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요약
영화 '기생충'과 '그린북'을 통해 현대 사회의 계급 이동성과 '유리 천정/유리 바닥' 현상을 분석한 글이다. 두 영화는 소외된 인물들이 사회적 경계를 넘으려 시도하지만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계급 격차 확대와 계급 이동성 감소의 현실을 드러낸다.

 

1. 선(線)과 ‘사이’
경제적으로는 풍요롭고 사회적으로는 자유주의자이면서 정치적 입장에서는 진보 세력에 속하는 지인들을 많이 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더 높은 학력을 가졌고 기회 불균등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비용을 더 걱정하곤 한다. 기득권의 부패에 민감해하며 정의의 가치를 신봉한다. 사회 중심부에서 멀어져 가는 이웃들의 생계를 우려하면서 정치권의 무능함에 분노를 내보이기도 한다. 고령화 사회 속 빈곤 노인들의 복지 문제와 다문화 시대 상호문화 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생득적’인 자신의 우월한 계급을 감춘 채, 사회적 신분의 이동 (불)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유리 천정’의 존재에 정색하고 분노하지만, 자신이 운신하고 있는 계층의 안녕과 견고한 ‘유리 바닥’의 관련성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포함된 계급’의 현실적인 특권 앞에서는 침묵의 보수주의자가 되고 마는 일군의 사람들을 안다.

유리 천정과 유리 바닥은 정반대로 작동하는 사회적 욕망의 실체를 환기한다. 유념할 것은, 양자가 동이란 경계면을 칭하는 다른 표현이고, 그 용어 안에 사회 구조를 더듬는 자의식이 접합돼 있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불평등 사회가 강화해 온 정반대의 욕망이 부딪친다. 계급 격차가 확대된다는 것, 계급 이동성과 유연성이 휘발된다는 것, 불평등이 보편적 환경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특히 이 세 가지 상황이 동시적이라는 것은 최악의 비극이다. 그런 사회에서 하류층은 더 나은 계급으로 올라갈 수단을 좀처럼 취하지 못한다. 노력과 무관하게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상류층도 현재의 계급을 지키지 못할 경우 더 먼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우월한 사회적 위치와 결속돼 있는 자원들을 치밀하게 활용할 수 있다. 상류층 부모는 그들의 자녀를 위해 유리 바닥의 내구성을 다지는 과정을 쉬이 밟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계급 대물림 문제와 ‘유리 천정/유리 바닥’를 둘러싼 고민이 한창일 무렵 ‘그린북’과 ‘기생충’을 봤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하면,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그린북’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은 전혀 다른 소재, 상이한 스타일의 영화다. 이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수평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두 영화는 소외의 흔적을 지닌 인물들의 ‘사회 이동성’의 실험극으로 파악할 수 있다. 유리 바닥이면서 유리 천정으로 기능하는 사회적 경계면, 그 단질적 선(線) 주변에서 야기된 모순과 폭력의 논변일 수 있다.

주지하듯, ‘그린북’은 1962년 미국 남부지역을 배경으로 특수한 계급 준거로 기능하는 인종의 의미를 탐색한다. ‘기생충’은 돈이 계급의 최종 심급으로 작동하는 동시대 한국을 묘사하면서 ‘기생’이라는 생활 형태의 작동방식을 지켜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생득적’ 위계 사회의 견고한 구조에 부딪혀 원래의 자리, 혹은 더 비참한 위치로 되돌아간다. 이 글은 그들이 나아가려 했던 자리와 밀려난 자리 ‘사이’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2. 색깔 : 1962년의 지침
흑인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건 1863년의 일이다. 그러나 신분상의 해방이 차별과 혐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는 아니었다. 특히 보수적인 미국 남부지방에서는 흑인을 차별하는 온갖 관습이 법제도보다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 남부의 식당, 버스 등에는 백인 전용 구역이 존재했다. ‘그린북’이 묘사한 1962년은 바로 그 세계의 미세한 풍경들을 안고 있다. 이때는 흑인 인권 운동의 선봉에 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아직 전국적 지지를 받기 전이다. 특히 남부지역에서는 흑인의 역할과 활동이 더욱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피터 패럴리 감독은 바로 그 시공간 속에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와 그의 운전기사 겸 매니저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를 던져 놓는다. 참고로 셜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곧 흑인이며 토니는 백인이지만 이탈리아계에 속한다.

‘그린북’에서 셜리가 캐릭터화되는 초반 장면들은 매우 흥미롭다. 피부색과 무관하게 그가 백인 상류층의 매너와 취향, 지적인 고상함과 예술적 우아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사회, 경제, 문화 자본의 관점에서 명백하게 상류층의 표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판단은 이탈리아 이민계 백인인 토니와의 비교 속에서 더 강화된다. 토니는 프랑스 오페라를 원작으로 삼은 ‘지옥의 오르페우스’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피아노 3중주를 위해 결성된 트리오를 클럽 밴드와 구별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처럼 셜리와 토니는 차별적 격차를 드러내는 상이한 아비투스(habitus,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의 기표들을 거느리며, 그 기표들의 체계를 대조적으로 반사하는 캐릭터들이다. 

영화 초반 셜리는 토니에게 ‘구별 짓기’의 욕망을 은연중에 나타내 보인다. 물론 그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매너 있는 태도로 토니를 대한다. 그러나 굳이 ‘차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생활 전반에서 드러나는 현격한 ‘차이’들로부터 ‘구별’의 태도가 발생한다. 토니의 세계로부터 셜리 스스로 분리되고 특권화되는 순간이 종종 감지되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진지하게 공유할 만한 개화 소재가 마땅찮아 보이는 셜리와 토니가 큰 충돌 없이 미국 남부 투어를 떠난다는 사실이다.

투어 초반에는 토니도 셜리의 이해와 오해를 반복한다. 이러한 혼돈은 온전히 셜리의 피부색에서 비롯된다. 토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면서 셜리의 인상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흑인처럼 연주하지 않고 리버라치처럼 치더라고"” 여기서의 ‘흑인처럼’은 토니의 셜리의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묻어난다. “처비 체커, 리틀 리처드,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당신에 사람들 왜 모르냐?”, “당신네 사람들 프라이드치킨에 옥수수,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여기엔 토니의 경험세계에 비친 흑인의 생활 양식과 소비 취향이 담겨 있다. 경제 자본이나 문화 자본에 따른 편견이라기보다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적 정형화의 혐의가 짙다. 그러니까 토니는 셜리의 우월한 사회적 위치를 여러 계기로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피부색’이라는 즉각적 준거에서 주어지는 편견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세대 간 조건의 차이

세대별로 다른 경험과 자원 배분이 사회 갈등의 축으로 작동한다. 미국 지역의 사례가 맥락을 구체화한다.

2
세대별 체감 격차

같은 사회 변화도 세대에 따라 영향의 크기와 방향이 다르다. 미국·프랑스 등 지역별 영향 차이도 살펴볼 대목이다.

3
세대 정책의 후속 과제

세대 간 자원 배분과 기회 균등을 위한 정책적 대응이 남은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