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현상으로 바라보는 ‘순수성과 오염’이라는 것
인셀은 본의 아닌 이유로 여성과 섹스를 할 수 없다고 믿는 남성들의 인터넷 모임에서 출발했고, 토론토에서 테러'를 일으킨 주범 알렉 미내시언(Alek Minassian)은 이 인터넷 모임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지금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는 양성평등이 자신들의 성생활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믿으면서 이 상태를 전복시키고자 여성에 대한 폭력까지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내시언에 대해 이런 주장을 실행에 옮긴 인셀 내부의 ‘급진파’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인셀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남성은 여성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불공정한 사회구조의 탓으로 돌리면서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의 주장은 ‘섹스의 평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1960년대의 성해방주의에 기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문란한 여성’에 대한 징벌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정반대의 취지를 내세운다고 할 수 있다.
인셀의 홈페이지(incel. me)는 여성 혐오 표현으로 가득한데, 이런 혐오의 감정은 특정한 여성에게 향한다기보다, 자신들이 설정한 ‘더러운 여성’이라는 표상에 집중되어 있다. 인셀을 지배하는 분노의 정서는 하나의 계급 감정을 구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을 사회구조의 불평등으로 인해 정당한 권리가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로 인식하고 있다.
성노동 여성을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던 19세기 프랑스 시인의 정서와 비교했을 때, 참으로 대단한 반전이 인셀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인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순수한 남성’에 대한 판타지이다. 이 ‘순수한 남성’은 ‘더러운 여성’과 대립의 관계를 이룬다. 말하자면, ‘깨끗한 남성’이라는 말이다.
이들은 섹스할 수 없는 처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섹스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은 ‘깨끗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종교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의 위생 관념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메리 더글러스는 ‘순수의 관념’을 일컬어 사회 집단을 구성하는 체계적인 구조이자 분류이고 평가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제자리를 이탈하면 ‘오염된 것’이다. 따라서 인셀이 전제하는 ‘더러운 여성’은 제자리를 지키지 않는 여성을 지칭하는 셈이다. 더글러스에게 ‘오염’의 관념은 “위생에 대한 배려와 전통에 대한 존중”에 의지한다. 인셀이 상상하는 ‘순수한 남성’의 제자리는 그러므로 특정한 위생과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위생과 전통에 대한 이해, 또는 인식이야말로 인셀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지식의 원천이다. 무엇인가를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지식의 산물이라고 더글러스는 말한다. 따라서 이 지식이 바뀌면 ‘오염의 관념’도 바뀔 테고, 이에 대립하는 ‘순수의 관념’도 바뀔 테다. 인셀이라는 오늘날의 증상은 오염의 관념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증상은 쾌락의 구조이다. 이데올로기를 향유하는 것, 다시 말해서 인셀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남성’이라는 대타자는 반드시 정신 나간 몇몇 ‘루저’들의 특이 행동을 위한 핑곗거리가 아니다. 인셀은 정확하게 21세기 극우주의의 양상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성(purity)이라는 말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순수한 자질 또는 조건이자, 서로 뒤섞이지 않은 상태”라고 되어 있다. 한 마디로 순수성은 서로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객관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순수성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자 바람직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 반대에 있는 ‘뒤섞임’은 혼돈이면서 동시에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모호한 것이다.
이처럼 ‘순수의 관념’은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극단의 쌍으로 구성되어있다. 순수성은 절대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의 순수 같은 차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순수의 관념을 처음 창안한 이는 다름 아닌 플라톤이다. 플라톤에게 순수성은 이상적인 것을 의미한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어떤 것이 있으면서 있지 않기도 한 상태라면 그것은 “순수하게 있는 것”과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은 것” 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순수한 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의 반대편에 있다. 더글러스가 천착한 지점은 이런 절대적 순수성이라는 범주가 특정 문화의 질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문화 인류학자로서 더글러스는 특정 사회가 세계를 분류하고 배치하는 기제를 탐구했다. 플라톤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특정한 사회문화적 체계는 오염에 대립하는 순수라는 절대적 범주의 정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더글러스의 주장이다.
오염은 한 마디로 순수의 질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체계 자체를 위반하는 것이다. 순수성이라는 용어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세력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창안하는 은어이다. 이 은어의 상징체계를 통해 특정한 세계의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셀의 경우도 ‘순수한 남성’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남성의 순수성’을 가정한다. 이 ‘남성의 순수성’이야말로 새롭게 세계의 질서를 구성하려는 가치의 척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의 척도는 인셀 내에서 소통력을 가진 은어에 불과하다. ‘인셀 반란’이 기성 질서에 테러를 가해서 전복을 도모해야 한다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은어의 상징체계 덕분이었다. 과거 세월호사건 때 박근혜 정부가 명명했던 ‘순수한 유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가족의 순수성을 내세움으로써 이들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상황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것이었고,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질서는 경험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필연적으로 해체의 과정을 걸을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을 통해서 순수와 오염의 경계는 붕괴한다. 더글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총체적인 해체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더러움은 완전히 차별성을 잃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순환이 완성된다. 더러움은 차별화하는 마음의 활동을 통해 창조되는데, 말하자면, 더러움은 질서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이다.
그래서 더러움은 차별화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역할을 차별화하는 과정을 통과한 모든 것은 그 만들어진 구별 자체를 위협하다가 마침내 차별적이지 않은 특성으로 복귀한다. 형태 없음은 부패만큼이 시작과 성장을 의미하는 적절한 상징이다. 오염이라는 관념 자체가 순수의 관념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순수성은 오염 앞에서 무너진다. 더러움을 동반하는 오염이야말로 순수의 질서를 통해 만들어진 부산물이지만, 역설적으로 순수의 경계를 침범하는 실재이기도 하다. 순수성은 상징체계라는 점에서 언제나 실재 앞에서 전복되고 역전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 순수성은 그 명명과 달리 언제나 경험을 통해 해체될 수밖에 없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저서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마녀프레임’, ‘파리를 그리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