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카드를 꺼낸 건 글로벌 공급 과잉 때문이다. 하지만 여당이 노란봉투법을 강행 처리하면서 기업들의 인력 감축은 사실상 막혔다.
한국 석유화학 업계는 중국산 저가 공세와 미국발 셰일 가스 경쟁에 끼어 있다. 2024년부터 이어진 실적 악화에 올해 들어서는 적자 전환한 기업들이 속출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8월 초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한 배경이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정부가 구조조정 첫발을 뗀 시점에 국회는 노란봉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하청업체 노동자들도 원청 기업을 상대로 교섭할 수 있게 한다. 사실상 대기업이 계열사나 협력업체 인력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다.
석유화학 대기업들은 이미 수천 명 규모의 협력업체 직원들과 일하고 있다. 롯데케미칼 여수공장만 해도 협력업체 근로자가 3,000명을 넘는다. SK이노베이션 울산 콤플렉스는 5,000명 이상이다.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이들의 고용까지 보장해야 한다.
정부는 금융 지원을 미끼로 구조조정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금융권 관계자들은 회의적이다. 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자는 "대출 조건으로 인력 감축을 요구해도 노조가 막으면 소용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유·화학 업계 노조들은 이미 고용 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
비슷한 상황이 카드업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신한카드는 실적 부진으로 사옥 매각을 검토했지만 노조 반발에 부딪혀 중단했다. 내부 인력 조정 계획도 무산됐다. 한 금융권 임원은 "구조조정이라는 말만 꺼내도 노조가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일본은 2000년대 초반 석유화학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미쓰비시케미칼과 스미토모화학이 통합하면서 설비를 30% 줄이고 인력도 20% 감축했다. 중국도 2010년대 중반 과잉 설비를 정리하면서 100만 명이 넘는 인력을 재배치했다.
한국은 다르다. 대우조선해양 구조조정 때도 인력 감축은 자연 퇴직에 의존했다. 쌍용차는 정리해고 후유증이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번 석유화학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산업 전문가들은 시간이 관건이라고 본다. 한국화학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중국이 설비 증설을 마치기 전에 체질 개선을 끝내야 한다"며 "2027년까지가 골든타임"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구조조정 속도는 더 느려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식 구조조정이 반복될 전망이다. 정부는 지원금을 풀고, 기업은 신규 채용만 줄이고, 기존 인력은 그대로 두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런 미봉책으로는 글로벌 경쟁력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