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포르마시옹

앱이 공장을 삼켰다"… 넷플릭스, 워너브라더스 품고 '진짜 제작사'로

조성철
기사 듣기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를 샀다. 정확히는 12월 5일(현지시간)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의 스튜디오·스트리밍 부문(워너브라더스 영화·TV·게임 스튜디오, HBO·HBO Max, DC 스튜디오 등)을 720억달러, 한화 약 106조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이 딜은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전체를 827억달러(약 122조원) 기업가치로 평가한 조건으로, CNN·디스커버리채널 등 전통 케이블 네트워크는 ‘디스커버리 글로벌’이라는 별도 회사로 분리한 뒤 거래 대상에서 제외된다.

표면적으로는 “세계 1위 스트리밍 플랫폼이 100년 넘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를 삼킨 초대형 M&A”다. 하지만 콘텐츠 산업의 공정을 뜯어보면, 이번 딜의 의미는 두 겹이다. 하나, 영화를 만들어온 ‘공장’이 영상을 유통하던 ‘앱 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되는 가치사슬 역전. 또 하나, 지금까지는 로컬 제작사들이 만들어온 작품에 자기 로고만 붙이던 넷플릭스가, 워너 인수를 계기로 진짜 의미의 “제작 기능”을 몸 안에 탑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워너브라더스는 오리지널 콘텐츠의 ‘기원지’에 가까운 회사다. 1923년 워너 4형제가 설립한 뒤, 1927년 영화 <재즈 싱어>를 통해 소리 나는 영화(토키)의 시대를 연 주인공이 바로 워너다. 이 한 편으로 할리우드 전체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갈아탔고, 워너는 메이저 스튜디오 반열에 올랐다. 이후 워너는 갱스터·사회파 영화, TV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거쳐 현대에는 <해리포터> 시리즈, DC 유니버스, <매트릭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HBO의 <왕좌의 게임> 같은 프랜차이즈를 찍어온, 말 그대로 “이야기를 직접 만들고 찍는 공장”이었다.

반대로 넷플릭스의 출발점은 철저히 ‘유통’이었다. 1997년 DVD 우편 대여 서비스로 출발해, 2000년대 후반부터 각국 스튜디오·방송사에서 공급받은 영화·드라마를 온라인으로 모아 보여주는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전 세계 190여개국에서 3억명 안팎의 유료 가입자를 가진 최대 스트리밍 사업자이지만, 회사의 DNA는 “자기가 직접 찍기보다는, 남이 만든 콘텐츠를 잘 골라 진열하는 곳”에 가까웠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는 라벨이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한 뒤에도 구조는 비슷했다. 넷플릭스는 자본·데이터·브랜드를 들고 기획과 편성, 글로벌 유통을 설계하고, 실제 제작은 한국의 CJ ENM·스튜디오드래곤, 영국·스페인·일본·라틴아메리카의 로컬 제작사들이 맡는 방식이었다. 한국의 드라마·예능·다큐 상당수도 넷플릭스 로고는 넷플릭스 것이지만, 세트와 스태프, 제작 리스크는 로컬 제작사가 떠안는 구조였다. 넷플릭스는 “제작사”라기보다, 전 세계 로컬 프로덕션을 통째로 관리·조율하는 거대한 커미셔너(commissioner)에 가까웠다.

이번 워너 인수는 이 지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넷플릭스가 사들이는 것은 단지 IP 라이브러리나 스트리밍 서비스가 아니라, 할리우드식 풀스택 제작 시스템이다. 워너브라더스 영화·TV·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헐리우드·버뱅크 일대의 스튜디오 부지와 세트, 상시 고용된 제작 인력, 워너브라더스 게임즈(모탈 컴뱃·호그와트 레거시 등), 그리고 HBO·HBO Max의 오리지널 제작 라인까지 한 번에 들어온다.

이 말은, 넷플릭스가 이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기획이 올라왔을 때, 이 프로젝트를 한국이나 유럽, 라틴아메리카의 로컬 제작사에 맡길지, 아니면 아예 워너 내부 스튜디오에서 직접 만들지, 넷플릭스가 저울질할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자사가 소유한 브랜드와 권리로 관리·통제”했을 뿐, 실제 촬영과 물리적 제작은 대개 외부 파트너의 몫이었다면, 이제는 대규모 블록버스터·프랜차이즈·극장 개봉용 라인업을 내부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진짜 제작 기능이 탑재되는 셈이다.

720억 달러 (약 106조 원)
워너 인수 금액
넷플릭스·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약 3억 명
넷플릭스 가입자
넷플릭스
827억 달러 (약 122조 원)
워너 기업가치
넷플릭스·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여기서 중요한 변화는 협상력의 이동이다. 지금까지 넷플릭스는 로컬 제작사에게 “우리는 플랫폼이자 투자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한국 제작사 입장에서는 지상파·케이블·국내 OTT와 더불어, 글로벌 넷플릭스라는 또 하나의 큰 손이 생긴 셈이었다. 그런데 워너 인수 이후 넷플릭스는 “당신들의 고객”에서 “당신들과 경쟁하는 제작사”가 된다. 같은 장르, 같은 예산의 프로젝트를 두고, 워너 내부 제작과 한국 외부 제작이 넷플릭스 안에서 경쟁하는 구조가 생길 수 있다.

리스크 배분도 달라진다. 지금까지 넷플릭스는 외부 제작에 투자하면서도, 실패 리스크의 일부를 제작사와 나눌 수 있었다. 반면 워너라는 내부 공장을 본격적으로 돌리기 시작하면, 특정 IP·장르에 대해 훨씬 공격적인 장기 투자를 할 수 있는 대신, 실패의 책임도 넷플릭스 재무제표 위로 곧바로 떨어진다. 그때 플랫폼의 본능은 어디로 향할까. “위험이 적고 예측 가능한 기획”이다. 이미 검증된 워너의 해리포터·DC 유니버스·HBO 드라마 유산 같은 IP, 이미 손발이 맞는 워너 제작 라인이 우선순위에 올라갈 공산이 크다. 새 작가·새 형식을 실험하는 지역 콘텐츠는 그만큼 뒤로 밀릴 수 있다.

유통사가 공장을 갖게 되면, 가치사슬의 힘은 꼭대기로 몰린다. 워너 인수 이후의 넷플릭스는 “앱 + IP + 공장”을 한 몸 안에 가진 디즈니형 기업에 가까워진다. 이미 넷플릭스는 3억명 안팎의 가입자를 보유한 상태에서, HBO·HBO Max까지 흡수하면 유료 스트리밍 시장의 30% 안팎을 쥐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거대 플랫폼이 내부 제작(워너)과 외부 제작(각국 프로덕션)을 동시에 거느리게 되면, 로컬 제작사의 입지는 “큰 고객 하나 생겼다”에서 “큰 고객이자 가장 강력한 경쟁사”가 된 쪽으로 바뀐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양면성이 분명하다. 기회 쪽만 보면, 넷플릭스–워너 결합체의 4억명 규모 가입자 풀은 K-콘텐츠가 올라탈 수 있는 거대한 글로벌 무대다. 넷플릭스의 데이터·추천 알고리즘, 워너의 극장 배급망과 HBO 브랜드가 결합해 한국 드라마·영화를 영화–시리즈–게임–머천다이징으로 확장해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위험은, 판을 만들어주는 플랫폼이 줄어든다는 데 있다. 넷플릭스–워너, 디즈니, 아마존 같은 소수의 거대 공룡이 “어떤 기획은 내부에서, 어떤 기획은 외부에서”를 나누기 시작하면,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작품은 세계 시장에서 설 자리가 급격히 좁아진다.

결국 이번 106조원짜리 인수의 핵심은 숫자보다 구조에 있다. 워너라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앱 회사의 자회사로 들어갔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오리지널은 외부에서 만들고 플랫폼은 관리만 하던 시대”에서 “플랫폼이 공장을 소유하고, 외부 제작을 고르는 심사관이자 내부 제작의 경쟁사로 서는 시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는 로고를 볼 때,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가 관리만 한 외부 제작의 결과물인가, 아니면 넷플릭스가 소유한 공장에서 나온 내부 제작물인가. 그리고 그 선택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로컬 제작사·작가들에게 어떤 구조조정 신호로 읽힐 것인가. 플랫폼이 드디어 공장을 손에 넣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은, 누가 그 공장의 바깥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의 문제일지 모른다.

넷플릭스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한국 로컬 제작사 (CJ ENM·스튜디오드래곤 등)
이 기사가 던지는 질문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를 인수해 자체 제작 기능을 갖추게 되면,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로컬 제작사들의 입지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유통 플랫폼이 콘텐츠 공장까지 소유하게 될 때, 새로운 IP와 다양한 지역 콘텐츠 실험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 기사는 공공 데이터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