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線)과 ‘사이’
경제적으로는 풍요롭고 사회적으로는 자유주의자이면서 정치적 입장에서는 진보 세력에 속하는 지인들을 많이 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더 높은 학력을 가졌고 기회 불균등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비용을 더 걱정하곤 한다. 기득권의 부패에 민감해하며 정의의 가치를 신봉한다. 사회 중심부에서 멀어져 가는 이웃들의 생계를 우려하면서 정치권의 무능함에 분노를 내보이기도 한다. 고령화 사회 속 빈곤 노인들의 복지 문제와 다문화 시대 상호문화 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생득적’인 자신의 우월한 계급을 감춘 채, 사회적 신분의 이동 (불)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유리 천정’의 존재에 정색하고 분노하지만, 자신이 운신하고 있는 계층의 안녕과 견고한 ‘유리 바닥’의 관련성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포함된 계급’의 현실적인 특권 앞에서는 침묵의 보수주의자가 되고 마는 일군의 사람들을 안다.
유리 천정과 유리 바닥은 정반대로 작동하는 사회적 욕망의 실체를 환기한다. 유념할 것은, 양자가 동이란 경계면을 칭하는 다른 표현이고, 그 용어 안에 사회 구조를 더듬는 자의식이 접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불평등 사회가 강화해 온 정반대의 욕망이 부딪친다. 계급 격차가 확대된다는 것, 계급 이동성과 유연성이 휘발된다는 것, 불평등이 보편적 환경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특히 이 세 가지 상황이 동시적이라는 것은 최악의 비극이다. 그런 사회에서 하류층은 더 나은 계급으로 올라갈 수단을 좀처럼 취하지 못한다. 노력과 무관하게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상류층도 현재의 계급을 지키지 못할 경우 더 먼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우월한 사회적 위치와 결속되어 있는 자원들을 치밀하게 활용할 수 있다. 상류층 부모는 그들의 자녀를 위해 유리 바닥의 내구성을 다지는 과정을 쉬이 밟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계급 대물림 문제와 ‘유리 천정/유리 바닥’에 대한 고민이 한창일 무렵 ‘그린북’과 ‘기생충’을 봤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하면,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그린북’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은 전혀 다른 소재, 상이한 스타일의 영화다. 이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수평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두 영화는 소외의 흔적을 지닌 인물들의 ‘사회 이동성’에 대한 실험극으로 파악할 수 있다. 유리 바닥이면서 유리 천정으로 기능하는 사회적 경계면, 그 단질적 선(線) 주변에서 야기된 모순과 폭력에 대한 논변일 수 있다.
주지하듯, ‘그린북’은 1962년 미국 남부지역을 배경으로 특수한 계급 준거로 기능하는 인종의 의미를 탐색한다. ‘기생충’은 돈이 계급의 최종 심급으로 작동하는 동시대 한국을 묘사하면서 ‘기생’이라는 생활 형태의 작동방식을 지켜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생득적’ 위계 사회의 견고한 구조에 부딪혀 원래의 자리, 혹은 더 비참한 위치로 되돌아간다. 이 글은 그들이 나아가려 했던 자리와 밀려난 자리 ‘사이’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2. 색깔 : 1962년의 지침
흑인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건 1863년의 일이다. 그러나 신분상의 해방이 차별과 혐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는 아니었다. 특히 보수적인 미국 남부지방에서는 흑인을 차별하는 온갖 관습이 법제도보다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 남부의 식당, 버스 등에는 백인 전용 구역이 존재했다. ‘그린북’이 묘사한 1962년은 바로 그 세계의 미세한 풍경들을 안고 있다. 이때는 흑인 인권 운동의 선봉에 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아직 전국적 지지를 받기 전이다. 특히 남부지역에서는 흑인의 역할과 활동이 더욱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피터 패럴리 감독은 바로 그 시공간 속에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와 그의 운전기사 겸 매니저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를 던져 놓는다. 참고로 셜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곧 흑인이며 토니는 백인이지만 이탈리아계에 속한다.
‘그린북’에서 셜리가 캐릭터화되는 초반 장면들은 매우 흥미롭다. 피부색과 무관하게 그가 백인 상류층의 매너와 취향, 지적인 고상함과 예술적 우아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사회, 경제, 문화 자본의 관점에서 명백하게 상류층의 표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판단은 이탈리아 이민계 백인인 토니와의 비교 속에서 더 강화된다. 토니는 프랑스 오페라를 원작으로 삼은 ‘지옥의 오르페우스’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피아노 3중주를 위해 결성된 트리오를 클럽 밴드와 구별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처럼 셜리와 토니는 차별적 격차를 드러내는 상이한 아비투스(habitus,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의 기표들을 거느리며, 그 기표들의 체계를 대조적으로 반사하는 캐릭터들이다.
영화 초반 셜리는 토니에게 ‘구별 짓기’의 욕망을 은연중에 나타내 보인다. 물론 그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매너 있는 태도로 토니를 대한다. 그러나 굳이 ‘차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생활 전반에서 드러나는 현격한 ‘차이’들로부터 ‘구별’의 태도가 발생한다. 토니의 세계로부터 셜리 스스로 분리되고 특권화되는 순간이 종종 감지되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진지하게 공유할 만한 개화 소재가 마땅찮아 보이는 셜리와 토니가 큰 충돌 없이 미국 남부 투어를 떠난다는 사실이다.
투어 초반에는 토니도 셜리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반복한다. 이러한 혼돈은 온전히 셜리의 피부색에서 비롯된다. 토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면서 셜리의 인상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흑인처럼 연주하지 않고 리버라치처럼 치더라고"” 여기서의 ‘흑인처럼’은 토니의 셜리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묻어난다. “처비 체커, 리틀 리처드,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당신에 사람들 왜 모르냐?”, “당신네 사람들 프라이드치킨에 옥수수,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여기엔 토니의 경험세계에 비친 흑인의 생활 양식과 소비 취향이 담겨 있다. 경제 자본이나 문화 자본에 따른 편견이라기보다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적 정형화의 혐의가 짙다. 그러니까 토니는 셜리의 우월한 사회적 위치를 여러 계기로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피부색’이라는 즉각적 준거에서 주어지는 편견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니와 셜리는 8주간의 순회공연을 함께 하면서 서로를 향한 편견을 덜어내기 시작한다. 점점 서로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면서 우정 어린 동지적 관계로 나아간다. 영화 중후반, 당시로선 불법이던 동성애 혐의로 셜리가 구치소에 끌려갔을 때 토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평생을 뉴욕 나이트클럽에서 일해서 예술가가 복잡하단 거 알아.” 이 쿨한 멘트는 다른 형태의 인생에 대한 공감적 태도, 곧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가 편애하는 도덕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그때부터 토니는 이중적 타자로 내려앉은 셜리의 복잡한 소외의 흔적을 지우며, 또한 법과 관습에 의해 배제된 인격을 복권시키며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단지 말뿐만이 아니다. 이미 인디애나주 하노버 공연 때부터 토니는 흑백 갈등의 현장, 곧 대극적인 욕망의 점이지대에서 셜리를 대변하는 실천을 해 왔다. 공연장에 지저분한 피아노가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한 토니는 백인 관리자에게 계약 내용대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요청한다. 그때 백인 관리자는 “검둥이 주제에 아무거나 주는 대로 치면 되지”라고 말한다. 이 말은 셜리를 향한 직접적인 폭언이 아니다. 셜리가 현장에 부재한 상황에서 흑인에 대한 계급 분리에 동의를 구하는 백인의 공모 제안이다. 그러나 이 대화는 셜리의 편에 선 토니가 백인 관리자의 언사에 상응하는 폭력을 되돌려주며 끝난다. 이후 토니는 말과 행동으로 인종 차이의 경계면을 지워 가기 시작한다.
토니가 그 경계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탈리아계 백인이라는 그의 인종적 위치는 백인 사회 내부에 형성된 또 다른 우열 체계를 가시화한다. 영화 후반, 미시시피주를 빠져나가는 길에서 토니와 셜리는 경찰에게 붙들린다. 경찰의 심문의 이유인즉, 흑인 통금 시간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통금의 시간 위반’이라는 불법보다도 흑인(셜리)를 ‘보스’라고 칭하는 토니의 태도를 막아선다. 토니가 ‘발레롱가’라는 성을 밝히자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그래서 저놈을 모시는군. 네놈도 반은 깜둥이니까.”라고 말한다. 그 순간 토니는 경찰관에게 주먹을 사용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토니의 분노가 ‘네놈도’에서 폭발했는지, ‘깜둥이’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자라면 백인 사회 내부의 위계 체계에 대한 분노이고, 후자라면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대면한 흑백 차별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토니는 그 두 가지 비윤리적 편견에 동시적으로 저항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토니 덕분에 셜리도 토니와 함께 캔터키프라이드치킨을 손으로 뜯어먹고, 그와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내가 당신보다 흑인다울걸?”이라고 말하는 토니를 포용하면서 토니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모든 계급 준거를 내려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8주간의 투어를 끝내는 마지막 공연 직전의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앞두고 셜리와 토니는 공연장에 딸린 식당에 입장한다. 그런데 이번엔 그곳 관리자가 그날 공연 당사자인 셜리를 막아선다. 그가 들이민 건 흑인을 배제해 온 ‘규칙’, ‘관습’,‘역사’다. 그가 속한 백인 사회가 상상하는 ‘흑인다움’에 대한 내면화의 요구다. 그런데 셜리는 창고에서 식사하고 무대에 오르는 일을 포기한다. 음반사와 계약된 일정의 마지막 고비였지만, 고정화된 ‘흑인’의 역할과 계급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때의 ‘포기’와 ‘거부’에는 토니도 동참한다. 백인 사회가 흑인과 백인에게 동시에 요구하는 다른 방향의 체제 인준 절차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제 ‘그린북’의 ‘그린북’을 생각하고자 한다. 이 책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흑인들이 미국을 여행할 때 대중적으로 사용하던 안내서다. 흑인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곳,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곳 등을 표기해 놓은 일종의 ‘인종/계급’지침서다. 그러나 ‘흑인 운전자를 위한’이라는 수식어는 차별을 배려로 포장하기 위한 의지가 선명하다. 설령 흑인들이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해도 이 책은 상상적 백인 공동체와의 ‘시선-응시’ 과정 속에 탄생한 자기 규율의 결과물이다. 버밍햄에서의 마지막 콘서트를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려는 토니에게 백인 관리자는 돈을 주려고 한다. “돈 아니면 이런 일을 왜 하겠어?”라는 편견을 숨기지 않는다. 토니가 셜리와 나눈 우정의 시간을 ‘이런 일’로 비하하는 백인의 편견은 곧이어 더 과격한 말로 표출된다. “이래서 너희 종족이 여기서 일 못 하는 거야. 믿을 수 없으니까. 알겠어?” 이 대사만으로도 ‘그린북’의 배경과 성격은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셜리의 마지막 공연은 유색인들에게 ‘안내된’ 식당 ‘오렌지버드’에서 열린다. 셜리는 이제 방어적 자존감으로 버티던 세계를 스스로 내려온다. 다른 기준에서, 여러 방향으로 솟는 계급의식과 그에 붙어 있는 불편한 욕망으로부터 해방을 꾀한다. 공연장을 어두침침하고 네온사인은 조잡하다. 당연하게도 무대 위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놓여 있지 않다. 그러나 셜리는 공연 중 끼어든 오렌지 버드 밴드팀과 협연을 펼치며 계급과 취향이 무화된 즉흥곡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날 셜리는 피로에 지친 토니를 대신해 눈보라를 뚫고 운전을 한다. 토니가 아내와 한 약속, 곧 크리스마스이브엔 집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셜리는 토니를 집에 데려다준 후 카네기홀에 있는 고급스러운 방으로 되돌아가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토니의 집을 찾아간다. 그곳은 ‘가족’이 있는 곳이고 편견과 배제의 논리가 틈입할 수 없는 정서적 유대의 공간이다.
3. 냄새 : 2019년의 계획
‘기생충’은 공짜 와이파이를 못 쓰게 된 기택 식구들의 투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과 연결될 가능성이 거의 끊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 그들은 더 내려갈 곳 없는 저지대의 낡은 건물 반지하에 사는데, 당장 어떤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연명할 수 있는 처지이기도 하다. 기택 식구들의 생활 무대는 글로벌 IT 기업 CEO로 살아가는 동익은 잘 모르는 세계다. 동익의 식구들은 유명한 건축가 남궁현자가 지은 저택에서 짜파구리에도 한우 채끝살을 넣어 먹으며 자족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생활에서 드러나는 ‘취향’은 매우 적확한 수준으로, “특수한 생활 조건의 체계적 표현”이다. 가정부와 운전기사를 마음대로 교체하면서, 또 언제든지 최고의 과외 교사들을 거느리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누리는 중이다.
그렇게 두 가족 사이에는 보이지 않지만, 매우 견고한 선이 가로놓여 있다. 기택 식구에게 그 선은 상향 이동의 불가능성을 확인시키는 단절적 경계다. 거짓과 허위가 아니면 선 위로 나아갈 방법이 없다는 건 기택네 식구들의 이후 행보에서 명확해진다. 기택의 아들 기우는 위조 졸업장을 들고 ‘케빈’이라는 이름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선을 넘어 볼 수 있다. 기택의 딸 기정도 ‘제시카’라는 이름 안에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서야 단단한 경계면을 월담할 수 있다.
결국 그 선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유리 천정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안전한 유리 바닥이다. 이 말은 기우와 케빈 사이, 기정과 제시카 사이가 매우 멀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환기하는 그 실존적 간격 안에는 상향 이동의 욕망과 이를 훼절시키려는 욕망이 부딪치는 문제적 점이지대가 존재한다. 선 위에서 살아가는 동익은 “매사에 선을 딱 잘 지켜”(가정부 문광을 향해), “왜 선을 넘어올까?”(운전기사를 향해)로 사람을 쓰고 버린다. 이는 부자니까 착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활체계다. 그렇게 보면 ‘기생충’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계층 이동성의 상관성을 성찰하는 실험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영화 속엔 ‘유리 천정/ 유리 바닥’의 강도에 좌절하는 세계(기택 식구)와 안심하는 세계(동익 식구)가 있다. 기택 식구들은 액자를 구분하는 경계면 어딘가에 난 틈새를 찾아 들어가는 데 집중한다. 우연찮게 다혜(동익의 딸)의 영어 과외 선생님이 된 기우는 단절적 경계면의 틈새를 기어이 파고든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실전은 기세야” 란 말을 내뱉으며, 거짓으로 만든 페르소나 뒤에서 전략적 선택을 해나간다. 이후 기택네 식구들은 기우의 계획을 연장하며 유리 천정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희망에 근접해 간다.
그러나 동익이 정박한 곳은 '‘냄새’만으로 자기 계급과 다른 계급을 쉬이 구분하는 세계다. 영화 중반 동익 식구들이 부재한 틈을 타 그의 저택에서 몰래 파티를 벌이던 기택네 식구들에게 위기가 닥친다. 동익 식구들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기택 식구들의 틈입을 모르는 동익과 그의 아내 연교는 소파 위에 누워 흥미로운 대화를 한다. 동익의 대사만 따로 추려 보면 “아무튼 그 양반(기택), 전반적으로 말이나 행동이 선을 넘을 듯 말 듯하면서도 결국은 절대 선을 안 넘거든.”.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냄새가.”. “아무튼, 그걸 말로 설명하긴 힘들고. 가끔 지하철 탈 때 나는 냄새 있어.”로 이어진다. 기택은 동익 부부가 누운 소파 앞 탁자 아래에 숨어서 그 말을 모두 엿듣는다. 이 장면은 소파와 탁자의 선을 기준으로 위에 누운 동익의 언어가 아래에 누운 기택을 함부로 소외시키는 상황을 중계한다. 기택 식구의 ‘계획’이 봉착해 있는 생생한 위기를 정확히 보여 준다. 결과적으로 동익이 지닌 신체의 감각(후각)은 상류층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 안에 하류층에 대한 계층 고립의 압력이 존재함을 보여 준다.
그날 밤, 기택 식구들은 언덕 위 동익의 집을 빠져나와 멀고 먼 자기 계급의 거처로 내려간다. 쏟아지는 비를 견디지 못한 저지대 마을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그곳은 부조리한 계급사회의 진실이 하수구 오물로 솟구치는 상습 침수 지역이다. 기정(‘제시카’가 아니다)은 온통 물바다인 집 안을 살피다가 변기 뚜껑으로 새어 나오는 오물을 닫아 누른 채 그 위에 앉는다. 그럼에도 계속 솟구치는 오물은 그녀가 환상으로 축초해 온 허구적 세계에 대한 실재의 침범이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배를 꺼내 무는 그녀는 환상의 최종적인 종결과 함께 물리적 죽음에 이른다.
‘기생충’은 사회의 음침한 구석에 살며 ‘기생’과 같은 생활 형태를 연습하는 기택 식구들을 꼽등이로 비유하는 영화다. 영화 초반 소독차 연기에 괴로워하는 기택 식구들의 모습을 잡는 카메라의 시선을 이를 증명한다. 좀 더 위생적인(?) 비유를 하자면, 그들은 촘촘한 거미줄에 붙들린 벌레들인지도 모른다. 봉준호는 빗속에서 자기 집을 찾아가는 기택 식구들을 묘사하던 중, 치렁치렁한 전건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얽힌 마을을 유의미하게 그려낸다. 기택 식구들의 진짜 현실은 절망과 가난의 그물망 안에 포박된 셈이다.
그곳에 살면서 언덕 위 동익네 집을 꿈꾼다는 건 무수한 계단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봉준호는 동익의 대저택과 기택의 침수된 집 사이의 간극을 굳이 익스트림 롱 숏으로 반복해서 보여 준다. 관객들로 하여금 프레임을 가득 채운 ‘단절적 거리’, ‘소외의 간격’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전략이다. 그들 숏에서 계단들은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올라가려는 의지를 좌절시키거나 내려가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벽이다. 그렇게 보면 기생하는 삶이란, 부조리한 불평들 사회를 버텨내기 위해 발명된 생활 형태처럼 보인다. 계층 상승을 위한 별다른 수단이 없는 이들의 마지막 처세일지도 모른다.
주목할 것은 근세, 문광 부부와 기택 식구의 악다구니가 기생하는 삶마저 경쟁해야 하는 현실을 환기한다는 점이다. 그들 간의 혈투가 벌어지는 동익 집 지하실은 매우 정교하게 세팅된 상징적 장소다. 이곳엔 봉준호의 매우 중요한 질문이 감춰져 있다. 일단 이 공간은 채권자와 같은 ‘적’으로부터 숨기 위해 마련된 부조리한 장소다. 상류층이 일신상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조성한 비의적인 은신처다. 하류층의 기생 가능성은 이 비좁고 음침한 어둠 속에서 열리고 닫힌다. 그렇다면 동익 집 지하실은 상류층의 비밀스런 부도덕이 하류층의 남루한 욕망의 틈입을 허락하는 현장일 수 있다. 남궁현자에서 동익으로, 다시 어느 부유한 독일인으로 지상의 집주인은 계속 바뀌어 가지만, 지하에서의 삶과 기생이라는 생활 형태는 계속된다. “여기가 편해”라고 말하며 4년 넘게 동익 집 지하실에서 칩거해 온 근세는 괴물 같지만 우리 시대의 한 표정이다.
영화 말미 그의 자리는 기택의 차지가 되는바, 그들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 귀퉁이에 서식하는 비극적인 기생충들이다. 그들이 세상에 말을 걸기 위해선 모스 부호를 이용해야 한다. 이 유약하고 비극적인 신호를 비단 한국인만 감지한 것 같지 않다. ‘기생충’이 칸에서 받은 찬사는, 봉준호가 묘사한 모스부호, 혹은 불평등 시대의 징후를 세계인이 읽은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제 ‘기생충’의 중요한 셔레이드를 장식하는 수석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초반, 기우의 친구 민혁은 정갈한 나무함에 수석을 담아 기택의 집을 찾는다. 할아버지가 육사 시절부터 모은 수석이 집 안에 넘쳐난다는 대사 등을 미뤄 볼 때, 민혁은 기택 식구들에게 수석을 건네며 동익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틈새를 일러 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민혁으로부터 수석을 받아 안은 기택 식구들이 내민 대사, “이거 진짜 상징적인거네”(기우), “참으로 시의적절하다”(기택)는 계층 상승에 대한 희망적 전망을 담아낸다. 영화 중반 기우가 물바다가 된 집 안에서 수석부터 건져낸 것도 그와 관련지어 설명해야 한다. 기우는 그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거짓으로 점철되는 삶이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애초의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때의 수석은 동익 집 지하실에 아직 살아 있는 방해물(근세, 문광)을 향한 폭력 행사의 가능성까지 내포한다.
영화 말리, 계층 이동의 꿈을 상징하던 수석이 결국 피를 부른다. 수석을 빼앗은 근세가 기우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결국 유리 천정 위에서 케빈의 삶을 유지하려 했던 기우는 동익의 세계에서 밀려난다. 적당한 거짓으로 구축한 환상 밖으로 멀리 축출된다. 수석은 상향 이동의 희망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욕망으로까지 변질되자 잠시의 주인(기우)를 때려눕힌 후 원래의 자리(자연)로 돌아간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기우가 다시 맞닥뜨린 사회는 여전히 부조리하다. 물론 유리 천정 너머를 열망하는 그의 태도에도 변화가 없다. 그는 앞으로도 계획이란 걸 세울 것이고, 무엇이든 시도하겠지만 그에게서 나는 냄새가 유리 천정 너머를 속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기생하는 삶으로 걸어 들어간 기택은 동익 집 비밀 지하실에서의 삶을 근세처럼 수용해 버린다. 존재감과 정체성을 박탈당한 채 기생하는 삶이 최선이라는 데 의심을 품지 않는 생활로 나아간다. 이제 기택도 모스부호 이외에는 다른 소통 방식이 없다. 세상이 읽어내기엔 너무 희미한 이 신호는 기택 자신에게 ‘소외를 지우며 말하기’이거나 ‘소외를 지우지 않고 말하기’이다. 어느 쪽으로 보든 기택 식구의 기이한 도착점은 봉합이 아니라 더욱 불편한 질문이다.
4. 소외에 대한 소회
요약하자면 ‘그린북’과 ‘기생충’은 다른 기준에서 형성된 차별적 장(field)을 경험시키는 영화다. 여기서의 ‘장’은 계층화된 집단들로부터 행사되는 아비투스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사회적 불평등은 충돌 이후에 형성된 구조의 결과다. 각각의 기준에서 우월적 계층에 속한 이들은 서로의 집합 무의식에 형성되어 있는 구별과 배제의 질서를 의심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의심하지 않는다며, 불편한 오인(meconnaissance)의 매커니즘을 반사적으로 용인하며 차별을 연장할지도 모른다.
‘그린북’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미국 대통령 재선을 준비하는 트럼프를 떠올렸다. 지난 대선에서 그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층은 노동자 계급의 백인들이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백인들의 경우 2/3가 트럼프에게 표를 행사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대개 노동자 계급인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일자리를 잠식해 들어오는 유색인종의 이미지를 활용했다. 논리보다 감정의 위력에 기댄 트럼프의 논변은 매우 유효했다. 다소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면, 2016년 트럼프는 백인들의 내면에 잠재된 비윤리적인 관성, 더 정확히는 타 인종을 향한 ‘구별 짓기’에 편승하는 전략으로 승기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트럼프는 괴물처럼 솟은 인물이 아니다. 미국이 자랑하는 아카데미 회원 중 유색인종 비율은 최근 36%가 됐는데, 이 정도의 변화에 박수를 쳐야 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린북’이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좀 더 염세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만약 ‘그린북’을 두 남자의 성장담으로 읽는다면, 토니보다도 셜리의 내적 변화가 더 극적인 진폭을 가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셜리는 토니(백인)가 없었다면, 카네기홀에 위치한 자기만의 방 안에 갇혀 크리스마스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사회-경제-문화 자본 등에서 파생하는 차별적 계급의식에 기대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삶을 지속했을지 모른다. 물론 그 역시 피부색을 기준 삼는 다른 차원의 차별적 계급의식에 부딪혀 상처를 입으며 살았을 것이다.
결국 ‘그린북’은 백인과 흑인 사이에 낀 이탈리아계 백인의 휴머니티를 발판 삼아 단절적 경계면이 무화되는 풍경에 이르는 형화다. 별 쓸데없는 가정법이지만, 흑백 갈등을 중재하는 토니의 역할이 그처럼 매력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면 ‘그린북’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대미를 장식했을지 생각해 본다. 이는 ‘그린북’이 매끄럽게 봉합해버린 서사 세계 내에서 기어이 찾아낸 흠집에 기댄 소회다.
그럼에도 ‘그린북’은 신체에 새겨진 계급(피부색) 문제를 익숙한 플롯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물론 ‘기생충’은 계급의식을 감각(냄새)에 접합된 체계로 묘사하면서 낯선 충격을 견인해내는 ‘우리 시대’의 역작이다. 지난 2020년 1월 5일 ‘기생충’이 한국 영화 최초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이와 무관하게 요즘 영화인들에게서 ‘우리는 봉준호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늘은 비슷한 듯 다른 말을 하려 한다. 세계인은 봉준호가 묘사하려 한 시대를 버텨내고 있다.
안승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5년 "문학수첩"(시 부문) 등단, 2009년 제29회 영평상 최우수 신인평론상, 시집 '티티카카의 석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영화평론집 '환멸의 밤과 인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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