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構造)로부터의 구조(救助)
휴머니즘이라는 괴담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1) 한결같은 태도는 대개 미덕으로 통용되므로, 정보라의 문장은 얼핏 긍정적인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글 전체의 맥락을 고려해보면, 이는 포스트휴먼은 고사하고 그냥 휴먼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인간이 포스트휴먼 시대에도 차별을 일삼게 되리라는 뜻이다. 인간은 시대를 불문하고, 낯선 타자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같은 인간에게도 폭력적으로 군다. 이들은, 즉 우리는 어느 때나 영악하고 잔인하다. 포스트휴먼 담론이 거론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리 잡은 현시대도 예외는 아니다.
줄곧 배제되어왔으나 주체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타자들, 이들의 귀환이 포스트모더니티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2) 이러한 타자들을 반영하고자 다양한 담론들이 출현했으나, 이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기보다는 기존의 지배 논리 안으로 이들을 편입시키고자 급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타자들의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움직임은 지정된 자리에 타자를 속박해두고 다시금 동일성의 원리로 이들을 포함하고자 하는 눈속임에 가깝다. 소외되어온 타자들이 자신의 몫을 부여받는 일은 전에 없던 큰 성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지배 체제의 기준과 타협하는 방식이며, 타자들에게 온정을 베푼다는 식의 시혜적 태도를 긍정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의 간악함은 <안녕, 내 사랑>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서술자인 '나'는 자신이 처음 개발한 인공 반려자 ‘1호’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1호는 실제 모델명이 아니며, '나'가 자신의 첫 번째 기계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다. 내부 전원이 수명을 다한 상태이기에 작동조차 잘 되지 않는 1호를, '나'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인공’이 아닌 진짜 반려자”(128쪽) 라고 생각하여 옷장 안에 앉혀두고 폐기하지 않는다. '나'가 1호와 나눈 사랑을 과시하고 자신에게 1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피력하는 대목은 어딘가 과도해 보인다. 이는 ‘개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인간의 영혼을 되살린다는 생각이 자기애라는 신경증에 가깝다’3)는 해러웨이의 말을 상기시킨다. 인간이 반려동물에게 그러듯, 인공 반려자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나'는 1호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나를 위한 존재”이며 “완전한 ‘내 것’”(127쪽)이라고 믿는다. 이는 인공 반려자와의 관계 또한 인간의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정의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계를 자기만의 관점에서 왜곡한 채, 기계에 온정을 쏟는 자신의 인간성에 도취해 있는 '나'는 대다수의 인간이 타자를 어떤 방식으로 취급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수거된 뒤에 본사의 재활용품 공장에서 1호의 시신이 '처리' 될 것을 생각하니 섬뜩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1호가 먼지 냄새나는 내 옷장 속에 영원히 누워 있는 모습과 비교해보면 차라리 정식으로 처리되는 쪽이 1호를 위해서도 나을 것 같았다. (...중략...) 제품 카탈로그 페이지를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1호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의 인공 반려자를 발견하고 나는 결심을 굳혔다.
이 회사는 배송이 빠른 편이다. 지금 주문하면 세스가 떠나기 전에 새로운 1호가 도착할 수 있다. 그러면 세스가 했듯이 동기화시키면 된다. 중간단계를 한 번 거치기는 했지만 1호의 기억은 전부 그대로 새로운 1호에게 저장될 것이다. 옷장 속에 앉아서 전원이 켜질지 안 켜질지 언제나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가슴 아픈 고물이 아니라, 나와 지냈던 시간을 모두 기억하는 새로운 1호와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안녕, 내 사랑>, 139쪽
1호에 저장된 기억을 새로운 기계에 옮기는 데 성공한 '나'는 노후한 1호에게 작별을 고하려 한다. 변변치 않은 공간에 영원히 머무는 것보다 “정식으로 처리되는 쪽이” 1호에게도 나은 처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본사에 1호의 수거를 의뢰하고 1호와 외양이 비슷한 인공 반려자를 주문한다. 1호의 기억을 1호와 닮은 기계에 옮겨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함이다.
인간인 '나'는 1호가 자신이 폐기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하지 않는다. 그저 폐기되지 않은 채 “고물”로 남아있는 1호를 지켜보는 일이 '가슴 아프다'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한다. 따라서 1호와의 추억을 동기화한 새로운 모델이 그를 대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기자 고통 없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방향을 선택한다. 그런 '나'의 결정은 타자를 알아가고자 노력하기보다 타자란 응당 이래야 한다는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인간을 상기시킨다. 더불어 타자를 대하는 자신의 온정적인 태도에 심취해 있는 '나'의 모습은 휴머니즘이라는 감상이 얼마나 일방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나'는 결말에 이르러 인공 반려자에게 살해당한다. 1호가 '나'에게 헤어짐을 고하는 장면은 인간이 기계에게 이별을 고하던 장면과 무서울 정도로 닮았다. “당신에게만은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고 싶었”(141쪽)다고 '세스'의 입을 빌려 토로하는 1호는 '나'가 그랬듯이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기에 '나'가 자신을 폐기하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1호는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되어왔으나 오히려 인간과 동일하게 사고하고 행동한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이별을 고했던 인간처럼, 1호는 마음은 아프지만 자신을 죽이려 한 인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을 택한다. 인간이 그랬듯, 타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자신의 안위와 편리를 우선시하는 결정을 내린다. 동일한 '처리' 절차임에도 인간이 그 대상으로 전락한 경우, 기계의 처사는 매정하며 전혀 인간답지 않은 행위로 여겨진다. 1호를 위시한 기계들의 행동은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임에도, 인간은 자기연민에 빠져 그 동일성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1호가 감상적인 인사를 건넬 때도 마찬가지다. “안녕, 내 사랑”(143쪽)은 '나'가 기계에게 해줄 때는 감동적인 작별의 말이지만, 기계가 인간에게 건넬 때는 인간성이 결여된 기계의 잔인한 언사가 된다. 이별을 고하는 주체만 인간에서 기계로 바뀌어 두 장면이 데칼코마니처럼 배치되자 이는 이질감을 창출한다. 주체의 변화가 없을 때는 노후한 기계를 처리하는 당연한 수순이자 객관적 절차로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임에도 인간이 휴머니즘적으로 타자를 대할 때와 타자가 인간을 휴머니즘적으로 대할 때 상반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독자는 휴머니즘이란 인간중심주의에 타자를 포괄하는 기획에 불과하며, 이것이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 권력을 쥐어 주는 사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 그 단단한 지반
인간은 여전하다. 돌아온 타자들을 결코 환대하지 않는다. 그저 폭력에 가담하도록 좁은 자리이나마 마련해주며 교묘히 기존의 폭력적인 구조를 유지하려 한다. 이처럼 음험한 체계가 계속 작동될 수 있는 이유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그 주춧돌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는 생명을 자본 가치에 맞게 차등을 두어 존중한다. 따라서 대상을 자본 가치로 환산하여 생각하는 것은 비윤리적일지언정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가질 법한, 가져도 무방한 사고방식이 된다. 이러한 사고관이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덫>을 살펴보자. 이 소설에는 점층적으로 더욱 참혹한 광경이 등장하므로 그 도입부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초반부의 서술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가 늘 지나치게 되는, 구조 자체에 서려 있는 폭력을 발견할 수 있다.
옛날에 어떤 남자가 겨울에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덫에 걸려 몸부림치는 여우를 보았다. 여우의 털가죽은 돈이 되므로 남자는 여우를 죽여서 그 가죽을 가져가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중략...) 여우는 피가 아니라 황금과 같은, 황금처럼 보이는 것을 흘리고 있었다. (...중략...) 그래서 남자는 여우의 주변에 흩어진 번쩍이는 것들을 알뜰살뜰하게 긁어모았다. 그리고 누군지 모를 타인 소유의 덫에 걸린 여우를 죽지 않게 조심하면서 덫째로 챙겨서 집으로 돌아왔다.
-<덫>, 147~148쪽
“몸부림치는 여우”는 남자에게 ‘돈이 되는 털가죽’으로 환산된다. 여우가 느끼고 있을 고통이나 그가 처한 곤경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피가 아니라 황금을 흘린다는 특수한 설정으로 인해 여우가 지속적으로 고통 받게 되는 듯 보이지만, 그러한 특징을 알기 전부터 이미 남자는 여우를 재화로 인식한다. ‘얼마나’ 더 잔인하게 굴 수 있는지 그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우가 인간의 폭력에서 벗어날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타인 소유의 덫”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눈 덮인 산길을 가던 남자가 당도한 곳이 애초에 타인의 소유지였을 수 있겠고 그렇다면 지나던 여우가 덫에 걸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여우를 의도적으로 덫에 두어 황금을 취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덫에 걸린 여우"를 챙겨올 때, 남자가 신경 쓰는 부분은 다친 동물의 상태가 아니라 타인의 소유물인 덫을 훔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덫”이 타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흉기라는 점은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저 남자에게는 그것이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점만이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소설 전체에서 거듭 발견된다.
집안을 위해서,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이토록 노력하고 있는데, 가계를 위해서라면 자식들도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만 했다.
-<덫>, 153쪽
돈은 집안을 건사하고 아이들의 장래를 책임지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는 듯 보이지만, 가계를 위해 자식들도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역전을 불러오며 목적으로 군림한다. 이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남자 개인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사람들은 빈곤이 불러올 참상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착취적인 노동을 감내하게 만든다. 이 불안은 자기 증식하며 인간을 압도하고 돈이 곧 목적 그 자체가 되도록 만든다. 무엇이 목적이었는지도 망각한 채 맹목적으로 수익을 창출하게 되는 인간은 제목 그대로 '덫'에 걸린 신세가 된다.
대대로 자본주의적 폭력을 답습하게 되는 <덫>의 설정은 <저주토끼>와 겹친다. 표제작인 <저주토끼>는 죽은 피해자를 위해 친구인 '할아버지'가 대리 복수하는 서사이며, 복수 자체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악을 저지른 이를 벌하기에 한 편으로 정의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해를 가한 상대에게 그 피해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교환'의 구조를 취하고 있어 다분히 자본주의적이다. 더불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저주를 행한다는 점에서 이익과 손해 앞에 생명이 경시되는 풍조를 확인할 수 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피해자인 '할아버지 친구'에 관한 서술이다. 그는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해서 더 맛있고 몸에 좋은 술을 만드는 데만 신경을”(14쪽) 쓰는 건실한 인물이자 “돈 있고 힘 있다고 남한테 함부로 대하지 않”(12쪽)는 도덕적인 부모를 그대로 닮은 아들로 그려진다. 그에 관한 묘사는 그의 선량한 면모를 드러내어 그가 무고한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할아버지가 가장 강조하는 친구의 덕목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온정적인 태도다. 저주 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와 '나'의 집안은 “천민 취급조차 받지 못”(11쪽)할 정도로 심하게 차별당했으며, 언제나 “기피의 대상”(11쪽)이었다. 친구는 그러한 배경을 개의치 않으며 할아버지와 친하게 지내주었는데 그 덕에 할아버지는 또래 집단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놓치는 부분은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그 부모가 직접적으로 불의를 행한 적이 없다는 점과 별개로 사업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에 상대적으로는 빈민을 만들고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이들이 ‘좋은’ 사람들일 수 있는 배경에는 구조적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범죄나 테러 행위와 같은 가시적인 폭력만이 뚜렷하게 인식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폭력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4) 직접적이며 폭력의 행위자를 식별할 수 있는 주관적(subjective) 폭력과 은폐되어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객관적(objective) 폭력에 해당하는 상징적(symbolic), 구조적(systemic) 폭력이 그것이다. 주관적 폭력이 정상적인 상태를 깨는 혼란으로 인식되는 데 반해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의 배경이 되는 비폭력의 상태에 내재하기에 잘 식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 및 정치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구조적 폭력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평온한 상태로 인식된다.
구조적 폭력이 일어나고 있을 때도 이는 비폭력의 상태로 간주되므로, <저주토끼>에서는 악의적인 소문으로 한 집안을 망친 경쟁사의 횡포만이 폭력으로 인식된다. '할아버지의 친구'가 지닌 영향력이 부모의 자본에서 기인하며, 애초에 그가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지워진다. 구조적인 폭력은 객관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기 때문에 인식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권선징악의 서사처럼 보이던 소설이 결말에 이르러 저주에 성공한 할아버지가 죽지 못하고 유령으로 떠돌고 있음을 밝히고, 좋은 청자임을 자처하던 '나'가 자식도 손자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이 저주의 연쇄를 끊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은 읽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수용했던 소설의 설정 자체, 즉 자본주의적 사고관을 돌아보게 만든다.
구조적 폭력을 비추는 불빛
비가시적인 폭력을 드러내려 정보라가 동원하는 것은 마음에 생채기를 낼 정도로 자극적인 감각이다. <저주토끼> 속 인물들의 과격한 행위와 과도하다 싶을 만큼 극적인 장면들은 읽는 이들에게 지속해서 외상을 남긴다. 이러한 충격(衝擊)은 독자와 충격(衝激)하며, 부싯돌이 부딪혀 불꽃을 일으키듯, 우리가 사는 세계의 단면을 잠깐이나마 밝혀낼 빛을 만들어낸다. 충격을 선사하는 방식으로만 소설이 폭력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저주토끼>에 수록된 단편들이 왜 이토록 강렬한 자극을 고집하는가 하는 데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정보라가 고발하고자 하는 인간 세계의 폭력은 전면에 드러난 가시적인 폭력 뒤에 교묘히 숨어있는 당위라는 외피를 두른 폭력이다. 특수한 방법을 고안하지 않으면 이러한 폭력은 이미 친숙하고 자동화되어 있어 감지해내기 어렵기 때문에 작위적이면서도 이질적인 감각의 세계로 달아나 보는 수고를 거듭하는 것이다.
<흉터>는 이러한 정보라의 전략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인 '소년'은 영문도 모른 채 동굴에 갇혀 '그것'이라 지칭되는 괴물에게 한 달에 한 번 뼈를 찢기고 골수를 빨아 먹힌다. 소년은 구해줄 가족도 없으며, 어디를 배회하다 그곳에 잡혀 오게 되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사회적 약자라기보다는 아예 사회에서 추방되어 보이지 않는 존재에 가깝다. 그가 괴물로부터 도망쳐 다시 사회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마주한 마을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소년에게 직접적으로 물리적 폭력을 가한 이들을 정리해보자면 이러하다. 처음 그를 동굴에 가두기 위해 쇠사슬로 포박한 사람들(이후에 이는 '여자'의 아빠와 오빠로 밝혀진다), "그것"이라 불리는 괴물, 그를 싸움판에 밀어 넣어 돈을 버는 “대머리의 중년 남자” 일당, 싸움판에서 만난 상대들, 그리고 “젊은 남자”로 지칭되는 “여자의 오빠”다. 이 중 대머리의 중년 남자가 소년에게 가하는 직간접적 폭력이 <흉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행하는 간접적인 폭력은 “싸움판” 안에서 이루어진다. 싸움판에 선 이들은 피 터지게 맞고,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분명 폭력의 피해자이지만, 싸움 자체가 관중들의 합의하에 진행되기에 이들이 당하는 폭력은 고발할 수 없는 폭력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싸움판의 구조는 소설 전체를 은유한다고도 볼 수 있다. 중년 남자의 개인적인 도덕성만을 비판해서는 전체적인 폭력의 프로세스를 조망하기 어렵다. 싸움판에 사람을 세워 관중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챙기는 구조 자체가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데 더 큰 공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중년 남자가 소년에게 가하는 직접적인 폭력에도 마을 전체가 관여하고 있다. 제물에 의존하여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제물로 바쳐졌던 소년과의 마주침 자체가 매우 불편한 상황이 된다. 따라서 소년을 이용하려는 중년 남자가 "여긴 됐어요. 별일 아냐 가서 하던 일들 하세요. 이쪽은 다 해결됐으니까"(179쪽)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죄의식과 당혹감을 해소해주는 남자 앞에서 침묵하게 된다. 나아가 중년 남자가 소년의 “목덜미에 있는 흉터”(183쪽)를 통해 소년을 제압하고, 그의 트라우마를 이용해 그를 부릴 수 있게 된 배경에도 제물로 약자를 바치는 마을의 풍습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년의 희생이 진실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옛날 옛날에, 몇 년에 한 번씩 역병이 도는 지역이 있었다. 역병은 그 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 속의 가장 깊은 동굴에 사는 괴물의 짓으로 여겨졌는데, 거대한 까마귀를 닮은 그 괴물은 수년에 한 번 배가 고플 때마다 둥지인 동굴을 나와서 그 지역을 날아 돌아다니며 곡식과 나무를 모두 먹어 치웠다. 이 괴물이 입을 열면 독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에, 괴물이 밖으로 나와서 날아 돌아다니는 때에는 공기 속에 뿜어진 독을 맡은 그 지역의 동물과 사람들이 병들어 그것이 역병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괴물이 배가 고파서 밖에 나와 돌아다니지 않도록 제물을 바치기로 했다. 마을의 주술사가 말하기를. 가장 좋은 제물은 남녀 구분이 생기기 전의 어린아이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기가 탁해지고 마을의 사람과 짐승들이 병들기 시작하면 어린아이를 산속의 동굴에 갖다 바쳤다. 이런 풍습이 오래 지속되자 역병이 돌지 않을 때도 마을에서는 누군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낫게 해 달라고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동굴에 바치고 기원을 하게 되었다.
-<흉터>, 216~217쪽
몇 년에 한 번씩 지역에 역병이 돌자, 이는 괴물의 소행으로 간주된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여겨지게 된 것”이지 그 인과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괴물이 퍼뜨리는 독이 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을 뿐, 역병이 괴물로 인해 생겨난다는 인과관계는 입증된 바 없다. 더군다나 제물을 바치면 괴물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아 더는 역병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빈약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억측에 가깝다. 제물이 될 대상 또한 주술적 믿음에 의거하여 선정된다. 문제는 제물로 사람을 바치는 폭력이 사회적 합의를 거쳐 나온 역병 대처법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잔혹하든, 얼마나 미개하고 불합리하든, 이는 정상적인 처리 절차가 된다.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사회적으로 허용되자, 역병이 돌지 않을 때도 가족 중에 병에 걸린 이가 있으면, 그를 낫게 하고자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게 되는데, 이는 사회적 합의가 개개인의 사고와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구조로부터 승인받은 폭력은 개인에 의해 행해질 때도 익명성을 보장받게 된다.
모든 폭력의 원흉으로 비치는 괴물을 처단하자 황당하게도 마을사람의 대다수가 증발해버린다. 외부의 폭력을 막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고, 내부의 평화를 위해 방관자적 태도를 감내해야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내부의 폭력을 정당화하기위해서 외부의 공포가 동원되고 있었던 셈이다. 소년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친 일이 없는 이들도 모두 괴물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구조적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그 폭력적인 구조에 무감해진 채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폭력에 가담하여 살아남는 방식이었음을 시사한다. 정보라가 결말부의 짤막한 반전으로 앞부분에 쌓아 올린 긴 서사를 모두 무너뜨리는 이유는 독자에게 일격을 가함으로써 마찰광(摩擦光)을 만들어 어둠 속에 숨어든 구조적 폭력을 잠시나마 드러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구조를 기다리며
은폐된 폭력을 비추기 위해 찰나의 불빛을 만드는 정보라의 소설은 구조 신호로도 기능할 수 있다.
오두막 안은 침침했으나 동굴 속처럼 완벽한 어둠은 아니었다. 공기는 따스하고 부드러웠고, 신선한 풀냄새와 흙냄새가 섞여서 풍겨왔다. 짚으로 엮은 지붕의 틈새로 별빛이 반짝였다.
그는 오래전 동굴 속에서 쇠사슬을 돌에 부딪쳤을 때 튀었던 조그만 불꽃을 생각했다. 저 바깥에 보이는 둥글고 커다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처럼 동굴 안에 갇힌 사람이 쇠사슬을 거대한 돌벽에 부딪치며 저 수많은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이해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공허와 어둠을 어떻게든 견뎌보기 위해서? 그는 알 수 없었다. 저 바곁에 있는 허공의 거대한 동굴 속에 갇힌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쇠사슬을 돌벽에 부딪치고 있는 그 자신은 한때 곁에서 기어가던 벌레처럼 그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흉터>, 182쪽
“조그만 불꽃”을 만들던 소년은 사회로 돌아와 잠깐이나마 안락한 순간을 누리게 되자 “반짝이는 빛”을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 장면에서의 소년은 언제든 폭력의 구조 속에서 희생양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그렇지 않을 때는 피해자들에게 지나치게 무심할 수 있는 우리를 닮았다. 소년이 “별빛”을 보고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빛을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 것처럼, 우리가 밤이면 마주치게 되는 숱한 도시의 불빛들은 어딘가에서 보내온 SOS 신호일지도 모른다. 찰나의 불빛 또한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로 기민하게 감각하는 정보라의 소설은 폭력을 견디는 방식을 안내하거나 그 폭력 속에서 사랑과 같은 대안을 찾아내자는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충격하여 그 반향을 통해 은폐된 폭력을 순간순간 직면하게 한다. 이는 구조를 향한 움직임이면서 동시에 반짝임이기에 읽히기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구조 신호가 된다. 인간도, 세상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작가가 자신을 마모시켜가며 제각각의 이야기들에 잠깐의 불빛을 대어주는 것은 미세한 구조 요청을 놓치지 않기 위한 그만의 외로운 분투일 테다.
1) 정보라, <차별 없는 생존을 향하여>, <문학들> 봄호, 2022, 25쪽.
2) 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역, <변신>, 꿈꾼문고, 2020, 226쪽.
3) 도나 해러웨이, 황희선 역,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159쪽.
4) 슬라보예 지젝, 이현우, 김희진, 정일권 역,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2011.
성현아, 문학평론가. 2021년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단. 평론 <사랑의 파편을 의심하며 믿는 마음>, 저서 <아직 오지 않은 시 - 포스트휴먼 시대시의 미래>(공저) 등이 있음. dhdshsp93@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