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그림은 선명합니다. SK하이닉스가 약 470조 원을 들여 메모리 메인 팹 2기와 1기가와트(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세우고 삼성전자는 425조 원으로 메모리 팹 2기와 국가 AI 컴퓨팅센터를 놓습니다. 앰코는 1조 원을 보태 광주에 첨단 패키징 팹을 증설한다는 계획입니다. 정부는 용수와 송전망을 대고 산업단지 조성 기간을 5년 이내로 줄이겠다고 했습니다. 국가 AI 컴퓨팅센터의 세부 입지는 발표자료 기준 '서남권'으로만 제시됐지만, 지도 위의 남서쪽 귀퉁이가 제법 붉게 달아오르는 그림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버드의 도시경제학자 글레이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도시의 승리』에서 무엇이 도시의 흥망을 갈랐는지 집요하게 추적했지요. 대표적 반례가 바로 디트로이트입니다.
한때 자동차 산업의 심장이자 미국에서 손꼽히게 부유했던 이 도시는, 거대한 공장과 대로와 기념비적 건물을 그대로 둔 채 무너졌습니다. 설비가 사라져서가 아니었지요. 실은 그 설비가 자동차라는 단 하나의 산업과 운명을 함께 묶어버린 탓이었습니다.
반대로 뉴욕은 산업 전환의 골짜기를 지나 아이디어와 인재로 재집결했고, 실리콘밸리는 대학과 창업, 인재의 네트워크로 성장했지요.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도시를 살리는 쪽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진짜 힘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밀도에서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공장이 오면 도시가 살아나는가. 글레이저의 답은 단순한 '예'가 아니었지요. 디트로이트에도 공장은 넘치도록 많았습니다. 다만 설비가 한자리에 모인다고 지식과 사람까지 저절로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글레이저의 관찰은 거기에 닿아 있었지요. 하나의 거대 산업에 도시 전체가 인질로 잡히면, 그 산업이 기침할 때 도시는 폐렴을 앓습니다.
글레이저가 특히 날을 세우는 대목은 '도시 재생'이라는 이름의 건설 사업입니다. 그는 쇠락한 도시에 번쩍이는 건물을 세우면 사람을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하지요.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에 시설부터 채우는 처방은 순서부터 뒤바뀌었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종종 도시를 위해 짓지 않고 건물을 위해 짓습니다.
물론 반도체 팹은 텅 빈 기념관과 다릅니다. 대규모 고용과 협력업체 생태계를 함께 끌고 오지요. 데이터센터 역시 21세기의 기간 설비입니다. 그래서 서남권의 청사진을 디트로이트의 실패한 재생 사업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글레이저의 렌즈로 보면 경계선은 또렷합니다. 팹 입지와 도시 회복은 결코 같은 사건이 아니지요.
그 간극은 인적 자본이 메웁니다. 팹은 고급 엔지니어를 부르지만 그 엔지니어가 가족과 함께 남녘에 뿌리내릴지는 팹이 결정하지 못하지요. 글레이저가 거듭 강조했듯, 지식은 서로 가까이 모여 얼굴을 맞댄 사람들 사이에서 번집니다. 아이의 학교, 배우자의 일자리, 밤에 걸어도 좋은 거리, 주말에 만날 친구가 함께 있어야 사람은 비로소 머뭅니다. 데이터센터는 전력을 많이 먹지만 사람을 많이 쓰지는 않는 시설이기도 하고요. 팹의 고용이 지역에 남지 않고 수도권을 오가는 통근으로 흩어진다면, 손에 쥐는 것은 세수와 풍경뿐일지도 모릅니다.
글레이저가 실리콘밸리에서 읽어낸 핵심은 반도체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스탠퍼드라는 대학, 실패해도 다시 창업하는 기업가들, 회사를 옮겨 다니며 지식을 실어 나르는 인재들의 촘촘한 그물이었지요. 실리콘밸리를 실리콘밸리로 만든 힘은 공장이 아니라 사람의 순환이었습니다. 서남권이 '제2의 반도체 거점'을 넘어 하나의 살아 있는 도시권으로 자라려면, 팹과 나란히 대학과 연구 인력과 정주 여건도 같은 속도로 커야 합니다.
그래서 896조 원이라는 숫자를 두 번 읽게 됩니다. 한 번은 설비의 규모로, 또 한 번은 사람의 밀도로 말이지요. 전자는 이미 약속됐습니다. 후자는 아직입니다. 팹의 착공만큼 정주와 교육과 순환의 설계가 촘촘한지, 앞으로의 몇 해가 남녘의 진짜 시험대입니다. 저 책의 값비싼 경고는 분명합니다. 건물은 오래 남지만 사람이 떠난 건물은 도시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저 거대한 숫자가 붉은 지도를 넘어 오래 머무는 온기가 되려면, 콘크리트가 굳는 속도가 아니라 사람이 자리 잡는 속도를 함께 세어야 합니다. 공장은 서남권에 짓습니다. 도시는, 거기 남기로 한 사람들이 짓습니다.
서남권에 쏟아진 896조 원 투자 계획을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로 비추어, "공장이 오면 도시가 살아나는가"를 묻습니다.
디트로이트는 공장을 그대로 둔 채 무너졌고 실리콘밸리는 사람의 순환으로 성장했다는 대비를 통해,
지역 소멸의 해법이 설비가 아니라 인적 자본과 밀도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 정책브리핑 ·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
- 산업통상자원부 자료
- 파이낸셜뉴스 2026-06-30 기사
- BusinessKorea 관련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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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의 승리』 본문 논지와 국내 서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