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장애인 고용 부담금이 왜 최저임금의 60퍼센트에 불과한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기업이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고 내는 벌금이 한 사람을 고용하는 비용보다 훨씬 적다면, 그것을 과연 부담금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제도는 늘 선한 의도로 시작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작동한다.
한준규 한국일보 정책사회부장이 지적했듯이, 한국에서는 하루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지난해에만 1만4439명이다. 이 숫자 뒤에는 각자의 절망이 있겠지만, 그중 상당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거나 일을 해도 살 수 없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약자를 보호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은 2001년 미국에서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실험을 담은 책이다. 웨이트리스, 청소부, 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그녀가 발견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풀타임으로 일해도 집세를 낼 수 없었고, 두 개의 일자리를 뛰어도 의료보험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가난할수록 더 비싸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보증금이 없어 비싼 모텔에서 살고, 냉장고가 없어 매일 비싼 패스트푸드를 사먹어야 했다. 일하는 빈곤층이라는 말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그들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서 배제된 것이다. 에런라이크는 묻는다. 최저임금이 과연 인간다운 삶의 최저선을 보장하는가.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최저임금위원회는 매년 격론 끝에 인상률을 결정하지만, 정작 최저임금 적용 제외 대상은 늘어만 간다. 가사 도우미, 수습 직원, 장애인 근로자까지. 보호받아야 할 사람일수록 제도의 사각지대로 밀려난다. 2025년 최저임금이 1만1150원으로 올랐지만, 이 금액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최저임금이 오를수록 이들의 일자리 자체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편의점 무인화가 가속되고, 식당은 키오스크로 대체된다. 기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본질은 인건비 절감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버리는 역설이 반복된다.
장애인 고용률은 2018년 2.9퍼센트에서 2023년 3.1퍼센트로 5년간 고작 0.2퍼센트포인트 올랐다. 의무고용률 3.1퍼센트를 간신히 채운 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경증 장애인 위주다. 중증 장애인은 여전히 노동시장 밖에 있다. 최저임금의 60퍼센트를 내면 고용 의무가 면제되는 현실에서, 기업에게 장애인은 비용일 뿐이다.
에런라이크는 책 말미에 고백한다. 실험을 그만두고 중산층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자신과 달리,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는 탈출구가 없었다고.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일자리마저 잃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제도를 만들 때 늘 평균적인 사람을 상정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평균적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다른 조건과 한계를 가진 구체적인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최저임금이라는 하나의 기준선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최저임금을 얼마나 올릴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 임금조차 받을 수 없는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배제하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당신이 매일 오르내리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때 창문 너머로 스치는 그 손들을 기억하는가. 영수증을 건네고 하이패스 카드를 받는 그 짧은 순간, 당신은 그들의 임금이 얼마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한국도로공사의 현장지원직 노동자들이 법원에서 두 번이나 승소했다. 2023년 4월, 그리고 2024년 1월.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는 것이 차별이라는 판결이었다. 그런데 공사는 여전히 이들을 최저임금 수준에 묶어두고 있다.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에서 최저임금으로 살아가기 위해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이 되었다. 그녀는 발견했다. 최저임금은 단순히 적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인간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장치였다.
당신이 하루에 만나는 사람들 중 몇 명이 최저임금을 받고 있을까. 편의점 알바생, 건물 청소원, 주차 요원. 우리는 그들의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삶은 보지 않는다. 마치 그들이 투명인간인 것처럼.
한국의 최저임금 미만율은 2023년 기준 13.7%였다. 10명 중 1명 이상이 법정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수치가 매년 비슷하게 유지된다는 점이다. 마치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처럼.
에런라이크는 말한다. 최저임금 노동자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고. 하나는 실제 노동, 다른 하나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일. 미소를 지으며 불평하지 않고, 아프지도 않고, 개인적인 사정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
한국도로공사는 현장지원직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구분했다.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존재로 분류했다. 법원이 두 번이나 잘못됐다고 했지만, 여전히 그 구분은 유지된다. 왜일까. 누군가는 낮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일까.
당신도 어쩌면 그런 구분 속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졸과 고졸, 사무직과 현장직. 우리는 끊임없이 선을 긋고 위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에런라이크가 최저임금 노동을 체험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느낌이었다. 손님들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고, 매니저는 이름 대신 역할로 불렀다. 그녀는 점점 자신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노동의 배신』이 최저임금의 그늘을 바라보는 시선은 표면적 현상 너머의 구조를 향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은 개별 사건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대신, 그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조건을 추적한다. 이런 관점은 반복되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최저임금의 그늘 문제의 핵심은 제도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있다. 법과 정책은 존재하지만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하더라도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빈번하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간극이다. 설계된 세계와 살아가는 세계 사이의 거리.
한국 사회에서 최저임금의 그늘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구조, 인구 변화, 기술 발전, 세대 갈등 등 복합적인 요인과 얽혀 있다. 한 가지 변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이 정책 입안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다시 톨게이트를 지날 때, 당신은 그 손을 볼 수 있을까. 최저임금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한 사람의 삶을. 법원의 판결도 바꾸지 못한 그 견고한 선을. 우리가 만든 노동의 위계는 그렇게 오늘도 누군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 기사는 최저임금 제도가 취약층을 배제하는 역설을 지적하며, 정책 결정 시 약자들의 삶을 고려해야 함을 강조한다.
기사는 한국에서 하루 40명이 자살하는 현실을 제시하며, 이들의 절망이 일자리 부족과 생존 곤란에 기인함을 보여준다.
장애인 고용부담금 제도를 통해 선한 의도로 시작한 정책이 실상 기업에게 부담이 되지 않음을 지적하며, 제도 실효성 검토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