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세대론

현대사회에 드러난 386세대 서사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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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대 갈등은 계급갈등을 대체할 수 있을까

2019년 가을,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장관 임명은 대한민국을 다 각도로 분열시켰다. 언론은 조국의 가족에 관한 한 사실과 의혹 가릴 것 없이 불과 한 달 동안 백만여 건에 이르는 뉴스를 쏟아내며 융단폭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언론 전체가 기레기들을 동원하여 공장식으로 기사를 찍어내는 거대한 '찌라시 시장'이었음을, 나아가 보수는 수구 프레임에 충실하여, 진보는 기계적 평등과 양비론에 눈이 멀어 사회 개혁의 발목을 잡는 언론 적폐에 불과했음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광장은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졌다. 참가 인원을 셈하여 그 세력을 저울질하는 숫자놀음과 무관하게 광장은 광장대로 사회의 분열된 민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 요컨데 광장은 보수세력과 진보 세력을, 산업화 세대와 386세대를, 38세대와 청년 세대를, 좌파 지식인과 깨시민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분할 하였다.

조금 고쳐 말하면 조국 정국이 한국 사회를 분열시켰다기보다는 조국 정국으로 인해 그간 우리 사회에 매복되어 있던 갈등의 뇌관들이 일시에 표면으로 드러나는 분수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진 것은 조국 자녀의 입시 과정을 통해 드러난 중상류층의 불공정 게임일 것이다.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사건과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보여주듯이 '학종'으로 상징되는 입시 트랙을 밟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우리 사회에 강제 이식된 이래로 중상류층 가정에 일반적인 풍경으로 자리 잡아 왔을 터다. 입시는 사회의 안정권에 진입하는 것부터 그 당과를 차지하는 것까지 온전히 그들만의 리그로 설계되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였다.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닌 입시 불평등을 향한 분노가 들불처럼 번진 데는 이 불평등 게임에 가담한 주체가 386세대라는 사실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386세대가 현 사회의 기득권이 되면서 초래된 불평등에 주목하는 시선 또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두되고 있다. 그 신호탄인 386세대 유감(웅진지식하우스, 2019)은 한국 사회가 오늘날의 헬조선으로 전락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집단으로 386세대를 지목한다. 386세대는 민주주의를 함께 이루었다는 세대 내 동질감(코호트 효과)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혜택 속에 빠르게 한국 사회의 중층을 형성했지만, 이후 인식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후배 세대의 노동 환경을 황폐화하고, 부동산 시장과 사교육 시장 등을 장악하여 계층 상승의 사다리 또한 가파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학자 이철승은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불평등 구조의 연원을 좀 더 파고든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불평등은 386세대라는 특정 집단이 특정 시기에 세력화하며 구축한 불공정 체제와 더불어 '동아시아 위계 구조'라는, 관료집단에 진입한 구성원들이 연령에 따라 승진하면서 연장자 중심의 위계가 자연스레 형성되는 유교적 연공 체제가 결합한 결과물이다. 이는 한국 사회 내 세대 갈등을 논하는 것이 곧 계급갈등을 논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계급갈등이 세대 갈등으로 고스란히 전치되는 상황은 이러한 "한국형 위계 구조(이철승)"로 말미암은 것도 있겠지만, 사회구성원이 스스로를 계급적 주체로 내세우는 계급의식이 부재하게끔 강제되어 온 현실의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계급이라는 앵글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계급을 구성하는 개개인이 적대적 타자인 자본가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이익을 방어하고 쟁취하는 '역사적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러한 의식 구조 형성을 체계적으로 억압해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상하는 세대갈등 담론은 계급갈등을 보다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명분과는 별개로 계급의식의 발아를 거세함으로써 자기 정당화를 구축해 온 지배 체제의 논리를 강화하는 데 복무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모순에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다름 아닌 '386세대'라는, 세대 갈등 담론의 핵심 용어에 있다. 엄밀히 말해 '386세대'는 '특정 세대 내 특정 이념을 지향하는 프티 부르주아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세대를 통칭하는 용어로 적합하지 않다. 386세대라는 용어에는 이미 계급과 세대와 이념이 함께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현 사회의 기득권층을 386세대로 통칭하는 것은 동일 세대 내 동일한 수혜를 입지 못한 집단을 배제하고, 동일한 수혜를 입고 동일한 책임을 공유하는 '비(非) 386세대'는 교묘히 비껴가게 된다. 불평등에 대한 세대적 접근은 386 세대라는 프레임 하에서는 '충분히 세대적'이지 않으며, 진정한 세대 갈등 담론을 위해서는 386세대가 아닌 다른 용어를 고안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요컨대 최근의 불평등 담론이 주장하는 세대 갈등에는 계급갈등, 나아가 진영갈등이 내재 되어 있다.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세대 갈등은 계급갈등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또 대체하기보다는 계급갈등의 표상을 더욱 불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세대 갈등은 그것이 계급갈등과 거의 정확히 포개어진다는 착시를 내세우며 계급갈등을 인식의 지평 너머로 밀어낸다. 계급갈등이 세대 갈등을 통해서만 이야기될 때, 계급갈등은 이야기의 외부에 표상 불가능한 것으로 잠재한다. 그랬을 때 세대 갈등 담론은 또 하나의 그럴 듯한 지배 담론에 불과할 뿐이다.

부르디외는 독자적인 사회이론 체계를 정립하며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지식인의 담론 속에서만 존재하는 '구성된 계급'과 '실재의 계급'(혹은 '동원된 계급')을 쉽사리 동일시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실에서는 "객관적 이해관계를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계급들이 명확히 충화된 형태로 실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식인들이 "종이 위에서 개연적 계급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한 까닭은 "개연적 계급이 현실에 가깝게 구성될수록 정치적 동원 작업이 성공할 가능성 역시 높아지며, 이는 결국 계급 담론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계급갈등 담론을 성공적으로 기획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층위에서 실재할 수 없는 계급의식을 가장 잘 구성해내는 것이 된다.

계급갈등을 가시화할 수 있는 계급의식이 애초에 인위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면, 단순히 현실을 관찰하여 측정해낸 객관적 지표들이 반드시 그러한 구성에 적합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여기에는 현실에 파편화된 계급의식의 단초들을 총체화하는 상상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상상력에 관한 한 사회학보다 우위에 있는 문학의 역할을 자연스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롭게도 이와 관련한 발언을 사회학자인 부르디외에게서 들을 수 있다.

  시간 구조, 이야기 구조, 언어 사용 등에 관한 이해 면에서 소설가들이 훨씬 낫지요. '사회학자에 비해서' 대체로 그렇죠. 그런데 이는 그들이 형식화 작업에 몰두하면서 실재와 거리를 두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소설가들은 형식이라는 핀셋을 가지고 실재를 건드리죠. 이런 형식이 없다면 그들은 실재를 견딜 수 없겠죠. 반면에 사회학자들은 참을 수 없는 일을 합니다. 그들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형식화 없이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참을 수 없는 반감을 불러옵니다.(강조는 필자)

 

달리 말해 사회학이 지배 체제하에서 표상 불가능한 것을 지배 체제의 언어와 사유를 통해 제시한다면, 문학은 지배 체제하에서 표상 불가능한 것을 표상 가능한 것으로 드러내는 일련의 형식을 발명하여 이야기한다. 즉 문학은 표상 불가능한 것을 표상 가능한 것으로 매개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함으로써 지배 체제하에서 가시화되었을 때 견딜 수 없이 날 것인 실재를 견딜 만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상상적 영토를 마련해낸다. 이러한 두 부분과 학문 간의 차이에 주목했을 때, 사회학의 언어로 제시된 386세대 책임론을 둘러싸고 잡음이 무성한 것은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날것 그대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불평등 구조의 세대적 요인을 각기 다른 형식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날것 그대로 제시되었을 때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는 세 편의 소설을 간략하게 살펴보려 한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 제공

 

2. 유리바닥 속에 갇힌 의식 : 이미상의 '하긴'

입시 불평등이 불평등 구조의 척도로 대두된 까닭은 입시야말로 부모의 부와 지위가 세습되는 것을 가장 잘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한국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계층 간 불평등은 증가하고 계층 상승 가능성은 감소하는 사회에서 입시 불평등은 당면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되었다. 리처드 리브스의 '20vs80의 사회(민음사,2019)'는 오늘날 미국 중상류층이 자녀를 위해 구축한 입시 불공정 게임의 면면을 잘 보여준다. "중상류층과 나머지 사이에 불평등이 증가"할수록 중상류층 부모는 "아이들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유리바닥'을 깔아 주는 데 갖은 노력"을 들이게 되며 "불평등과 계층 간 비이동성은 서로를 강화하게 된다."

이미상의 '하긴'은 전형적인 386세대 부부가 자녀 입시에 실패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386세대 안팎의 파열음에 주목한다. 소설이 도착하는 386세대는 한국 사회를 지옥불 반도로 만든 장본인이지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자녀에게 성공적으로 대물림하는 기득권으로서의 386세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소설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강화 시킨 사교육과 입시의 굴레 속에서 자녀를 놓고 피 말리는 인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이 기득권이라 함은 그들이야말로 자기 재생산을 통한 체제 재생산이라는 사회의 룰에 완전히 예속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임을 소설은 명징하게 보여 준다.

그들이 386세대의 전형이라는 근거는 화자 '나'가 '학출'로 나간 공장에서 아내를 만난 것, 그런 아내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 "1988년 자주 민보 대신 '한겨례 신문'(317쪽)"이라는 순우리말을 고집한 것 등을 통해 간결하지만 정확하게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일 뿐, 그들을 386세대의 전형으로 호명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정확히는 '나')의 의식 구조이다. 동기의 자녀와 자신의 자녀를 비교하고, 암기를 위해 갖은 묘수를 쓰고서야 "겨우, 외울 것들을 외울 수 있는" 낮은 지능을 가진 이들을 다른 "종자"로 구별하고(318쪽), 자신이 자녀로부터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正)"(328쪽)이 되기를 소망하는, 위계를 공기처럼 여기는 의식 말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투쟁했던 과거에 대한 손익계산서와 같이 쥐어진 중산층의 삶은 동일한 이유에서 다음 세대로 계승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자녀의 성공적인 대입(大入)은 386세대가 누리는 삶을 물질적 조건을 대물림함으로써 그러한 물질적 조건을 가능하게 한 이념적 '명분' 또한 동시에 견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다. 이 명분하에 '나'는 "딸의 백 퍼센트 주주"이며, 딸은 "자식이자 주식(327쪽)"이다. 이처럼 "자신이 자기 이후의 세상을, 현재를, 대상을 자기 뜻대로 빚었다는 자기 확신과 특권의식"은 소설의 해설에서도 갈음하듯이 386세대가 사회를 비롯한 후속세대에 대해 지배적 '위계'의 위치를 자임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의 딸 보미나래는 백 퍼센트 주주의 투자에 부응하기는커녕 '나'가 자신과 구별 짓고 폄하하였던 바로 그 '종자'임이 정황상 분명해 보인다. 고심 끝에 찾아간, 학원을 운영하는 동기 '문'을 사정을 듣자마자 딸이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 중에 "명분 쪽(321쪽)"으로 가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정시도 내신도 마땅찮으니 교외 활동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입학사정관제를 노려보자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와꾸가 짜져야 경기권 사회학과라도 넣어 보지. 솔직한 말로다가 성적은 좆같지만 학교에 들여 보내달란 건데 명분이라도 이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332쪽)

'문'이 업계 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명분'의 한 사례로 들려주는 것은 놀랍게도 과거 '문'을 고문했던 경찰 간부의 딸이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부모를 둔 자녀들의 자조 모임"(332쪽)을 만들어 상을 받은 경력으로 입시에 성공한 사례이다. 고문자 대 피고문자로 대치했던 두 아버지가 자녀 입시 앞에서는 학부모 대 입시 상담사로 조우하였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축척된 아버지의 분노는 그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문'의 노련한 컨설팅을 통해 딸의 대입을 위한 '명분'으로 성공적으로 전치된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세습을 통해 과거의 이념적 '명분'을 (정(正)으로든 부정(不正)으로든) 대물림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대입이 결과적으로는 그 명분을 도착적으로 수행하는 아이러니와 대면하게 된다. "대의명분이 대입 명분으로 수렴(334쪽)"됨으로써 대입명분을 위해서라면 대의명분은 얼마든지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독재정권이라는 부정한 국가기구에 대항해 투쟁했던 세대가 자녀의 성공을 통해 그 투쟁의 과실을 사유화하려는 집단적 노력 속에서, 입시제도는 또 다른 부정한 기구의 하나로 굳어 가고 있다. 1991년 7월 학원 수강이 전면 허용되면서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대졸자들과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학원으로 흘러들어 386세대 출신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거대한 사교육 시장이 형성된바, 자녀 입시를 위해서라면 이념까지도 초월하여 공조하는 소설 속 일화는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다면 자기 존재의 기원도 기꺼이 부정하는 한 세대의 병리성을 보여 준다.

이러한 386세대의 병리성은 세대 결집의 원동력이기도 한 위계의식이 세대의 안팎에서 상호 부조화를 일으킬 때 가장 두드러진다. 주변 세계를 향한 위계적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여공 출신의 아내로 '명분파'인 딸도 멸시하는 '나'이지만, 딸의 입시 상담을 부탁하는 자리에서는 순순히 스스로를 '문'의 아래에 위치시킨다. 사실 그 자리의 위계는 "부탁을 위계로 치환해내는" 재주가 탁월한 '문'이 '나'의 아내를 "제수씨'로 부르고 "'시가'라고 적힌 이름 모를 회 한 접시를 더 시키"며(323쪽)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알아서 기는 '나'와 알아서 고개를 세우는 '문'은 위계에 관한 한 가히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한다.

그러한 '문'도 '나'와 마찬가지로 정작 아내로부터는 철저히 홀대받고 있다. 위계의식을 내면화한 '문'과 '나' 간의 상호적이고 자발적인 위계화는 정작 그들의 외부와는 호환되지 않는다. 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딸의 입시를 위해 사전 답사한 버지니아의 에코 공동체에서 벌거벗은 백인이 "긴 좆을 덜렁대며"'나'와 딸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나치는 장면(330쪽)이다. 사유재산 한 푼 없이 해먹을 만드는 히피 백인의 페니스는 위계를 자양분으로 성장한 헬조선의 한 가장인 '나'의 권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나'의 세대가 공유하는 위계의식은 철저히 헬조선 내에서만 유효한 것이었음이 폭로되는 장면이다.

이처럼 소설은 한국 사회의 유리 바닥을 형성하는 집단으로 지목된 386세대가 실상은 유리 바닥 속에 완전히 갇힌 의식을 통해 자신의 안팎을 위계적으로 굴절시킴으로써, 나아가 그렇게 굴절된 위계에 고통스럽게 연루됨으로써 얼마나 자기 파괴적으로 유리 바닥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의 뒤틀린 자의식을 낳았는지 그 선후 관계를 결정할 수 없을 만큼, 개인의 의식과 사회 구조는 완벽하게 상동하고 있다.

3. 상징폭력으로서의 자본 : 장강명의 '대기 발령'  

의미상의 '하긴'이 의식과 구조 간의 상동성을 보여준다면, 장강명의 '대기 발령'은 불평등의 격차를 벌리는, 구체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면면을 보여준다. 선대 회장의 뜻으로 운영되었던 '행복동행'이라는, 사회 환원적인 성격이 강하고 (따라서)수익성은 떨어져서 사내에서는 "회장의 펫 프로젝트"(52쪽) 중 하나로 취급되어왔던 사외보 제작팀이 해당 업무를 외주화한 자회사 '티앤티'로 강제 이직 당할 처지에 놓인다.

소설은 팀원들이 세대 내지 기수별로, 나아가 회사 내에서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어떤 식으로 눈치를 보고 또 처신하는지를 나름으로 조명한다. 가령 사외보에 애착이 컸던 중훈은 대기 발령 중에서도 사내 게시판에 '행복동행'의 발자취를 올리거나 '행복동행' 혁신 방안 보고서를 만든다. 지연은 아는 노무사를 통해 대기 발령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따지고 이를 팀원들과 공유한다. 희정은 따로 내정되었다는 홍보팀 발령을 기다리고, 연아는 티앤티 대표의 물밑 접촉으로 선배들과 달리 이직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러한 각자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들은 결국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유일하게 티앤티로 이직한 연아도 오래지 않아 회사를 나온 뒤 고만고만한 콘텐츠 제작 회사들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기업 입장에서 무쓸모한 부서를 조직 외부로 퇴출시킴으로써 안정된 자리를 보장하는 유리바닥을 두껍게 보강하는 기획이었을음 보여준다. 그러나 조직의 입장을 대변하는 각 부서의 '팀장'들은 행복동행 팀원들에게 이를 정반대를 설명하고 있다.

  무슨 군사 작전하십니까. 저희들한테는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하고 결정하라는 게 정당하다고 보십니까. 무슨 배려를 해주셨다는 겁니까.
  군사 작전이 아니라 구조 작전이다. 지금 홍수가 난 걸 모르겠느냐. 구조 보트가 왔는데 보트에 타라는 말을 고압적으로 했다고 안 탈 참이냐.(64쪽)

자회사로 팀 승계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경영 지원 부문장"이 팀원들을 소집하여 야단치는 위 대목에서 부문장은 외주화 과정은 "구조 작전"이고 팀원들에게 "구조 보트"를 태워주는 것이며, 회사에 "홍수"가 났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 회사에 홍수가 났는지는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홍수에 왜 특정 부서만 떠내려가는지 또한 해명되지 않는다. 적어도 여기서 구조 작전을 지시하는 이들이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대기 발령을 비롯한 외주화 지시는 팀원들이 사실상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절대적 폭력으로 제시된다. 외주화를 통해 대리되는, 즉 유리 바닥이 아래로 두텁게 세력을 키우는 자연법칙으로 자리 잡은 이 세계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세대적, 젠더적 처지나 이념적 성향에 따라 다원화된 방식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으며, 외주화의 폭력이 행사된 이후에 사후적으로 당시를 회고하고 진단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유리 바닥의 상층부는 재현의 층위에서 철저히 제외되어 있으며, 유리 바닥 아래의 세계를 작동 시키는 보이지 않는 원리로서만 어렴풋이 짐작될 따름이다.

회사 조직 내에서도 오직 유리 바닥의 하층부만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팀원들 간의 미묘한 갈등은 세대별로 나뉘는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조차도 팀원들 간에 실재하는 갈등이라기보다는 유리 바닥의 공모자들이 상황의 원활한 해결을 위해 동원하는 이간질에 가까운 것으로 그려진다. 이직 승계를 고민하는 연아에게 자회사 대표는 "선배들이 단체 행동 하자고 해요?"라고 물으며 그들이 "회사에서 아주 소문 난 꼴통들"이며 "그 사람들 죽으려면 혼자 죽지, 꼭 그렇게 젊은이 목까지 움켜쥐고 같이 죽어야 되나"라고 한다. (60쪽) 정작 팀원들은 유리 바닥의 압도적인 하중에 눌려 신음하느라 단체 행동은 커녕 간신히 각자도생했을 뿐이다. 그들은 연대하지도, 서로를 보살피지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못했다.

  그들이 단체 행동을 결의했던가? 중훈이 바람을 잡았던가? 분위기를 몰아갔던가?(61쪽) 

차라리 세대 갈등의 구도는 팀원들 내부가 아닌, 외주화를 추진하는 사측 대변인들과 팀원들 간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철승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계급갈등이 아닌 세대 갈등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 나아가 "'세대'의 문제를 그 자체로 들여다보지 않고 '위계'의 문제로 치환"해야 하는 까닭으로 "'세대 간의 분노와 저항'을 야기하는 발화점이 계급 구조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위계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조직 내에서 생애주기별로 승진하는 연공체제 하에 놓인 평사원에게 "사주와 말단 사원 사이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은 너무나 먼 추상적인 개념"이며, "조직화된 총노동과 조직화된 총자본이 충돌하는 순간"을 일상적으로 잘 겪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대기 발령받은 팀원들과 사주와의 관계는 애초에 사내 조직을 통해 긴밀히 매개되어 있다. 팀원들과 대치하는 각 부처 팀장들은 사주의 의견을 대신 수행하는 이들이며 결국은 자본가의 대리인일 따름이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소설 속 인물들이 어떻게 호명되는가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과 직책으로 불리는 이들로 철저히 나뉘는데, 대기 발령을 받은 팀원들은 이름으로 진행하는 나머지 팀장급들은 직책으로만 불린다. 직책으로 불리는 이들은 조직의 규율을 따름으로써 조직의 규율이 구축한 유리 바닥의 상징폭력을 작동시킨다. 이처럼 팀원들을 불평등한 구조로 내몰리는 것도 그들이 조직화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자본의 논리임은 너무나 분명할 뿐 아니라, 세대 및 위계상으로 그들보다 상층부에 놓인 팀장급과 싸우는 것은 이에 대한 해결이 될 수도 없다. 티앤티 사장이 팀원들을 세대로 나눠 이간질하는 대목이 보여주듯이 조직 내 위계 구조에 한정된 투쟁은 자본의 논리가 부추기는 것일 뿐이다.

자본이 자기규율로 내면화시킨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동시에 부품으로 전락한 이 소설이 엮인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산 자들'의 품행을 통해서만 암시되는 수준으로 자본이 제 모습을 감추었을 때, 자본의 부품으로 (혹은 부품의 일개 부스러기로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시스템의 수혜자이자 책임자로 적시하고 또 비판하는 것은 과연 전략적으로 정당한 것일까? 이는 단지 시스템에 속한 이들의 내면으로 파편화하여 제 몸을 철저히 숨김으로써 불명의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자본의 책략에 또 한 번 속아 넘어가는 실책은 아닐까? 팀장들이 자본의 논리가 만든 구조의 상대적 수혜자임은 분명하지만 그들과 자리다툼을 하고 구조 내부의 몫을 차지하는 것이 과연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소설은 그것의 무용함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갈등의 최전선에 놓인 이들은 자본이라는 상징폭력의 '졸'에 불과하며, 졸을 친다고 해서 구조에 유효한 타격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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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Humanism of Capitalism : 임성순의 '인류낚시통신'

임성순의 '인류낚시통신'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하고 있다. '은어낚시통신'이 존재의 시원을 탐사하는 비밀 모임에 주인공이 흘러드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면, '인류낚시통신'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잘못 배달된 초대장을 통해 비밀 모임의 내부를 우연히 엿보게 된다. 대학 시절 운동권에 냉소적이었던 '나'는 열렬한 투사이자 학생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던 동명(同名)의 선배를 향한 연서들이 '나'에게 잘못 배달되어 일찍이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학과 엠티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선배의 일장 연설에 반박했다가 "스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 대학생"(209쪽)이라는 공개 비난을 받고 모두에게 배척당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선배가 후일 정치권으로 흘러들어 "예전에 그가 독재의 하수인이라 부르짖던 사람들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화려하게 국회의원이 되었"(210쪽)으며 변절자로 낙인찍혔던 사실을 상기하며 '나'는 홀린 듯이 비밀결사 모임의 문을 두드린다 "88년(…)'민중민족연사학회'의 일원 중 한 사람"(198쪽)인 척 참여한 모임에는 과거에 열렬히 운동을 했던 이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들은 당시에 휴머니즘적 이상을 목표로 하는 세계 인권선언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하며 학회를 해체하였고,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얼마 전 모임을 결성한 참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동명 선배와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과거의 이상을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배반한 것으로 정평이 난 사람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휴머니즘을 위해 각자가 노력한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보고한 성과들이란 비정규직을 증가시키고, 부동산 가격을 인상 시키고, 의료 보험을 민영화하는 등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들이다. 그들은 휴머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정책을 펼쳐 인간의 개체 수를 줄임으로써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기이한 맬서스적인 발상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희소하게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이들은 이십 년 전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세력으로 뛰어들어 인류를 희소하게 만들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자신을 욕하든 변절했다고 떠들든 상관없었다. 이상을 실현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225쪽)

모임에 임하는 이들의 태도는 너무나 진지해서 어느 면으로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들의 궤변에 가까운 발상은 이상향을 추구함으로써 현실에 타격을 주기 위한 노력이 바로 그 현실의 방법론에 잠식되어 있을 때 어떤 일이 연출되는지를 보여준다. "고전적인 해방운동은 지배자들과 동일한 도구들, 동일한 권력 기술, 동일한 조직과 규율 형태로 맞서 싸웠으며, 이 때문에 '해방에 대한 욕망이 강렬해질수록 예속은 더욱더 치유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비판"은 이들에게도 유효하다. 니체의 오래된 전언처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괴물이 되기 쉽상이다. '지배자들과 동일한 도구'를 갖고 지배체제에 맞서 싸우면 싸울수록 지배체제에 더욱 더 예속되는 이 악무한의 굴레에서 기만적 투쟁을 (심지어 진정성 있게) 수행하는 이들은 지젝이 정의하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좋은 사람이고 세계의 빈곤과 폭력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이런 걱정을 할 만한 능력도 되는 사람이다. 사실 그런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다. 기업 이익으로 그를 매수할 수는 없다, 그가 그 기업의 공동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빈곤과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그가 그 신념을 바탕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그럴 만한 권력이 있기에, 정직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그는 용감하고 현명한 태도로 가차 없이 자신의 기획을 밀고 나가며, 개인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가졌으니까. 게다가 그는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 특히 다보스의 동료들과는 절친하다.

중요한 것은 이 그로테스크한 비밀결사의 노력이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잘못 배달된 초청장이 오히려 정확히 암시하듯이 '나'와 그들은 "진작부터 연결된 관계"(199쪽)이다. 회사에서 잘리기 전의 잘나가던 '나'가 그들이 펼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수혜자로서 풍요로운 삶이 제공하는 인간다움을 누렸다면, 지금의 '나'는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사라져야 하는, 인간보다 못한 잉여 대상이 되었다. '나'의 존재 방식은 경제학적인 셈법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려는 그들의 무리한 시도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한때 운동권을 냉소하고 경멸했던 '나'의 삶이 작동하는 방식이 운동권 출신들로 구성된 비밀결사의 기획과 상동하고 있더라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자각은 그것이 비밀결사라는 음모론의 형싱을 빌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음모론은 "세계의 연관을 이해하고 그러한 관계의 원인을 인식하려는 발버둥질"이다. "우리가 그간 간직하고 사용했던 '지각 범주들(categories of the perception)'이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를 만회하면서 서로 다른 사실들 사이의 연관을 밝히려는 절망적인 몸짓"이다. 소설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386세대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공모가 불러일으키는 인지 부조화를 설명하기 위해 음모론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나'는 과거에는 386세대에 속하되 그 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로서, 한때는 고소득자였으나 현재는 일자리를 잃고 사회 체제의 안전판 밖으로 굴러떨어진 존재로서, 386세대의 경계에서 그들을 들여다보는 위치에 놓여 있다. '나'는 그들에 대해 내부자이기도 외부자이기도 한 이중의 지위 덕분에 그들이 휴머니즘을 가장하여 벌이는 '낚시'에 용케 낚이지 않는다. 그들의 정의(justice)란 자본이 하부구조로 굳건히 버티고 있을 때에만 성립 가능한 상부구조의 부산물일 뿐인 것이다. '나'는 그들이 정의와 평등을 가치로 구축한 가치 세계를 통해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 기실은 보이는 것과 달리 고도로 굴절된 것임을 간파한다.


5. 세대 갈등이라는 허구적 관념을 넘어

부족하나마 살펴본 세 편의 소설들은 세대갈등 담론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탈자연화'하고 있다. 이미상의 '하긴'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가장 책임이 막중한 집단으로 지목되는 특정 세대의 자의식이 어떻게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를 왜곡시키는지 보여준다. 장강명의 '대기 발령'은 특정 세대의 의식이 조직 내에서 자본의 의지를 대리함으로써 어떻게 세대 갈등이라는 착시를 만들어 내는지 보여준다. 이는 총노동 대 총자본의 대결이라는, 계급의식이 너무나도 명징하게 드러나는 이상적 구도에 비하면 미진할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인격적으로 육화된 특정 세대에만 책임의 소재를 추궁해도 좋을 만큼 상황이 명쾌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위의 소설들은 환기시켜준다.

뿐만 아니라 위의 소설들은 세대 갈등이 계급 갈등을 대신하여 불평등 구조를 설명해낼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이 아니라 계급갈등이 부재하도록, 즉 재현 불가능하도록 굴절시킴으로써 계습 의식의 형성을 가로막는, 지배 구조에 충실히 복무하는 가상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나름의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현실에서 투명하게 드러나는 객관적인 사실들이 사실은 현실을 지배하는 특정한 구조가 만들어 낸 가장 주관적인 의식일 수 있음에 위의 소설들은 천착한다. 세대갈등이야말로 계급갈등의 불가능성을 재현하는 은밀한 형식으로서, 계급갈등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조건들과 공모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386세대 책임론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설령 그것이 허구일지언정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지잭은 "레비 스트로스가 말했던 '상징적 효력'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며 "부르주아적 자유가 '형식에 불과하다'며 조롱하던 스탈린주의"가 정작 그러한 자유를 한사코 허용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냐고 반문한다. 그것이 특정한 상징 질서 하에서만 작동하는 환상, 즉 빈 껍데기에 불과할지언정 나름의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문에서 언급한 소설들, 즉 임의로 고안된 형식에 불과한 소설들이 그 가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설명하거나 반박하는 효력을 발휘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대 갈등의 허구적 가치를 입증해내는 소설의 허구적 가치를 신뢰하는 그만큼 세대 갈등의 허구적 가치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386세대의 과오에 대해 사회학이 제시하는 통계적 자료들 또한 객관적 사실로 접근했을 때보다 주관적 재현물로 접근했을 때 더 많은 통찰을 제공한다. 서론에서 지적했던, 386세대라는 용어가 충분히 세대적이지 않다는 지적은 역설적으로 이 용어의 허구적 가치에 주목하게 한다. '386 세대유감'이 "정교한 사회학적 분석이라기보단 386세대 서사를 파괴하기 위해 만든 대항서사로 읽힌다"는 한 기자의 논평은 같은 의미에서 경청할 만하다. 헬조선을 386세대가 만들고 완성했다는 (객관적 통계와 분석을 동원한) '인지적 지도 그리기(mapping)'는, 그러한 인식을 작동하게 만든 현실의 상황에 주목하게 하는 동시에, 현실의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인식을 발휘하게 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발동시키다.

그럼에도 386세대를 향한 비판을 불평등한 현실이 386세대를 매개로 했을 때 개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에 한해서 여전히 유효하다. 특정 집단이 한 사회를 설명해내는 특정한 서사 내에서 상징적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 실체적 진위 여부를 떠나서 많은 것을 함축한다. 이는 386세대 책임론이라는 서사 이전에 "386세대 서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그들에게 지금의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한때 스스로를 사회의 주축으로 서사화했던 이력에 힘입은 것이기도 한 셈이다. 그랬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386세대 서사에 대한 대항 서사가 아니라, 386세대의 서사와 그 대항 서사를 종합함으로써 다음을 모색하는 것, 즉 두 개의 서사를 '문학적으로' 읽는 것이다.

 

  이은지
  2014년 <창비> 신인 평론상 등단.

세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