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자제 결혼식에 참석은 못 하고 계좌이체로 부조를 했다. 며칠 지나 답례로 책이 왔다. 얼마 전 타계한 김종철 선생의 저서였다. 소문을 듣고 구해보려던 참에 의미 있는 선물을 받은 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의 혼례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참에 잔치는 가족 친지끼리 벌이고 하객들은 멀리서 축하와 답례를 주고받는 조용한 결혼식으로 바뀔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과 소비는 물론 생활 자체가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근착한 문예지들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코로나 19 팬데믹에 대한 특집과 관련 작품들이 눈에 띈다. 인간 삶의 문제가 곧 문학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고 보면 이는 불안하고 불편한 현실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수용하느냐 혹은 그것으로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현상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문학적 대응의 시작일 것이다.
야비한 죽음의 파괴
누구나 나이 들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기 마련이다. 나 또한 어느 날 문득, 혹은 일상적으로 나의 죽음에 대하여 사유하고 때로는 그 방면에 대한 책을 읽기도 한다. 일테면 언젠가는 닥칠 죽음에 대하여 존재로서의 의미와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왔다. 노령일수록 외출을 자제하며 자가 방역을 열심히 하겠지만 운 나쁘면 어느 날 선별 진료소에서 음압병실로 실려 갈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바이러스를 만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음에 압도당하거나 만신창이가 되어 생환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전통적으로 노환이나 불가항력의 병마와 싸우다 패해도 죽음에 이르는 순서가 있었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지들과 위로와 고통을 나누는 이별의 절차이자 죽음의 양식을 말한다. 그러나 역병의 대유행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존재로서의 단 한 번뿐인 행사에 존엄은커녕 죽음의 세균을 내뿜는 생물체로 격리되어 가족의 애통함을 멀리하고 친지의 손도 잡아보지 못한 채 한 줌의 재로 가족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죽음의 양식이자 죽음의 파괴이다.
이것이야말로 문학도 상상하지 못한 문학적 죽음이다. 설령 코로나 19가 언젠가 종식된다하더라도 지구상에 현금 3천만 이상의 감염자와 100만에 가까운 유사한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인류로서는 이러한 죽음의 반란, 죽음의 저항, 그리고 사신(死神)바이러스에 대하여 사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은 원래 무자비하고 야비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가사의한 영역과 존재의 마지막 행사라는 권위와 존엄이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지금은 인간이 인간을 경계하며 자가격리를 하거나 고작 입을 막고 손을 씻는 일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종교란 무엇인가? 지극히 한국적 현실이지만 특히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세에 대한 그리스도로 자임해 온 기독교는 이웃이 환란을 당하면 이를 구원하고 위로해야 하는 것을 계명의 첫째로 삼는다. 그들의 주장대로 인류가 코로나19라는 종말적 처지를 당했다면 교회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구원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일부 교단 세력과 교회 공동체는 복음 대신 마이크를 잡고 종교를 정치 세력화하기에 바쁜 게 현실이다.
국가의 방역 협조를 신앙의 자유를 들어 거부하는가 하면 일개 목사가 국가 공권력을 희화화하거나 코로나19 확산을 종교를 탄압하기 위한 정부의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교단 전체에 비추어 보면 극히 일부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겠지만 일부가 전체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행태가 이단 혹은 이단적인 것일 수도 있다면 이에 대한 한국 정통교단의 입장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 문학은 종교문제에 대하여 혹은 한국의 보수 개신교에 대하여 진지하게 접근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안다. 서구문화의 토대이자 수 세기 인류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온 기독교 문화가 시멘트 교회의 크기나 신도의 숫자로 시장화되는 현상은 참으로 한국적이다. 여기서 한국적이라 함은 한국의 보수 개신교가 식민지배, 전쟁, 분단, 군사독재 등으로 이어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성장했으며,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재앙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마스크와 디스토피아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처하는 각국의 방역 방법이나 그 효과가 의미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대체적으로 개인주의가 발전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철저하게 보장받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이 방역에서 고전하는 반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이 효과적 방역상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대강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전자를 자유 경쟁 체제하에서 국가 공공의료가 실종된 신자유주의 폐해로 보는 시각과 후자를 국가 공동체의 위기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아시아적 순응주의나 민주주의의 후진성으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약탈과 식민지배로 근대를 쌓아 올린 서구와 대부분 식민 침탈과 권위주의 체제를 경험한 아시아가 공동체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 같을 리는 없다. 그리고 대륙 간의 누적된 문화의 차이와 사회적 전통이 같을 수는 없다는 데 대한 성찰이 필요한 문제이다.
한편 발달된 정보통신을 이용하여 감염자의 동선을 파악하거나 그것으로 대중을 관리한다는 것은 다분히 디스토피아적이라는 문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라도 개인의 경제활동을 제한하거나 사생활을 관리한다는 것은 국민의 자유권에 위배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재앙을 방지하기 위한 국가 공동체의 불가피한 조치를 빅브라더의 감시와 통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높은 수준의 시민 정신 혹은 수평적 개인들의 자발성으로 볼 것인가는 사후적으로도 논란이 될 것이다.
일례로 마스크를 사기 위하여 약국 앞에 장사진을 치는 국가들과 마스크 착용 지시를 인권 침해로 보고 시위를 벌이는 국가 간의 현상을 단순한 문화적 차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권이나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에 대한 국가의 침해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이 그것이다. 여하튼 인류는 코로나19 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이라는 자가격리 주의자
위에서 말한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발생한 현상에 대한 문학적 접근은 오히려 국지적 혹은 말단적 문제에 불과한 것이고 가장 본질적인 것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계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 산업과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대기오염이나 자연 파괴로 동물의 서식지를 인간이 계속 빼앗아 가는 한 지속적인 인수공통 감염병 등의 발생은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파리 기후협약에서 발을 빼듯 인류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좋은 벗들과 친교 하며 여행도 하며 즐겁게 사는 것은 노년의 희망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거의 일 년이 다 가도록 자발적 위리안치의 유배 생활을 하는가 하면 거기다가 마스크로 입을 봉하고 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게 다 지구를 더럽힌 죄다. 그리고 평생 국가나 사회에 대하여 불평이나 하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재난지원금을 차별 없이 받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기저질환을 가진 고령자이다. 무기력과 불안과 공포는 계속될 것이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그것의 끝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공부에 게으른 시인에게 자발적 위리안치는 얼마나 유익한 감옥이란 말인가!
이상국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했다. 1976년 《심상》으로 데뷔하였다. 강원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 등을 출간했다. 백석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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