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요약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이주자들의 고통스러운 이동과 관광객들의 즐거운 여행이라는 대조적 이동 현상이 사실은 같은 시기에 자본주의의 지구적 확장으로 인해 급증했음을 지적한다. 이는 생산과 소비의 세계화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얼마 전 신문 기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일자리를 잃은 30대 가장이 아이들이 보고 싶다며 372km 떨어진 고향 집까지 걸어가다 길에서 세상을 떠났다. 말레이시아 당국에 따르면 이 남성은 조호르주 세가맛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다 코로나19사태로 직장을 잃었다. 이후 자식들을 보기 위해 고향인 트렝가누주로 길을 떠났다. 트렝가누주는 조호르주에서 37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자동차로 5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동제한 명령으로 주(states)간 이동과 대중교통이 끊겨 남성은 걸어서 집에 가야 했다. 현지 매체들은 이 남성이 창백한 얼굴로 힘들게 걷는 모습을 여러 사람이 봤다고 전했다. 한 목격자는 “사람들이 그에게 음식을 주면서 여행을 계속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인은 사후 검사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사망자의 가족은 장례비 1천500링깃(42만 원)을 낼 돈도 없어 주변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인도의 도시에서 일자리를 잃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걸어가다 죽고 다친 이야기. 유명 영화배우가 그들을 자비로 고향에 보내 준 미담이 보도됐다. 인도는 국제적 이주노동자를 가장 많이 송출하는 나라다. 또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국내에서 이주한다. 방향은 당연히 농촌에서 도시로 집중된다. 그들은 왜 집으로부터 그렇게 먼 곳으로 이동했을까? 누구나 답을 안다. 일자리를 찾아서다.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기 위해 구매자를 찾아 힘들고 고통스럽게 이동한다. 이 이동은 사실상 강요된 것이다. 떠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생존이 가능하다 해도 더 부자가 돼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요하는 사회의 압력을 개인이 이기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강요된 이동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이동도 있다. 한국 사회도 그랬지만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해외여행은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했다. 삼십 년 사이에 해외여행자의 수는 세계적으로 무려 수백 배나 늘어났다. 여행자들은 노동자들의 이주와는 다르게 즐겁고 자발적으로 이동한다. 자발적이라는 말은 순전히 자기 의지로, 자기 두 발로만 이동하고, 자신들이 준비한 음식만 먹거나 유료숙박 시설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 돈을 기꺼이 지불해 교통과 숙박과 식음료 상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여행한다. 또 가는 장소, 먹는 음식까지도 가이드와 가이드북과 SNS의 지침을 충실히 따른다. 여행이란 이동이 딱히 자발적인 것 같지는 않지만 당사자에게 주는 영향, 느낌은 일자리를 찾아가는 이동과 확실히 다른 것이다.
대조적 방식의 두 이동은 1980년대 말 이후 삼십 년 동안 똑같이 급증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같은 시기에 역시 급증한 상품과 화폐의 세계적 이동의 결과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엄밀하게 보자면 두 이동 자체가 상품과 화폐의 이동이다. 노동이주자는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이동하고 관광객은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제는 주로 전자신호로 전환된 화폐가 이동한다. 상품과 화폐 그리고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은 왜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하게 됐을까? 왜 사람들은 생산하거나 소비하기 위해 지구 둘레만큼을 이동하는 수고를 자처할까?
해답은 자본주의의 성격에 있다. 자본주의는 애초에 지구적 범위의 수탈과 교역을 바탕으로 성립됐다. 이는 자본주의의 형성에 아메리카 대륙의 수탈, 노예무역, 아편무역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만 보아도 금세 알 수 있다. 그리고 발전한 자본주의는 다시 공간적 범위를 확장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의 개발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한 말이다. 이 경향은 일시적 부침은 있었지만 멈추지 않고 지속됐다. 생산과 소비의 지구적 확장이 사람들의 이동이 확대된 원인임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 거리 이동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돈을 벌거나 쓰기 위해 깨어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이동하는 데 써야 하는(한국 수도권 직장인의 하루 출퇴근 소요시간은 왕복 두 시간 가까이나 되는데, 이런 상황은 세계 대도시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우리의 일상이 이를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원인보다 중요한 것은 대규모 이동이 가져오는 결과다. 생산과 소비의 공간적 범위 확장과 이동의 증가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연결을 잊게 만든다. 어느 사회, 어느 시기에서든 인간은 소비하기 위해서 먼저 생산해야 한다. 당연히 생산과 소비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에서 생산은 소비자에게 판매해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만 생산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생산과 소비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연관은 강화되지만 공간적, 문화적, 심리적 거리는 오히려 멀어진다. 유니클로, 자라, H&M 등의 의류 회사는 디자인에서 소매 판매까지를 일관된 하나의 계열로 조직해 효율성을 높였다. 이런 의류 브랜드들을 SPA브랜드(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Brand)라고 한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품 기획부터 소매 판매까지를 일관된 체계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시킨 이 브랜드들의 본사는 서구 선진국에 있고 생산은 지구 반대편의 주변부 국가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자가 눈에서 멀어지면 소비자의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코코아 열매를 보고 자기들이 즐기는 기호 식품의 최초 형태임을 알아보는 초콜릿 소비자는 드물다. 싸게 사서 부담 없이 입고 버리는 티셔츠에서 낮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짜내어진 주변부 여성노동자들의 피와 땀 냄새를 알아채는 소비자는 더 드물다. 붕괴 사고로 천 백 명 이상의 여성노동자가 사망한 방글라데시의 라나플라자는 SPA 브랜드의 옷을 제조하는 봉제 공장들이 가득 찬 큰 건물이었고 사망자들 대부분은 하루 2달러 이하만을 받던 저임금 노동자들이었다. 열대우림에 불을 지른 자리에 만들어진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된 환금작물들이 최종적으로 판매돼 얻어진 수익의 가장 큰 몫은 주변부 의류 산업 노동자의 저임금을 지불하고 남은 이윤과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선진국의 자본에게로 돌아간다. 피땀 흘려 작물을 생산하는 주민들은 ‘저임’과 ‘과로’는 물론 급등락하는 시장 가격의 위험도 고스란히 떠안는다. 생산과 소비의 겉으로 보이는 분리 밑에 놓인 흔들리지 않는 연결 덕분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 연결을 가치사슬이 라고 부른다.
생산과 소비, 노동과 향유, 도시와 농촌의 겉으로 보이는 분리는 사적 소유를 근간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결과물이다. 이 말을 역사적으로 설명해 보자. 자본주의적 산업화로 농촌은 도시로의 판매를 위한 식량 생산지가 됐다. 농촌 지역에서의 소비를 위한 생산은 의미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도시는 농산물을 소비하기만 하면서 판매를 위한 공산품을 생산한다. 그 생산을 위한 원료는 다시 다른 어딘가에서 공급된다. 게다가 대규모 공업 생산은 소비가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윤을 남기는 것이 생산의 근본 목적이 된다.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생산자들의 소비는 생산의 부차적인 목적이 된다.
도시와 농촌으로 나누어진 생산과 소비의 분리는 한 나라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생산은 전 세계에 걸친 연쇄적 과정으로 확장된다. 운동화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 전 세계 여러 나라, 지역의 노동자들과 자원이 동원된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우호적이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앞서 본 초콜릿, 티셔츠와 마찬가지로 주변부의 저소득 노동자들이 생산한 제품은 중심부의 소비자들에게 판매되고 그 이익의 대부분은 선진국에 근거를 둔 초국적 자본의 몫이 된다. 생산 과정에 노동과 자원을 제공하는 지역에게는 아주 작은 몫만이 돌아간다. 그 지역 안에서도 자원을 소유한 집단과 노동만 하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은 확대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노동은 대체로 가혹한 일이었다. 비생산적인 소비인 향유는 노동하지 않는 유한 계급의 전유 행위다. 그러나 유한 계급들은 자신들이 향유라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생산하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있고 그들의 통제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전통사회의 지배자들은 가혹한 혹사와 자애로운 보살핌을 번갈아 사용하며 생산자들과 향유자들 사이의 끈을 유지하려 했다. 전통 사회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은 축제 기간처럼 노동하지 않는 예외적 시간에만 향유할 수 있었다. 향유는 생산과 다른 종류의 인간 행위지만 생산 활동과 분리되지는 않았다. 농경 사회의 축제가 모두 농업의 순환주기 속에 있었음을 기억하자.
하지만 지배자들의 끈에 생산자들이 더 이상 묶여있지 않으려 했을 때 그 사회는 무너졌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열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상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만 향유할 수 있다. 그나마 이 소비도 여가 시간이 보장돼야 가능하다. 지배계급은 소비를 진작하기 위해, 그래서 자본이 이윤을 얻을 수 있도록 선심 쓰듯 노동 시간을 줄여 주고, 가끔 임시 공휴일도 지정해준다. 소액의 현금을 나눠주고 소비를 부추기는 일도 드물지만 있다. 소비를 자극해 생산을 활발하게 해야 이윤을 낳는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현대의 소비로서의 향유도 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둘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하고 연관성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할 수는 있다. 이런 생산과 소비의 외견상의 분리는 계급 사회에서는 언제나 일어난 일이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노동 현실의 민낯

노동 조건의 변화는 개인의 생계와 사회 안전망에 직결된다. 42만 원 등 기사 속 수치가 현황 파악의 기준점을 제공한다.

2
노동자 안전과 처우에 대한 파급

고용 조건의 변화는 임금, 안전, 생존권에 직접 영향을 준다.

3
고용 환경의 후속 변화

노동 시장의 구조 변화가 근무 조건과 안전 기준에 미치는 영향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후속 데이터가 추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