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컬의 경계에서
1. 마을로 가는 길
전화기를 앞에 두고 망설였다. 한 번도 뵙지 못한 분께 불쑥 전화해서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는 청을 한다는 것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 인터뷰의 내용이 개인의 화려한 업적이나 자랑할 만한 거리가 아니라 마을의 역사와 기나긴 투쟁의 결과라는 점도 머뭇거림의 이유 중 하나였다. 누군가가 잠을 자고, 공부를 하며, 사랑을 나누고, 함께 이야기를 하며 꾸려나가는 공간을 불특정 다수에게 열어 보여 달라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공간이, 그들의 역사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빛 내지 희망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전화기를 들게 했다.
나의 예상과 달리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강직하면서 따뜻하였다. '대연우암공동체'의 '손이헌' 집행위원장이셨다. 찾아뵙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게 전하고, 약속을 잡았다. 마을을 찾아오기 힘들지 않겠냐는 말씀에 지도 보고 가면 된다고 씩씩하게 답을 했다. 대연우암공동체 커뮤니티에는 찾아오는 길이 상세히 안내되고 있었고, 나는 지도와 차편 등을 이미 프린트해 놓은 상태였다. 망설이며 주저하던 마음과 달리 나의 손과 발은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유엔 묘지에서 구 부산외국어대학교 방향으로 좌회전을 했다. 대솔한의원 옆길로 진입하니 좁은 골목길이 나타났다. 지도에 그려져 있던대로 백합유치원까지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유치원 입구를 지나가 원쪽에 작은 초소가 나타났다. 알록달록 페인트칠을 한 초소는 대인우와 공동체에서 방범용으로 만든 곳이었다. 초소는 부산외대의 관리원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나, 어두운 밤길 마을 주민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집은 생명입니다! 집은 인권입니다! 도시 빈민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현수막 옆으로는 작은 패널들도 여러 개 있었다. 생존권과 주거권에 관한 공동체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적어 놓은 문구들이었다. 천천히 문구들을 보고 있으려니 이곳이 부산시의 여타 마을과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초소에서 마을회관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오르막길이었다. 지난밤 비가 와서 그런지 길양 옆으로 심긴 나무들이 유난히 더 푸르러 보였다. 나중에 들은 설명에 따르면 가로수로 심긴 나무는 벚나무라 했다. 마을 주민들이 손수 심었다는 150여 그루의 벚나무는 벚꽃이 피는 봄이 되면 장관을 이룬다고도 했다. 봄이 되면 벚꽃구경하러 한 번 더 오라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회관 옥상에서 본 전경-왼쪽 길로 내려가면 마을 진입로가 나오고,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마을공원이 나온다.
길 한쪽에는 벚나무들이, 반대쪽에는 집들이 보인다. 대인우암공동체는 한군데 밀집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동에 걸쳐서 넓게 분포되었다. 파란색, 녹색 지붕들을 지나 골목길 끝까지 올라가자 마을회관이 나타났다. 무지개 색깔로 간판을 만들어 놓은 회관은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들어왔다. 회관 앞 공터에는 훌라우프를 비롯한 운동기구들이 놓여 있고, 하얀 페인트칠을 한 담장이 작은 공원까지 일렬로 세워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누군가가 정성을 들여 가꾸고 정리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회관 안에는 어르신 한 분이 청소하고 계셨다.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시간까지는 조금 남았다.
2. 철탑마을에서 대연우암공동체가 되기까지
한때 '철탑마을'로 불렸던 대연우암공동체는 부산시 남구 대연 4동의 189-2번지, 190번지, 1172번지 일원과 우암 1동 산 48번지 일대에 걸쳐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에는 대략 53세대, 130여 명이 사는 중이다. 주거인 중에는 대연우암공동체 활동을 하지 않는 분들도 계신데, 고령과 건강상의 문제, 주거권 투쟁 과정에서의 여러 이유로 참여를 포기한 경우이다.
마을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30, 40년을 거슬러 올라간 1970, 80년대부터이다. 건설 노동, 일용직, 식당일이나 건물청소로 생활을 꾸려나가던 이들은 치솟는 집값과 자녀들의 교육비, 생활비를 감당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자락, 즉 부산시 남구 대연동과 우암동에 걸친 산능선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당시 그 땅은 산림청과 국방부 소유의 국유지였다.
마을이 만들어진 당시에는 커다란 송전탑이 세워져 있었고, 곳곳에 쓰레기가 넘쳐났다. 물이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슬레이트 집, 판사를 지어 살면서도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 힘들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아랫동네에 사는 집에 사정을 해서 신기세을 빼왔어요. 그런데 한 집에서 전기선을 빼와 여러 집에서 사용하니 두꺼비집이 자주 내려가고, 비라도 오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전기가 끊기는 일도 있었지요. 집주인이 기분 나쁘다고 전기 코드를 빼버리는 일도 있어서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이옥순 부위원장(76)의 설명을 들으니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그려졌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전봇대를 설치하고, 부산시에 도움을 요청해서 각 가정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전기공사를 하였지만 수도 상황은 여전히 열악했다. 주민들은 직접 돈을 걷어 공사를 하였다. 아직도 1/3정도는 개인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서 이웃집에 들어가서 수도를 쓰고 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각 가정마다 물탱크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1990년 10월 26일, 예고·계고 없이 경찰과 부산외대 직원들이 열세집을 철거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주민들 대부분이 일을 하러 나가 집을 비운 낮 시간이었다. 이 일은 철거를 당한 당사자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사는 집이 언제, 어느 순간에, 소리 없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국유지로 알고 있던 땅이 2년 전인 1988년 부산외대와 지자체의 밀실야합으로 부산외대 사유지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부산시는 무허가집이지만 사람이 살고 있던 마을을 ‘주민 없음’으로 규정하였고, 부산외대는 이 지역의 철거를 감행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연, 우암 일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부산외대를 상대로 투쟁에 들어갔다. 아무리 사유지라 하더라도 엄연히 사람이 사는 주거지를,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와 허물어 버린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보장받을 수 있는 주거권을 침입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일주일간의 철야농성 끝에 11월 3일 남구청, 부산외대, 주민들은 철거된 열세 가구를 다시 지어서 살기로 협의하였다.
이 당시 상황에 대해 손이헌 집행위원장(59)은 부산외대 학생들과 지역 주민, 지역 언론의 도움이 컸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연대감 내지는 동질감이 그들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안타까운 것은 열세 가구를 다시 지어 살기로 결정한 협의 내용을 문서 없이 구두로 진행한 일이다. 당시의 상황을 문서화하였다면 이후에 진행되는 주거권 투쟁에서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입장을 좀 더 피력할 만한 위치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당시 남구청과 부산외대가 사유지이지만 그들의 주거권을 암묵적으로 허락했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 높은 교육을 받지 못한 주민들은 협의 내용을 문서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고 '말'로 결정이 나자 상황이 종결되었다는 안도감부터 느꼈다고 한다. 안타까운 상황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주변을 돌보는 일과 함께 발 디디고 있는 곳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도 귀를 기울였다. 주민연대를 결성하고 회장과 부회장, 임원진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까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자 주민연대는 활동이 정체된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짝을 이뤄 친목을 도모하지만, 큰 활동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일은 잘 없었다.
이후 2000년 1월, 부산외대는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명도소송을 제기하였다. 주민들은 정부, 청와대, 부산시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항의시위를 하면서 부산외대의 계획을 철회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0년 10월 명도소송에서 패하게 된다. 당시 조사기록에 따르면 주민들이 점유하고 있는 토지 면적은 5,000평이었다. 이는 집 면적뿐 아니라 마당 등의 점유 면적을 포함한 것이었고, 이 중 1,240평은 산림청 소유의 토지였다.
부산외대는 그 이후 부지의 협소함으로 건물 신축에 한계가 나고, 판단하여 2013년까지 남산동으로 학교를 이전하기로 재회한다. 이에 따라 대연, 우암 지역에 대한 계획은 미루게 되었다.
두 번의 커다란 사건을 계기로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김이 언제든지 철거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남구청과 부산시, 여러 정당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땅 주인이 부산외대이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 사이 부산시에는 재개발 지역이 늘어났고, 산복도로 르네상스를 비롯하여 마을 재생사업도 진행되었다. 많은 마을이 관의 주도 아래 새로운 사업들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대연, 우암 지역의 마을은 사유지에 위치한 무허가 집이기 때문에 부산시나 구청의 도움을 하나도 받을 수 없었다. 사정은 딱하지만, 국유지가 아니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는 답만 반복해서 돌아올 뿐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전에 만들었던 주민연대를 활성화시키기로 하였다. 다른 이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을 재건하고, 정비하겠다는 의미였다. '대연우암 주거대책 위원회'는 '대연우암공동체'로 이름을 바꾸었고, 바뀐 이름과 함께 주민들의 소속감과 연대의식도 나날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용산과 밀양, 부산의 덕
대연우암공동체 마을회관 모습 알록달록한 벽화와 간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포1구역, 연산7구역 등 다른 지역을 방문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의 고통을 넘어서서 다른 이들과 연대하고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삶을 통해 몸소 체험하고 각성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대연우임공동체'는 매달 15일과 30일에 주민 회의를 하며, 중간중간 임원 회의도 진행하고 있다. 마을 주민이 함께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회의를 열어 의견을 나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인 마을의 주거권에 대한 고민과 의견도 함께 나누고 있다.
주민들은 언제 강제 철거될지 모르는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 대연우암공동체를 중심으로 머리를 맞대었다. 무조건 부산외대에게 땅을 달라는 것도, 자신들이 이곳에서 살겠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부산외대 측도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자신들도 살 수 있는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결과, 대연우암공동체는 자조적 마을'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출자금을 모아 공동소유의 토지와 주택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개인이 집과 땅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전보다 사정이 나아진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힘든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어렵게 생활하는 이도 많다. 서로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자조적 마을'은 그러한 서로를 위한 공간이면서, 지금의 싸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지금 사는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지가가 저렴한 대연동 190-1부지와 가격대가 비슷한 대연동 189-2번지를 부산외대로부터 구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공동으로 땅을 구입하여, 공동으로 값을 지불하고, 주택을 세워 산 후,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기부하겠다는 뜻이었다. 마침 2012년 12월에 300명 이상의 회원이 필요했던 조합설립법이 5명 이상의 회원만 있으면 설립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다. 주민들은 '대연우암 사회적 주택협동조합'을 만들어 이 지역의 땅을 사서 공동체를 이뤄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출자금을 모으고, 장기 저리 대출 형식으로 (예를 들면, 이기 포함 20년 거치식) 땅을 구입하기로 한다. 하지만 매입을 추진하던 대여동 190-1 부지는 경사가 30도 이상으로 높아 부산시로부터 건축 허가 불가 판정을 받는다. 189-2번지의 경우는 산림청 보존지역이기 때문에 민간에게는 팔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게다가 추진 중이던 '사회적 주택협동조합'의 경우, 이전의 실적이 없기 때문에 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 주민들은 다시 의견을 모아 일반협동조합인 “대연우암 씨알 주택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주민들로 이루어진 조합원이 새 마을 공동체를 마련하자는 구상이었다.
2014년 3월, 부산외대는 대연동에서 남산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연우암 공동체가 있는 토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논의 선상에 올랐다. 부산외대 측은 “이전하더라도 향후 2, 3년간 해당 부지에 관한 계획이 수립돼야 공식적인 협조 사항을 밝힐 수 있다”는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지역에 대한 조사를 외부업체에 맡겼으니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부산외대 측이 마을 조성이 가능한 고가의 유휴지를 주민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이나, 시가 마을 건립을 위해 시유지를 장기간 무상대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어떤 것에도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주민들이 마을을 가꾸고 길을 넓히고, 수도, 전기공사 등을 하여 주변 환경을 개선한 점을 인정해달라고 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우암공동체는 부산외대나 부산시를 상대로 격렬한 투쟁이나 싸움을 하고 있지 않다. 주민들은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현재 대연 주거지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를 더 해가며 늘어날 것이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 만한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보이지 않는 싸움은 계속될 듯하다.
3. 공동체를 움직이는 힘
대연우암공동체가 특별한 것은 부산외대 사유지에 위치한 무허가 집이라는 점보다는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활동가, 이론가가 들어가서 주민들을 교육시키고 프로그램을 운영, 활동을 만드는 여타 지역과 달리 대연우암공동체는 철저히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집단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마을회관에 걸려있던 조직도였다. 기존의 조직도가 회장을 중심으로 피라미드 구조의 수직 형태를 이룬다면, 대연우암공동체의 조직도는 위원장 - 집행위원장 부위원장 - 총무 재무- 여성부장 등의 직함이 옆으로 뻗은 나뭇가지 모양으로 수평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위치에서 평등하게 맡은 바 일을 한다는 뜻으로, 직함에 따라 상하 위계관계를 나누는 관료 체제와는 다름을 의미했다. 공동체의 조직원이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고 만들어나가고자 하는가를 한 장의 조직도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직도 옆으로는 비상연락망과 마을 회관 당번명이 적혀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적어도 한 명은 반드시 회관에 머문다'는 원칙 아래 당번을 정해서 상주하도록 하였다. 내가 마을 회관을 방문했을 때 만난 어르신도 그 날의 당번이셨다. 하지만 텅 빈 마을 회관을 우려하여 정한 당번이 무색하게, 조금 있으니 4, 5명의 주민들이 회관에 들어왔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거나, 계획돼 있는 회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주민들은 자연스레 회관으로 모여 간식을 만들어 먹고, 화투를 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일상을 공유했다. 그 가운데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상담을 하기도 했고, 좋은 일이 있으면 축하를 받기도 했다. 몸이 아프기나 어려운 이이 있을 때면 멀리 있는 친척보다도 마을 주민이 먼저 생가났고, 주민들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회관은 공시기인 이이 기뿐 아니라 일상적인 모인, 소통, 오라, 휴식의 공간으로 사랑 반고 9다. 고층 빌딩과 콘크리트 건물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 이리한 공동체가. 부산시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을회관 내부-이제까지의 활동 사항과 조직표, 이달의 계획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대연우암공동체가 계속해서 존속, 유지될 수 이유는 이처럼 마을 사람들을 한 곳으로 응집시키는 장소와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회관은 사람들을 밀집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프로그램은 공동체가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대연우암공동체는 매달 2번, 15일과 30일에 주민 회의를 한다. 마을회관 당번과 2인 1조의 야간초소 당번을 정해서 주변을 관리한다. 매월 넷째 주는 마을 대청소 날로 정해서 길목과 화단, 공원, 주변을 자체적으로 청소했다. 분기별로 수련회 및 주민 자체 교육을 실시하며, 타지역과 도모해서 지원 사업, 연대 사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봄, 가을에 소풍을 다녀오고, 4월에는 진입로를 중심으로 벚꽃축제를 열었다. 2000년 10명의 인원으로 시작된 사물놀이패 '새날'은 공동체 안팎에서 열리는 행사와 집회에서 톡톡한 역할을 했다. 지역까지 명성이 자자해 인대집회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 다른 마을이 벤치마킹까지 하는 프로그램은 5개 반으로 조직된 '밥상 공동체'였다. 지리적 분포에 따라 10명 내외의 인원을 한 반으로 묶어서 소모임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한 달에 한두 번 모여서 밥을 먹거나 유흥을 즐기며 친목을 도모하였다. 담장 수리나 나무 벌목, 쓰레기 문제 등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모임에서 논의한 뒤 전체 회의의 안건으로 올리는 역할도 하였다. 이는 공동체 조직원의 친밀한 관계 형성과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기반으로 한 성공적인 조직형태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밥상 공동체는 다른 마을이나 공동체의 주요 모범 사례로 적용되고 있었다.
이처럼 대연우암공동체에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며,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활동들이 존재한다. 주민들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을 더 가지게 되며, 나와 주변을 한 번 더 돌보게 된다. 아무리 좋은 조직과 이념이 있다하더라도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그 조직은 존속될 수 없다. 얼굴을 마주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펼칠 때 공동체는 유지되며 발전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려 한다. 대연우암공동체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주택철거에 따른 대비를 위해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사람들은 마을을 꾸준히 이어나가면서, 공동체 자조주택을 짓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종잣돈 모으기에 들어갔다.
마을의 재정을 정비하고, 운영금과 출자금을 만드는 것이다. 우선 세대별로 월 1만 원씩의 회비를 걷었다. 각 가정의 사정에 따라 모든 집이회비를 내지는 못하지만 대략 70% 정도의 거출률을 보인다. 마을회관 안에는 노래방 기계가 있는데, 이에 따른 사용비를 받기도 한다. 또한 냉장고 안의 각종 음료수와 주류, 그 옆의 커피 자판기 등을 공판장 형식으로 운영하였다. 마을은 기존의 중앙 도로에서 한참을 올라와야 되는 산자락에 존재했고, 슈퍼마켓이나 가게 등도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야 있었다. 회관 안에 있는 공판장은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면, 수익도 가져다주었다. 또한 고칠이나 폐지, 재활용품을 수기해서 판매하였다. 재활용품 수거 판매금 역시 마을의 운영비로 활용되었다.
마을공원의 안내판 공동체를 유지하는 건 작은 약속을 지킬 때부터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은 마을 기금은 어떻게 쓰이는 걸까? 첫째로는 철거를 대비한 적립금 및 자조 주택 건설의 종잣돈으로 쓰인다. 이 부분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였고, 조직을 꾸려나가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두 번째는 마을 회관 운영비나 전기료, 수도료, 통신비 등으로 사용한다. 운영위가 출장을 갈 시 대외출장비를 지급하기도 하며, 다른 지역을 돕기 위한 성금으로 쓰이기도 한다. 벚꽃축제나 소풍, 마을 잔치 등에 따른 비용으로도 사용이 된다. 마을 회관 앞쪽에는 커다란 칠판이 있고, 그 위에는 현재 회계 상황을 정리한 전지가 붙어 있었다. 누구든지 마을의 재정 상태를 열람할 수 있게 장부를 정리하여 의혹이 생기지 않도록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 쯤 곁에서 듣고만 계시던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참 착해, 나쁜 길로 빠진 애들도 없어요.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잘 자랐어요. 이제는 학교 졸업하고 자기 밥벌이는 하면서 살아요.”
주거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비뚤어진 아이들이 나올 법한데, 그런 아이들 없이 다들 반듯하게 자랐다는 것이다. 일하느라 바쁜 부모님의 빈자리를 마을 주민들이 메울 수 있는 건 한 가족처럼 지내는 마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떠오르는 생각은 이 마을이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안정적이면서 활기차다는 거다. 그리고 그러한 마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라기보다는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헌신과 노력, 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 때문이었다.
4. 마을을 넘어 모두 함께 가는 길
오늘도 도시는 공사 중이다. 산을 깎고, 도로를 포장하고, 길을 넓힌다.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세우고, 리모델링을 한다. 세계사에서 국가가 탄생한 이후로 전쟁이 없던 날이 없다고 하는데, 도시가 탄생한 이후로 공사가 없던 날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싶다. 대한민국 곳곳에, 부산 여기저기에, 큰 도로든 작은 골목길이든 지게차와 레미콘 차, 굴삭기가 들어선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장비차들은 쉬지 않고 이동하며, 일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공사가, 재건축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고장 난 부분은 고치고, 깨진 부분은 수리를 해야 한다. 좀 더 편안한 삶을 위해 오래된 것을 정비하여 새롭게 만드는 일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소외당하고, 핍박받으며, 상처 입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공사로 인해 혜택을 받는 사람이 생긴다면, 공사로 인해 피해 입는 사람도 생겨서는 안 된다.
대연우암공동체의 상황은 특별하면서도 그리 특별하지 않다. 그곳은 도시가 계획 중인 공사 예정지이다. 오래된 곳을 허물고자 하는 도시의 계획은 예로부터 존재하였기에 그곳의 상황은 그곳만의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오래된 것을 허문다는 사실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게 된 점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오래된 것을 오래된 것 그대로 보존하고 가꾸면서 사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예외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 역시 지금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대연우암공동체가 있는 곳이 국유지 혹은 개인의 주기기가 아니라 대학교의 사유지라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는 이미 다른 사람의 땅을 불법으로 점거하면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타지역의 공동체 운동과 궤를 달리한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사유지에 집을 지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대연, 우암 지역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할 무렵 그곳은 국가 소유의 땅이었다. 그들이 사는 동안, 그들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인식한 정부에 의해 그 지역의 땅이 팔린 것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다른 사람의 땅에 살고 있으면서 무슨 말이 많냐고, 남의 땅이니 나가는 게 맞지 않느냐고. 그런 질문 앞에 대연우암공동체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다른 사람 소유의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집이 무허가지 사람이 무허가는 아니었다.” 자신들이 왜 이곳에서 살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말할 기회 정도는 주어져야 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도시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귀 기울이기엔 그것보다 크고 우렁찬 다른 목소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주민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는다면, 그 목소리들을 합쳐 다 함께 외치기로 결정했다. 개인이 공동체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다시 말했다. 우리도 살 수 있고, 땅 주인도 살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 보자고, 그리하여 그들은 장기계획을 세웠다. 협동조합을 세우고, 종잣돈을 마련했다. 협동조합 이름으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마을을 꾸려 갈 계획을 세웠다. 마을 가운데 주민회관을 세워 이전처럼 함께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이야기하길 원한다. 그곳에 가내 수공업장을 만들어 경제활동도 할 수 있길 꿈꾼다.
“살 주(主) 자가 아니라 주인 주(主) 자를 쓰는 주거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이니까요.”
인터뷰를 끝내면서 손이헌 집행위원장이 힘주어 했던 말이다.
대연우암공동체의 출발은 그리 좋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좋지 않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좋은 일들을 만들어나갔다. 사람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풀어나가길 원했다. 물론 그사이에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고, 어려운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민들 특유의 근성과 연대의식으로 헤쳐나갔다. 이것은 외부 활동가나 이론가가 투입되어 주입식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 결과 이뤄진 성과물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민들에 의해, 주민들을 위한, 주체적 활동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가진다.
2014년 부산외국어대학교는 남산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했다. 그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지불 했을 것이다. 더욱이 올해 초, 경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과정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학교 측도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기에 대연우암공동체가 있는 지역을 빨리 해결하길 원할 수도 있고, 다른 일로 인해 후 순위로 미뤄 놓을 수도 있다. 30년 전, 학교가 어떤 상황 속에서 토지 매입을 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땅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부탁을 한다면,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학교가 투기와 개발을 명목으로, 사람과 집을 해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 강의실에 앉아있는 수많은 학생을 위해서라도, 학교와 마을 주민들이 서로 웃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대연우암공동체의 싸움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하지만 그들이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은 투쟁이라기보다는 축제 같았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주변을 배려하며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불리한 상황을 긍정의 에너지로 돌파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들의 미래를 응원하게 됐다. 부디, 지금의 상황이 잘 해결되어 새로운 주거공동체가 탄생하는 순간을 우리 모두, 함께 볼 수 있길 바란다.
오선영
201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해바라기 벽으로 등단. greenz45@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