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기후위기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문학생태학의 전개 과정

조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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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환경사학자 도널드 워스터(Donald Worster)는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가 책임자로 있던 핵 연구팀이 1945년 7월 미국 뉴멕시코 주에서 발사한 핵폭탄과 함께 “생태학의 시대(THE AGE OF ECOLOGY)"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생태학은 1866년 에른스트 헤켈(Ernst Haekel)에 의해 유기체들과 외부세계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의 명칭으로 명명된 이후 생물학의 한 분야로서 고유한 영역을 지켜왔다. 그러나 생태학이 일부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에게도 낯익은 이름이 되고 생태계의 위기가 폭넓게 전파되었던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기에는 오펜하이머 일화가 상징적으로 극화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가공할 파괴력이 전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자연이 더는 인간들의 모든 욕구를 받아주는 무한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들의 손에 의해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연약한 상대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생태학적 관심이 확대됨에 따라 역사, 철학, 법학, 신학, 사회학 등의 인문학 분야도 점차 ‘녹색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학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1960~1970년대를 풍미한 인권운동과 여성운동이 문학연구의 양상을 두드러지게 변화시켰던 반면, 문학연구에 적용된 본격적인 생태학적 접근은 1980년대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문학작품에 드러나는 생물학적 주체와 관계에 관한 연구”로 정의하면서 문학생태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조지프 미커(Joseph Meeker)의 「문학과 생태학: 생태비평 시론」에서 이미 생태비평을 “생태학과 생태학 개념을 문학연구에 적용하려는 시도”로 정의한 바 있지만, 문학생태학 연구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생태비평이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미국 ‘문학과환경학회’(ASLE: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Literature and Environment)의 설립(1992)과 최초의 문학생태학 관련 논문집인 「생태비평 논집: 문학생태학의 이정표」의 발간(1996)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쉐럴 글랏펠티(Cheryll Glotfelty)가 지적하고 있듯이, 다른 분야에 비해 공식적인 ‘녹색화’가 늦어지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용어나 운동의 차원으로 결집되지 않았을 뿐 문학연구 내의 생태학적 경향은 이전부터 지속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문학에 표현된 자연 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문학 그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장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의 주제가 배제된 문학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정도로 자연은 문학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가 되어왔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근원적 위치를 일깨워주는 전원문학이 서양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친숙한 전통 중의 하나가 되어왔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확실히, 인위적인 도회세계로부터 녹색의 자연세계로의 귀의를 통해 삶의 진정한 교훈을 얻게 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전원문학의 전통(pastoral tradition)’은 우리들이 문명에 의해 거부되고 있는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대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 기원”의 존재들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원문학이 상정하는 자연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중심적인 관점이 투사된 일종의 ‘인공화’된 자연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아카디아(Arcadia)는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상적 충동이 산출해낸 상상적 건조물인 것이다. 그리하여 벗어나고자 하는 도회세계가 복잡하고 현학적일수록 이상적 지향점으로서의 자연세계는 소박한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단순성이 지배적인 영역으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글렌 러브(Glen Love)가 지적하고 있듯이, 자연과 단순성의 등치는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자연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배제하고서야 도달할 수 있는 다분히 인간중심적인 관점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세계에서 교훈을 얻은 후에는 어김없이 도회세계로 복귀하는 전원문학의 또 다른 관례에서도 확인된다. 즉, 전원문학 전통에서의 자연이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사회로의 복귀를 위해 일시적으로 머물며 교훈을 배우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전원문학에 전제된 이러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는 심지어 자연의 주체가 가장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낭만주의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워즈워스와 콜리지 등의 낭만주의 시인들은 산업혁명 이후의 문제점을 극화하고 사업화 이전의 자연친화적 삶의 양식을 진보중심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에 대한 대안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생태학적으로 접근될 소지가 충분하며, 실제로 적지 않은 생태학적 문학 연구가 낭만주의 시인에 의해 바쳐져 있다.

그러나 델 재닉(Del I. Janik)이 지적하고 있듯이, 비록 정교하게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근원적으로 낭만주의 시인들을 지배했던 것 역시 "인간중심적 휴머니즘"이었는지 모른다. 낭만주의  시 세계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자연을 통한 시적 화자나 시인 또는 인간 전체의 구원 가능성일 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원문학의 전통이나 낭만주의 시를 지배했던 것이 이상주의적 인간중심주의였다면, 이와는 달리 근원적 차원에서 인간중심주의가 반성되고 자연이 그 자체로 인정되어 인간도 자연의 전체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미국 문학과환경학회 설립 이후 가시적으로 대두된 문학생태학의 이론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문학생태학의 이러한 비평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생태(과)학의 이론이 문학연구 방법론에 접목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급속히 발전되어온 과학기술 문명의 부작용들이 표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함에 따라 무분별한 과학 기술의 남용에 의해 코앞까지 닥친 생태계 위기의 실상이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는데,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이에 앞장선 대표적인 생태학자이다. DDT 등의 화학 살충제의 폐해에 관한 그녀의 연구는 과학기술이 핵폭탄처럼 인간에게 직접 겨누어지는 무기일 뿐만 아니라 해충에게 사용될 ‘무기’도 생산하여 그 무기가 해충뿐 아니라 인간, 나아가 지구 전체에도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배리 커머너(Barry Commoner)에 이르면 과학기술에 잠재된 이러한 파괴성은 수도관으로 스며든 질산비료, 세제에 의한 이리 호의 오염 실태 등의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될 뿐 아니라, 이들 사례로부터 이른바 생태학 법칙으로 알려진 일반적인 원리들을 이끌어내는 성취에 도달한다. 커머너가 도출해낸 생태학 법칙이 생태과학이 체계를 갖추어가는 시발점이라면, 유진 오덤(Eugene Odum)의 작업은 그것의 구체적인 결실이라 할 만하다.

오덤 생태학의 핵심은 ‘생태계(ecosystem)’라는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생태계란 물리적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일정 영역 내의 모든 유기체들을 포함하는 단위인데, 그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유기체들 간의, 또는 유기체들과 물리적 환경 간의 상호 작용은 에너지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관찰될 수 있다. 이러한 관찰에 의해 오덤은 여려 층위의 각각의 생태계에는 늘 교란되면서도 그때마다 평형을 유지하는, 즉 끊임없이 ‘동적 평형(homeostasis)'에 도달하려는 정교한 생명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생태계 위기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표현대로, 인간이 전체 자연 생태계의 일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자신 이외의 존재를 대립적으로 간주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의해 더는 “동적 평형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생태(과)학 이론을 모태로 탄생한 생태비평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만하다. '생태비평 논집'에서 현재의 생태비평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러브의 논의는 생태비평의 이러한 측면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제한된 인간주의적 시각, 즉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에 관한 편협한 인간중심적 관점을 인지해야 한다.······우리에게 직면한 도전은 대지가 우리의 안락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처분을 기다리며 존재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벗어나는 일이다.”라고 주장하며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편협한 “자아의식”에서 자연의 생명체계를 읽어내는 폭넓은 “생태의식”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이처럼 ‘반인간중심주의’와 ‘생태의식’이 문학생태학의 중심 ‘이론’으로 강조됨에 따라, 문학생태학이 다루는 ‘실제’ 작품 분석 역시 자연을 배경과 주제로 삼는 ‘자연 글쓰기(nature writing)' 장르에 치중하게 된다. 반인간중심주의와 생태의식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인간 세계를 벗어나 자연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자연 글쓰기' 장르의 부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태비평 논집'에서는 논문집 전체를 통해 '자연 글쓰기'에 대한 언급이 자주 발견될 뿐 아니라 특히 후반부의 논문들은 전적으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를 위시한 '자연 글쓰기' 작가에게 바쳐져 있다. 또 3년 후에 출간된 '문학과 환경'이라는 앤솔러지에는 기존 작가에 대한 새로운 생태학적 접근을 포함하여, '자연 글쓰기' 작가들의 경우는 거의 빠짐없이 수록함으로써 문학생태학에서 '자연 글쓰기' 작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자연 글쓰기’ 장르가 문학생태학의 주된 양식으로 굳어짐에 따라, 자연 속에서 기거하며 체득한 생태학적 비전을 자신이 확립한 ‘자연 글쓰기’ 장르에 담았던 소로가 문학생태학의 ‘수호성인’으로 이해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실제로 로런스 뷰얼(Lawrence Buell)은 문학생태학의 관점에서 소로의 전 작품을 깊이 있게 다룬 그의 대표적 연구서인 '환경적 상상력'에서 “자연 글쓰기의 시조”인 소로를 문학생태학의 전범이자 시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렇듯 기왕의 연구서와 논문들은 연구 방향과 세부적 논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소로를 실제로 자연에 기거하며 자연을 그의 작품 속에 생생하게 담았던 탁월한 자연 작가로 파악하며, 그의 모든 생태 사상이 발원된 원천이자 빛나는 생태적 비전을 구현하는 전범으로 평가되는 대표작 '월든'이 문학생태학의 논의의 기준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연적 면모 때문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확실히 소로는 자연을 그 자체보다는 인간정신의 상징으로 파악하는 랠프 에머슨(Ralph Emerson)과는 달리, 구체적인 자연에 기거하며 인간 정신의 밖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자연을 만나 그것을 그의 ‘자연 글쓰기’로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월든'은 2년 이상 그 속에서 살며 직접 관찰하고 확인한 ‘월든’이라는 자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인 셈이다. ‘월든’이 ‘자연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프로젝트’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소로가 관찰하고 경험한 월든이 ‘월든’ 그 자체의 전모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사실, 자연 그 자체는 너무도 광범위하고 유동적이어서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은 각자가 바라보는 자연일 뿐 자연의 전모는 아닐지 모른다. 즉, 인간적 개입에 의한 굴절이 허용되기 이전의 자연이란 관념의 세계에만 존재할 뿐, 우리가 자연을 바라볼 때 그것은 어느새 자연 그 자체가 아니며 우리의 관점이 투사되어 형성된, 그런 의미에서 이미 ‘인위화된’ 자연인 셈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로가 자신이 잎사귀와 그것을 키우는 흙 둔덕의 일부가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황야와의 유기적 일체감을 느낄 때, 또는 콩밭 일을 하며 괭이질하는 자신과 괭이질당하는 콩 사이의 거리를 잊은 채 대지와의 교감을 확신할 때, 이러한 자각과 확신이 아무리 강렬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소로의 내면에서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 자연에 대한 주관적 인식의 일환이지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완벽히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소로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관점에 의해 파악된 또 다른 수많은 자연이 있게 마련이며, 심지어 소로가 바라보는 자연도 늘 일정한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수시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설혹 소로가 자연의 실체를 대면했다고 해도, '월든'에 담겨 있는 자연이 여전히 ‘인위화된’ 자연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만났던 자연을 제한된 인간의 언어에 의지해 표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로는 자연이 자신의 언어가 되어줄 것을 믿으며 관습적 의미가 제거된 ‘숲과 들판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포착하려 했다.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인간 언어의 위력에 대한 믿음 대신 자연의 소리, 즉 숲의 언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것을 기록으로 담아두려는 소로의 궤적은 관습적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 그 자체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실체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체가 인간에게 허용된 언어 이상일 수 없으며, 따라서 자연은 단지 인간 언어에 의해서만 추적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할 때, 언어와 그것의 은유 작용이 인간과 자연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월든' 텍스트가 온갖 은유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예컨대, '소리' 장에서 새들이 내는 ‘자연의 소리’가 시인이나 동반 자살한 연인이 부르는 노래, 또는 세레나데 등의 ‘인간의 소리’로 은유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월든'의 중심 배경인 월든 호수 자체가 인간의 심오한 정신세계에 비유되고 있다. 더욱이 작품 전편에 걸쳐 수시로 도입되는 고전의 은유는 인위를 벗어난 자연의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실제로는 언어와 은유의 영역으로 수렴되는 '월든' 텍스트의 특성을 단적으로 대변한다.

사실, 레오 막스(Leo Marx)가 지적하고 있듯이, 소로가 월든을 떠날 때는 자연만 떠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상화할 수 있는 언어와 은유의 세계도 떠난 것이 된다. 자연은 언어와 은유화에 의해서만 추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떠난다는 것은 언어와 은유의 세계도 떠나는 것을 의미하게 되며, 반대로 언어와 은유화를 포기할 때는 그것이 담당할 자연의 형상화도 마찬가지로 포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처럼 '월든'에서는 둘 중 하나가 멈출 때까지 자연과 인위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어우러져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월든'에서 실제로 행해진 프로젝트는 자연 그 자체를 기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인간 언어로 번역하는(또는 언어를 통해 은유화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생태비평 논집'으로 대표되는 기존 문학생태학의 주류는 반인간중심주의와 생태의식을 강조하며 이러한 ‘이론’을 가장 전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전범으로 소로와 그의 '월든'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월든' 텍스트는 기존 주류적 생태비평에서 파악하듯 인위를 벗어난 자연의 실체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중심을 완전히 벗어난 자연은 존재할 수 없고 자연을 추적하되 오직 언어와 은유화라는 인위에 의해서만 접근될 수 있을 뿐임을 극화하고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월든'이 이렇게 새롭게 읽힐 수 있다면, 이 텍스트를 논의의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생태비평적 전제가 진지하게 재고될 필요가 있다.

사실, 기존의 생태비평 이론은 반인간중심주의를 모태로 삼아 인위가 배제된 자연을 상정하는 심층 생태학적 논의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러나 인위와 완전히 구별된 자연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해도 실제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으며, 혹 가능하다고 해도 그러한 자연이란 이미 인간과는 무관할 것이다.

물론 '월든'에서 자연과 인위의 불가피한 중첩을 발견해내는 최근의 해체적 해석 역시 '월든'과 문학생태학이 단순한 ‘자연문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해체적 읽기는 '월든'에서 형상화된 것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과 인위의 간극과 중첩임을 보여줌으로써 인위를 배제한 자연을 상정하고 그것에 기초하는 생태비평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충분하다. 이러한 해체적 읽기를 통해 '월든'을 ‘자연 작가’에 의한 자연의 기록으로만 평가하는 단순한 차원을 벗어나게 되었지만, 실체적 자연에의 도달 불가능성 그 자체가 당연시되어 있는 ‘있는 그대로’ 수용됨으로써 인위에 입각하면서도 자연을 향해 지난하게 움직이는 '월든' 텍스트의 끈질긴 지향이 간과되고 있다고 하겠다. 확실히 '월든'은 실체적 자연 그 자체를 담는 그릇이라기보다는 인위와 자연의 끊임없는 긴장을 보여주는 역동적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월든'을 일반적으로 여겨지듯이 자연의 실체를 온전히 담고 있는 공간으로 이해하거나 최근의 비평이론에 입각해 자연과 인위의 간극을 안락하게 수용하는 텍스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위에 입각할 수밖에는 없다고 해도 자연을 향한 지난한 추구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면, '월든'과 소로를 전범으로 삼는 생태비평 이론의 근간이 재검토되어 문학생태학이 좀더 견고한 토대에서 새롭게 세워질 가능성이 도출될 것이다. '월든'은 자연과 인위의 단순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는 기존 문학생태학의 전범이나, 자연과 인위의 불가피한 차이에 기초한 해체적 생태비평의 준거라기보다는 자연과 인위의 역동적 관계를 포착하는 새로운 만학생태학의 전형적인 모형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문학생태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진척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월든'이 ‘자연 작가’에 의한 자연의 기록이라는 차원이나 실체적 자연의 도달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해체적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고 인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연을 지향하는 지난한 궤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러한 읽기를 통해 문학생태학이  ‘자연 문학’으로 환원되거나 또는 자연이 사실상 배제된 관념적 문학으로 좌초하지 않고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암시된다고 하겠다.

사실, 기존 문학생태학의 주류에서처럼 인위가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내재적 가치가 강조되다 보면, 인간의 대립항으로서의 자연 그 자체가 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자연을 전면에 내세우는 ‘자연문학’이 문학생태학 논의의 핵심에 위치하게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문학’이 문학생태학의 한 분야일 수는 있어도, ‘자연문학’ 그 자체와 등치될 수 없는 노릇이라면, ‘자연문학’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으로 일방적으로 환원되지 않을 문학생태학의 영역이 재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연이 인간 행위의 배경과 소재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인위와 완전히 구별된 자연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인위의 개입이 온전히 배제된 자연이란 이론적으로는 가능해도 실제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으며, 혹 가능하다고 해도 그러한 자연이란 이미 인간에게는 무의미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대립항으로서의 자연이란 이론과 관념의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이며 인간에게 의미 있는 자연에는 이미 인위가 묻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 존재가 자연을 벗어나서는 설명될 수 없듯이 인위를 온전히 벗어나는 자연 역시 인간과는 무관한 존재가 될 뿐이라고 한다면, 게다가 자연 내의 인간 활동에 의해 자연 자체가 변모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인간이 절연된 자연의 영역 대신 인간과 자연 그리고 양자 사이의 상호작용까지 모두 포괄하는 영역이 문학생태학의 범주로 편입되어야 할는지 모른다.

이렇듯 문학생태학이 인위가 범접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형상화로 국한되기보다는 인간과 자연 양자를 포함하며 상호간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조명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작품 내에 자연이 그 자체로는 남아 있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생명에 대한 통찰과 지향이 담겨 있는 소로 이후의 적지 않은 텍스트들도 문학생태학 논의의 핵심에 포함될 소지가 충분하다.

예컨대, 아직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지기 이전의 구체적 자연을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개입에 의한 자연의 숙명적 파괴과정을 생생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자연과 인위의 입체적 관계를 조명하고 있는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텍스트나 ‘월든’마저 “삶의 본질적 사실들”과 대면하는 자연 상태 그대로이기를 그치고 도시인을 위한 2급 휴양지로 변모된 철저한 문명의 상태를 작품의 무대로 삼아 생명 박탈의 문명 조건에 대한 심오한 성찰과 자연의 생명원리에 대한 끊임없는 지향을 보여주는 토머스 핀천(Tomas Pynchon) 등의 텍스트들은, 자연이 표면에서 사라진 현대적 상황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텍스트 내에 의미 있는 생태학적 통찰을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중심적일 수는 없으면서도 “삶의 본질적 사실들”에 대한 통찰과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복합적 비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생태학이 인위와 자연의 안락한 이분법에 기초하는 대신 보다 역동적으로 진척되어 인간이 절연된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양자 사이의 상호작용까지 모두 포괄하는 영역으로 확장될 필요성이 제기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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