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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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드림에 대하여 다양성과 실존에 대하여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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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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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경계 넘기와 세계문학에 대한 고민은 오랜 세월 동안 공신력 있는 세계인의 인정을 받는 데 대한 고민이라는 지점에 머물러왔다. 말하자면 노벨상과 같은 문학상 수상을 노리는 수많은 후보에게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은 간단히 몇 마디의 말과 문장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보다 복잡한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할 여지가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낼 수 있어야 했다. 이는 국민국가, 언어, 민족, 인종 등등 많은 요소에 의해 경계 지워진 문학이 지난 세기부터 점차 범인류적인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면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20세기에 만들어 낸 문학상이, 그것도 생존 작가에게만 수여되는 이런 영예가 인류의 문학적 활동에 있어서 절대적인 준거가 된다거나 난공불락의 문학적 가치평가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이 가져다준 한국문학의 가능성과 자부심, 문예계에 불어다 준 활기의 에너지 등만 떠올리더라도 문학상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노벨문학상은 인류 보편적 가치와 실존의 문제 탐구를 지향하고 있으며 시대를 넘어서는 작가 정신, 새로운 문학적 실험과 시도 등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주체가 한 국가 혹은 한 민족이나 인종이 아니라 ‘인류’ 그 자체라는 점이다. 

인류의 실존 문제에 대한 고민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 작가들로는 가즈오 이시구로 같은 작가를 떠올려볼 수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기존의 비평 언어로 표현하자면 순수 영국적 정서와 분위기, 그리고 갈등과 서사구조를 담고 있다. 작가의 이름과 이력과 배경을 조사한 다음에도 그의 소설에서 일본의 사소설에서 이끌어 가는 것과 같은 일종의 감정선의 흐름이 시적인 언어로 묘사되어있음을 겨우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미래사회의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이처럼 예상치 못한 시각에서 담아낼 수 있던 것은 가즈오 이시구로였기에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가 소설에서 담아낸 핵심적인 감정과 주장은 물론 소설은 처음부터 영어로 쓰였고 영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읽히며 반향을 일으켰으며 마침내 영화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를 보내지마>(Never Let Me Go)는 영화화되고 나서도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는 원작자의 이름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일본계 디아스포라 작가라는 연관성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보다 일찍이는 프랑스의 가오싱젠(高行健)도 예로 들 수 있다. 영혼의 산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같은 환상적 리얼리즘의 기법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보다 동양적인 노장사상의 ‘도(道)’라는 개념이 전반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가오싱젠은 결코 자신의 모국어였던 중국표준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그의 국적은 프랑스였고, 작품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가오싱젠이 중국 공산당 정부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난민신청을 해 이주했다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 국적으로 세계 공인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중국대륙의 자존심을 건드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오싱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던 그 해 중국대륙의 씁쓸한 속내가 담긴 기사들을 찾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다. 마침내 중국 국적의 모옌(莫言)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일정 부분 구겨진 체면을 회복하긴 했겠지만 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아니지만 전미도서상, 포크너상 등을 수상하였고 나름의 문학 영역을 구축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는 하진(Jin Ha, 金哈, 1956~)과 같은 인물도 있다. 중국 출신의 화인(華人)으로 198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그대로 중국대륙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정주하게 된, 말하자면 화인인 디아스포라 작가이다. 주지하다시피 디아스포라는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이나 이스라엘 바깥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됐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를 지나 국경을 넘어 들며 떠돌거나 이주를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단순히 유대인들만의 이상의 경험을 일컫는 것에서 다른 민족들의 국제적인 이주, 망명, 난민, 이주노동자, 민족공동체 및 문화적 차이와 정체성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고유명사 ‘Diaspora’가 아닌 보통명사 ‘diasporas’가 가능해진 지금 이 용어의 앞에 출신 국가의 이름 혹은 민족적 성격을 규정하는 수식어를 붙여 사용함으로써 더욱 다양한 활용과 분석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다원화, 다양성, 혼종성, 세계성, 창조성, 융합가능성 등등… 지금 이 시대는 더 이상 순수의 시대가 아니다.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또 때로는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도 가상의 공간을 통해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온전히 하나의 순수성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한 번씩 등장하는 아마존과 태평양 일부 섬에 있는 비접촉 원시 부족과 같은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희소한 가치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많은 예가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는 바로 위에 말한 작가들처럼 한 나라와 한 국민국가의 순수성(authenticity)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있는 일종의 새로운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화인 디아스포라

화인 집단은 이민자 집단 중에서도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데이비드 펜드리(David Pendery)는 “1800년대 중반부터 미국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들은 그들의 가족에게 돌아갈 생각으로 자발적으로 왔다” (Chinese people immigrating to the US from the mid-1800s came voluntarily, with plans to return to their families. David Pendery, “Identity development and cultural production in the Chinese diaspora to the United States, 1850-2014:new perspectives”, Asian Ethnicity Vol.9, No.3, October 2008, p.203)고 하는데 바로 19세기 중반을 화인들의 북미행 초기 이주로 볼 수 있다. 화인들의 대규모 이주는 이민법 개정과 세계정세의 흐름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북미 이주의 역사는 1785년부터 1882년까지는 노동 이주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자발적인 이주와 강제노역을 위한 이주로 양분되었다. 1882년, 1888년 두 차례 미국에서 ‘화인배제법안(排華法案, Chinese Exclusion Act)’이 통과되었고 노동 이주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기도 했지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과 중첩된 이주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또 한 번 이민법에 변화가 생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야기된 반이민법과 반중 정서로 중국계 이민자들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령이 발효되었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인종별 평등의식이 크게 대두되어 소수인종들이 미국 내 주류 사회에 진입할 기회가 이전보다 크게 증대되게 된다. 
1950년대 들어서면서 곧 ‘화인배제법안’이 폐지되었고 1965년 이민자 숫자를 국가별 쿼터로 분배하게 되면서 이주 자격의 우선권을 미국이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주도록 하였다. 이때는 타이완과 홍콩으로부터의 고등교육을 받은 이주자들이 늘어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타이완과 단교가 되면서 1990년 말까지는 중국대륙으로부터 이민자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처럼 19세기 중반부터 점차 증가된 이주의 물결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당초 사람들은 노역하는 노동자 신분으로 주로 이주했지만 이제는 노동자는 물론 고급지식인과 전문가, 정치인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진출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리고 무려 100년이 넘는 이주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이민 2, 3, 4세대들은 아시아계 인종의 특징적인 외모만을 갖추고 있을 뿐 언어, 생활습관, 사고방식 등 전방면의 문화 관습적인 측면에서 혼종화되었다. 1세대를 포함하여 이 사람들이 바로 화인디아스포라다. 이들을 혼종화된 선상에서 스펙트럼을 다양화해서 구분 지어볼 수는 있지만 이미 서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 혼종화 스펙트럼 자체를 중국대륙의 중국인들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계 이민자들이 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했던 초기 역사로부터는 문학적 활동이나 성과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무렵부터는 화인들의 문학적 활동이 미국 문단에서도 관심을 받으면서 성과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은 북미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화인디아스포라들에게 비슷한 시기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들은 스스로 잔시의 집단에 대해서 형성하고 공감을 이루는 다양한 상상된 어떤 것들을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상상된 고향이 될 수도 있고 상상된 민족 또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등 그 무엇으로 불려도 좋다. 이들은 그 무엇을 공유하게 되고 간혹 공유하는 그 무언가를 추구하기도 하며 실제적으로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매거나 찾았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것들을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머무르며 서로에게 이질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 된다. 

다시 화인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하게 되면 그 중요성은 잠재력으로부터 온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이종(異種)문화의 상황 속에 노출되어서 메리 루이스 프랫이 말했던, 소위 ‘접촉 지대’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자칫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게 되는 위험성을 안고 있으나 동시에 다양한 모든 것들을 포용하여 새로운 어떤 것으로 태어날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디아스포라로 불릴 것이며, 이 사람들의 문학은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명명되어 읽힐 것이다. 그러므로 화인디아스포라에 대해서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가능성보다는 새롭게 이루어낼 수 있는 다양한 잠재력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화인 디아스포라와 그들의 문학을 다루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문제들 가운데서도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바로 중국중심주의 혹은 중화주의다. 과연 화인디아스포라를 중국대륙의 독단으로부터 어떻게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중국대륙에서는 화인디아스포라들의 문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국문학의 세계화 흐름 속에서 일종의 세계중국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데 이 가운데는 국적과 인종을 떠나서 중국어계(Sintic) 언어를 사용하여 기록한 문학작품이나 문예의 여러 형태를 모두 중국대륙문학의 연장 선상에서 언급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어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예외적으로 중국대륙 출신이거나 혹은 중국을 거쳐 간 이력을 가진 중국계 혈통의 사람들에 의한 문학적 활동들도 언어를 초월하여 세계중국문학의 한 갈래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이주 화인들의 문학적 활동이 세계중국문학의 한 카테고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국의 허세욱 교수의 산문과 시들도 아우르게 된다. 중국대륙의 중화사상을 고려할 때 세계중국문학이라는 이름은 결코 세계인의 것으로 보편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사고는 중국대륙이 아닌 곳, 예를 들어 타이완, 홍콩, 마카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 나아가 유럽 각국과 캐나다, 미국 등지의 화인디아스포라에 의한 문학적 활동들 역시 결국 중국대륙에 최종적으로 귀속될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해버리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화인디아스포라와 그들의 문학에 대한 탐색이 직면하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이들을 줄곧 ‘타자화’시켜서 바라보는 학계와 비평이론의 시각이다. 주변부의 문학 작품들, 주류가 아닌 아류로 치부하는 국내 중국문학계의 분위기도 크게 한몫을 하는 것이다.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중국대륙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로 수용하고 있는 국내 중문학계의 한계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화인디아스포라 문학은 중국대륙 문학의 지류로서의 타자 혹은 귀속되어야 할 객체의 지위를 벗어나 좀 더 새롭고도 주체적인 새로운 로컬적 구성체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화인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한 관심과 탐색이 중심에서 부르는 소위 ‘타자’들의 문학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화인디아스포라와 정체성

화인 이주와 정착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지역 중 한 곳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사회와 문화를 경험한 중국계 미국인 혹은 미국의 화인에 대해서는 문화적 시각을 바탕으로 문학을 통해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문학을 통한 접근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화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이다.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데 이때 문학은 인간의 영혼을 담고, 또 영혼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판단하기 위한 투사적인 기록물로 분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화인디아스포라 문학을 여러 각도에서 읽고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세계 각지의 화인디아스포라 문학 작품들을 함께 비교해본다면 더욱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화인디아스포라 문학은 중국대륙과 미국에서 각기 자국 문학의 한 갈래로, 특수한 구분 영역으로 다루고 있는데 중국대륙에서는 ‘해외화문문학(海外華文文學, Overseas Chinese Literature)’이라고 부르며 미국에서는 ‘아시아계 미국인 문학’ 혹은 ‘에스닉 문학(Ethnic Literature)’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속문주의/속어주의가 될 것인가 속지주의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종착점을 ‘본국으로의 귀속’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인데 여기서 ‘본국’이 어디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쉽게 결정지을 수 없다. 물론 디아스포라 스스로도 대답하기 힘든 문제겠지만 누군가 디아스포라 집단 자체를 어딘가로 영역을 나누어 구분 짓는다는 것이 더이상 쉽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이분법은 중심과 주변의 해체라는 방향성을 가진 인문학과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실존적 형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정이라는 측면에서 화인디아스포라를 바라보고 사고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에서 의미하는 성공은 상대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물질적인 성공이다. 물질적인 성공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나 존경과 대체적으로는 일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미국인의 생각 속에서 성공은 부와 지위의 획득을 동시에 함축한다. 즉 남보다 더 잘살고 더 좋은 직업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미국인 대다수가 생각하는 성공이다.” (이현송, 『미국문화의 기초』, 한울아카데미, 2006, 420쪽)

화인들의 미국으로의 이민은 보다 자신의 삶에 적극적이고 타문화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며 기존의 삶을 변혁시킬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문화에의 적응력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했다. 이주자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그들에게 이주를 감행하도록 했으며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일관된 이주자들의 공통된 특성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다만 미국으로의 초기 화인 이주가 주요하게는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화인들의 이주의 이유와는 다른 측면에서 조망되어야 한다. 

지난 세기까지의 화인디아스포라의 미국행은 미국몽(American Dream,美国梦)으로부터 발로하여, 이후 정주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 점철되고 있다. 미국식 사고와 문화, 그리고 중국식 사고와 문화의 차이는 가족공동체 속에서 개개인의 갈등과 대립으로 국지 전화되는데 에이미 탄(Amy Tan, 潭恩美)의 소설에서도 등장했던 양상과 유사한 형태가 반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진의 소설은 명확하게 기존의 화인디아스포라의 소설들과는 다른 형식으로 서술된다. 그의 소설에서는 오리엔탈리즘적 정서와 서구를 맹목적으로 미화하려는 요소들은 흐릿해서 거의 보이지 않게 해두었거나 혹은 삭제하고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 그 특유의 문학적 역량뿐만 아니라 중층적 문화구조 속에서 타냉한 영국인 정서와 문화적 배경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특징으로 트랜스문화적 가능성을 보여주어 세계문학으로 인정받은 것과 같은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하진(金哈)의 소설은 기존의 화인디아스포라 소설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20세기와 21세기의 화인디아스포라 문학은 기존의 문제의식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글로컬리즘과 화인디아스포라 두 개의 키워드를 연결하는 교집합 혹은 접점은 바로 그 출발지인 정체성 문제로부터 한 바퀴를 돌아와 다시 정체성 문제로 귀결되는 순환고리 속에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기본적인 개념은 나를 나인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나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과도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이것은 기존의 관념이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쉽게 정의내리는 방법이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20세기를 지나면서 세계가 경험한 급속한 변화는 정체성에 대한 정의 혹은 개념에 대해서도 역시 격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글로컬리즘이라는 시대적 담론과 전 세계에 만연한 이주 열풍 속의 한 집단인 화인디아스포라의 접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글로컬리즘은 글로벌화 속에서 그동안 주목받아 오지 못했던 로컬에의 관심 증대를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로컬의 특수성으로부터 다시금 글로벌리즘을 재조명할 수 있는 차원에서 글로벌과 로컬이 합쳐진 새로운 시대적 담론을 이끌어 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화인디아스포라에 대한 연구는 중국현대문학이 지금까지 중국대륙의 문학을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기타 지역의 문학을 역외, 해외, 주변으로 구분했던 것으로부터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화인디아스포라는 그 자체로 특수한 집단으로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인구수만으로도 6천만 명에 이르는 규모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의 인구를 넘어서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국가 규모의 공동체로 구분지을 수 있는 볼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화인디아스포라들이 고향을 떠나 다양한 문화권을 경유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들과 갈등적 요소들이 일면 다양해 보이지만 프랙탈적 규칙성을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특정 범주에서의 변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탐구는 화인에게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발견될 것이다. 

화인디아스포라들이 풀어내는 문화 혼종화 현상과 갈등과 고민들은 그들의 문학을 통해서나마 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다만 디아스포라적 주체와 그로 인해 양산되는 여러 가지 담론들은 기존의 젠더, 인종, 국가의 범주에 단일적으로 소속되기보다 이런 범주에 복수적으로 소속되는 개인이 증가하는 글로벌 시대에 고정된 정체성 개념으로는 혼성적, 혼종적 주체를 설명할 수 없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여러 다른 문화에 대해 읽고 쓸 필요가 있다’ (레이 초우, 장수현·김우영 옮김, 『디아스포라의 지식인: 현대 문화연구에 있어서 개입의 전술』, 이산, 2005, 185쪽)는 레이 초우(周蕾)의 말은 문학과 문화 연구의 현주소가 여전히 디아스포라들을 주변으로 내몰고 심지어 이들이 스스로 ‘발화’하기 시작하면 당장이라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그래서 문학이라는 것도 ‘일반적인 내러티브의 특수한 로컬적인 실례’가 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화인디아스포라의 정체성, 출발지와 정주국 사이에서 이주자가 가지게 되는 네트워크, 정주국에서의 주류 사회와의 문제에서 종종 등장하는 종족성 개념들은 점차 익숙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화인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은 이주자 개인의 삶에 대한 적극성과 자유, 그리고 조정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주자의 정체성이 모국의 문화를 기본으로 하여 혼종화될 수 있으며 고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던 것은 고전적인 의미의 장소와 공간 및 이주자의 정체성이 고정적인 어떤 것이라는 전제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향후에는 문학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이주자와 공간의 문제는 더 이상 고정적이거나 피해의식을 담보한 약자나 하위주체의 개념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글로벌화를 주도하는 방향으로 선회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주체성 개념들과도 연계될 것이며 근대적인 개념의 영토와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진행되는 이동이라는 것이 앞으로 더욱 개인 자체와 주체성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정체성 문제의 광범위한 확대로 분석될 것이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으로 적합한 제국의 도시에 사는 다문화주의자들은 세상의 타자들이 동일자들이기를 원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에는 민족주의자를, 아이자즈 아마드의 경우에는 계급이기를 원한다. 이런 이분법적 요구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주변부 문학이 집합성을 지향하여 좀 더 놀랍고 예기치 않은 책동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문학이론연구회 옮김, 『경계선 넘기-새로운 문학연구의 모색』, 인간사랑, 2008, 115~116쪽) 
이처럼 화인화문문학이 잠재하고 있는 속성과 그 영향력은 아직까지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세계문학 속에서 활발히 논의될 것이며 고집스럽게 자리를 꿰차고 있는 중심부의 문학에 일침을 가할 것이다.

미래적 가능성

화인디아스포라와 그들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세계체제론에서 다루어지는 중심, 반주변, 그리고 주변의 관계 자장과 함께 다시금 언급될 것이다. 로컬적 특수성으로부터 다중심적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기 위한 시각의 전환을 위해 문화학적 논의들도 도입될 수 있다. 또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세계상’을 문학 안에 담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해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문학이 지금까지는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이 현상학이 존재론적으로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하는 쪽으로 초점을 잡아가게 될 것이다.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감이 점점 줄어드는 세계문화와 세계문학 속에서 디아스포라문학은 세계인의 정서를 감정적으로 건드리며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공간적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국가의 망상은 근절되어야 하며 조국애(patriotism)와 세계시민주의가 이를 대체해야 한다”는 말을 인용했다. 2014년 5월 부산대학교, 가라타니 고진 초청강연회에서 화인디아스포라 집단에 대한 탐색을 지속하는 것은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어 소위 중심이라고 일컫는 지점들이 지정하는 주변부들에서부터라도 중화사상에 대한 환타지를 희석시키고 일종의 균형과 평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한 것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화인디아스포라에 관한 문제는 결국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여러 문화권의 틈새에서 혼종화 과정을 거쳐서 자신들만의 로컬적 정체성을 일궈나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현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한국이 더 이상 순혈주의 단일민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앞으로 더욱더 다원화되고 다양화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에 관한 질문은 나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혼종화의 과정에서는 나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남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정도에 따라서 혼종화의 어느 지점 언저리에 머무를 것인지도 결정된다.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로 말하자면,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샌드위치 속에 자리한 내용물들처럼 강대국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자의든 타의든 눈치 게임을 이어오도록 했다. 19세기 말까지 아시아 정치, 사회, 역사, 문화를 이끌어 왔던 중국 제국에서 벗어나 20세기의 세계의 중심이 된 미국의 모델을 차용하면서 한국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떤 방향으로 규정지어왔는지 다시 한번 돌이켜 보게 된다.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던 20세기 미국식 교육 모델과 무한경쟁 및 자본주의 논리가 반성되고 있는 이 시점에 세계의 균형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미국도 중국도 아닌 우리만의 주관과 의견을 다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화인디아스포라에 대한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만약 어떤 사람들의 모임과 만남을 규정짓고자 한다면 어느 집단, 어느 공동체, 어느 국가에 소속된다고 정의내리는 것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의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어떤 하나의 관념을 고집하는 것보다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 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화인디아스포라를 정의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는 사람들의 국가와 도시 간 이주와 왕래의 빈번함, 그리고 다양한 문화 간의 뒤섞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코로나 19 이전의 일상이었다. 지난 몇 개월의 대혼돈 속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생존을 위한 움직임을 계속해 왔고 아직은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또다시 주어진 환경조건 아래에서 나름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고 있으며 ‘포스트 코로나’라는 새로운 국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지 고심하고 있다. 인간 대 인간, 문화 대 문화의 문제 속에 다시금 생존 대 절멸의 위기를 일깨우는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왔다.

코로나 19의 장기화가 그 끝을 보이게 되는 시점과 그 이후부터는 또다시 누구라도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이방인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게 되면 나 외의 다른 사람에 속하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규정된 규범에 복종하는 세상 속에서, 고아, 이방인, 불청객, 소외된 사람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회가 지난 세기 동안 자신들 사회와 남들 사회 사이에 차이와 국경을 만들기 위해 해 온 모든 노력이, 바로 그 차이와 국경을 없애기 위한 압력 아래에 놓여지게” (아민 말루프, 박창호 옮김, 『사람잡는 정체성』, 이론과실천, 2006, 115쪽) 된 이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시대, 즉 세계시민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더욱 디아스포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다문화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에 접어든 한국이, 그리고 누구든지 잠재적으로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대량으로 양산 혹은 확산되는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언어나 경계를 넘은 세계문학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화인디아스포라 문학의 독자들도 지금보다 더 많아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화인디아스포라 문학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이 가진 역량이 개인의 경험과 개인의 고민과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공감할 수 있는 작가와 독자들의 만남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아니었지만 내일은 또 내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그 입장과 그 신분적, 문화적 상황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므로. 


고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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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