날 것입니다. 드라마가 지니는 대중적 서사의 형식이 이미 존재하는 올바름의 감각을 재현한다면, 상대적으로 몸이 가벼운 문학은 그 감각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요.
글을 쓰고자 하는 원초적 에너지를 축장하고 있는 문학은 자유와 함께 고독의 보존자이기도 합니다. 죽음의 보존자라고 해도 좋겠네요. 죽음은 미메시스와 비판과 공감의 에너지 너머에 있는 힘이거니와 그것이 곧 문학적 글쓰기의 밑바탕에 있는 힘이기도 하지요.
시류와 함께 가면서 또한 시류로부터 어긋나고, 어긋남으로써 종국적으로 사람의 삶과 함께 가게 되는 것이 문학적 글쓰기의 운명입니다. 수많은 우연들이 부딪쳐 파열하면서 만들어내는 거대하고 불가피한 흐름, 그것이 곧 운명이지요. 그런 점에서 문학적 글쓰기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틈과 주름은 클리나멘 우리 삶이 지닌 돌발적 에너지의 저장고가 됩니다. 현재의 문학이 만들어내고 있는 그 틈과 주름들이야말로 K- 시대 한국 문학의 가능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1) https://www.bloomberg.com/graphics/covid-resilience-ranking/
2) 박태웅 칼럼, <아이뉴스24>, 2021.1.11 https://www.inews24.com/view/1333621
3) <엄마를 부탁해>는 2011년 4월에 미국 시장에 나왔고 곧장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후 41개국으로 판권이 팔렸다. 채식주의자는 2016년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했다. <엄마를 부탁해>에 관해서는 https://ch.yes24.com/Article/View/44548, 지난 10년동안 해외에서 수상하거나 화제에 오른 한국문학 작품 목록은, https://ch.yes24.com/Article/View/44514을 참조
4) 이재용은 최근 10여년 사이에 일어난 한국문학에 대한 국제적 관심의 변화 추이에대해 기술하면서, "한국문학에서 한국문학으로"라는 표현을 썼다. 이재용, ‘‘형태적 돌연변이’의 세계적 생존을 위하여’<작가들> 2021년 겨울호 139쪽
5) 백철, ‘민족문학의 오늘과 내일’, <세대> 1972.6, 135쪽
6) 김금희, <경애의 마음>, 창비, 2018. 108쪽
서영채, 서울대 비교문학협동과정 교수. 저서에 <왜 읽는가>, <풍경이 온다>, <죄의식과 부끄러움>, <미메시스의 힘> 등. 2005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