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인, 그들은 누구인가?
1. 새로운 단어 '해외입양인'
국어사전에 '입양아'와 '해외 입양'은 등재돼 있으나 ‘해외입양인’은 아직 없다. 이제 해외 입양 70년의 역사적 의미에 따라 이제는 사전에 등재돼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왜냐하면 매년 입양인들의 모국방문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재외동포재단이 마련한 ‘2021 차세대 해외입양동포모국방문’(2021 OKF Gathering for Overseas Korean Adoptees) 행사가 외교부 후원으로 열렸다. 이 행사에는 전 세계 14개국으로 입양 간 390 여명과 자녀, 양부모 등 가족이 온, 오프라인으로 참여했는데 ‘나에게 있어서 한국, 모국방문의 의미’, '나와 나의 뿌리' 등의 주제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또한 입양인에게 필수적인 '가족 찾기 사업', '재외동포 비자(F4) 취득 및 국적회복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모국을 방문하고 참여하는 소수 인원보다 모국이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20여만 명이 넘는 해외입양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구한 해외입양인의 사연은 1991년 영화로 제작된 고(故) 최진실 배우가 주연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실화는 영화에 앞서 MBC 방송의 기획 취재로 보도된 바 있었다. 7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해외 입양을 정부에서는 입양관련법령과 공식문서에서는 ‘국외입양’이라 칭하나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해외 입양'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근 취업 또는 국적회복(이중국적 등)으로 국내에 정착한 입양인들의 사연과 외침이 간간이 기사화되고 있어 문학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2021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김남희 작가의 <어떤 약속>이 당선작에 뽑혔다. 주인공은 뿌리 찾기를 위해 일시 방문한 입양인이 아닌 미국 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국내로 강제 추방된 청년이었다. 이 작품은 그동안 미사여구에 포장돼 있던 해외 입양의 슬픈 면을 보여주었다.
2. 해외 입양의 역사와 현황
우리나라 해외입양의 공식적인 역사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고아 및 혼혈아동 입양을 위한 보건사회부 산하 한국아동양호회(현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시작했다. 본격적인 해외입양은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해외입양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고아양자특별조치법'을 전쟁 직후인 1954년 10여만 명에 달하는 전쟁고아와 혼혈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사유로 외국인 양부모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고아를 입양 보낸 것이다.
1955년 홀트씨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해리 홀트(Harry Holt)'가 8명의 고아를 한 번에 입양한 것을 계기로 1970년대까지 민간차원의 입양이 급격히 증가했다. 많은 혼혈고아가 미국으로 입양됐고, 일부는 북유럽국가들로 보내졌다. 해외 입양 아동 수는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1953년부터 2008년까지 총 161558명이었고 혼혈아는 1973년까지 총 5,546명이 미국으로 입양된 것이 공식기록이다.
해외 입양은 1968년까지는 매해 1천 명 미만이었으나, 1969년 1,192명, 1970년 1,932명, 1971년 2,725 명 등 그 숫자가 가파르게 상승해 1985년 한해만 8,837명에 이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 입양이 '고아 수출'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자 1990년 2,962명을 정점으로 1991년부터 매년 2천 명대를 유지하다가 2011년에 이르러 916명으로 세 자리를 유지하고 2015년부터 30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 이 많은 아기들을 어떻게 해외로 보낼 수 있었을까? 당시 입양기관들은 양부모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IR-4’ 비자와 편도 항공권을 지닌 입양아기를 현지 양부모에게 인계해 주는 소위 ‘에스코트’라는 제도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유학생들에게 항공권을 제공해 아기를 품에 안고 가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법규에 의해 사라지는 2012년 8월 이전까지는 젊은 대학생들의 관광상품 일종이었다. 양부모가 직접 아기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 배달돼가는 입양아기의 인권문제를 지적한 시민사회의 여론과 '유엔아동권리협약' 영향으로 사라진 슬픈 역사가 있다.
한편 최근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해외 입양 통계는 놀랍다. 2019년 317명, 2020년 232명, 2021년 189명이다. 문제는 국민소득 3만 5천 달러로 세계 경제 10위권을 넘보는 경제 대국이 된 오늘의 한국이 저출산 고령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해외로 내보낸다는 것이고 이 자리는 중국과 동남아 이주민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5년마다 치루는 대통령 후보자 공약에도 '해외 입양 중단'이란 정책은 없었다는 것이다.
70년 동안 20만 명이 넘는 해외 입양인이 발생했지만 그들의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던 점을 환기시킨다.
1. 새로운 단어 '해외입양인'
국어사전에 '입양아'와 '해외 입양'은 등재돼 있으나 ‘해외입양인’은 아직 없다. 이제 해외 입양 70년의 역사적 의미에 따라 이제는 사전에 등재돼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왜냐하면 매년 입양인들의 모국방문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재외동포재단이 마련한 ‘2021 차세대 해외입양동포모국방문’(2021 OKF Gathering for Overseas Korean Adoptees) 행사가 외교부 후원으로 열렸다. 이 행사에는 전 세계 14개국으로 입양 간 390 여명과 자녀, 양부모 등 가족이 온, 오프라인으로 참여했는데 ‘나에게 있어서 한국, 모국방문의 의미’, '나와 나의 뿌리' 등의 주제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또한 입양인에게 필수적인 '가족 찾기 사업', '재외동포 비자(F4) 취득 및 국적회복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모국을 방문하고 참여하는 소수 인원보다 모국이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20여만 명이 넘는 해외입양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구한 해외입양인의 사연은 1991년 영화로 제작된 고(故) 최진실 배우가 주연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실화는 영화에 앞서 MBC 방송의 기획 취재로 보도된 바 있었다. 7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해외 입양을 정부에서는 입양관련법령과 공식문서에서는 ‘국외입양’이라 칭하나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해외 입양'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근 취업 또는 국적회복(이중국적 등)으로 국내에 정착한 입양인들의 사연과 외침이 간간이 기사화되고 있어 문학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2021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김남희 작가의 <어떤 약속>이 당선작에 뽑혔다. 주인공은 뿌리 찾기를 위해 일시 방문한 입양인이 아닌 미국 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국내로 강제 추방된 청년이었다. 이 작품은 그동안 미사여구에 포장돼 있던 해외 입양의 슬픈 면을 보여주었다.
2. 해외 입양의 역사와 현황
우리나라 해외입양의 공식적인 역사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고아 및 혼혈아동 입양을 위한 보건사회부 산하 한국아동양호회(현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시작했다. 본격적인 해외입양은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해외입양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고아양자특별조치법'을 전쟁 직후인 1954년 10여만 명에 달하는 전쟁고아와 혼혈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사유로 외국인 양부모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고아를 입양 보낸 것이다.
1955년 홀트씨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해리 홀트(Harry Holt)'가 8명의 고아를 한 번에 입양한 것을 계기로 1970년대까지 민간차원의 입양이 급격히 증가했다. 많은 혼혈고아가 미국으로 입양됐고, 일부는 북유럽국가들로 보내졌다. 해외 입양 아동 수는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1953년부터 2008년까지 총 161558명이었고 혼혈아는 1973년까지 총 5,546명이 미국으로 입양된 것이 공식기록이다.
해외 입양은 1968년까지는 매해 1천 명 미만이었으나, 1969년 1,192명, 1970년 1,932명, 1971년 2,725 명 등 그 숫자가 가파르게 상승해 1985년 한해만 8,837명에 이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 입양이 '고아 수출'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자 1990년 2,962명을 정점으로 1991년부터 매년 2천 명대를 유지하다가 2011년에 이르러 916명으로 세 자리를 유지하고 2015년부터 30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 이 많은 아기들을 어떻게 해외로 보낼 수 있었을까? 당시 입양기관들은 양부모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IR-4’ 비자와 편도 항공권을 지닌 입양아기를 현지 양부모에게 인계해 주는 소위 ‘에스코트’라는 제도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유학생들에게 항공권을 제공해 아기를 품에 안고 가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법규에 의해 사라지는 2012년 8월 이전까지는 젊은 대학생들의 관광상품 일종이었다. 양부모가 직접 아기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 배달돼가는 입양아기의 인권문제를 지적한 시민사회의 여론과 '유엔아동권리협약' 영향으로 사라진 슬픈 역사가 있다.
한편 최근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해외 입양 통계는 놀랍다. 2019년 317명, 2020년 232명, 2021년 189명이다. 문제는 국민소득 3만 5천 달러로 세계 경제 10위권을 넘보는 경제 대국이 된 오늘의 한국이 저출산 고령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해외로 내보낸다는 것이고 이 자리는 중국과 동남아 이주민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5년마다 치루는 대통령 후보자 공약에도 '해외 입양 중단'이란 정책은 없었다는 것이다.
70년 동안 20만 명이 넘는 해외 입양인이 발생했지만 그들의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던 점을 환기시킨다.
최근 입양인들의 모국 방문, 가족 찾기, 국적 회복 등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문학작품들이 해외 입양의 슬픈 현실을 다루며 언론에서도 불법체류자 신분의 입양인 사례가 보도되고 있다.
70년간 20만 명이 넘는 해외입양인이 발생했지만 사회적 관심과 정책적 배려가 부족한 현실을 환기시킨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면서도 여전히 해외입양을 지속하는 모순된 상황이 사회적 성찰을 요구한다.
최근 입양인들의 모국방문, 가족찾기, 국적회복 등의 활발한 움직임이 새로운 사회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