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됐든 평론가라서
작년에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마저 해보려 한다. 산발적으로 쏟아낼 수 밖에 없는 글이고, 여기에 대해선 당신의 너른 이해만을 바랄 뿐이다.
혹시 당신은 2016년의 어떤 풍경을 기억하는가?
강동호 제가 본격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면서 문단에 발을 들인 시기는 2009년인데요. 새삼 돌이켜보면 문단/평단의 분위기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요. (…) 문학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분명 호황기였던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 새로운 담론이 형성될 조짐이 보이지 않으면서 점점 비평적 활기가 사라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물론 강동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주니어 시스템으로 요약되는 당대의 비평 제도가 “선배 세대”의 글쓰기를 무한히 답습하며 정체된 끝에 '신경숙사태'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일련의 논리였을 테다. 그러나 2016년을 기점으로 '문단/평단'이 그동안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떠올려본다면 “비평적 활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섣불렀다. 82년생 김지영의 기록적인 판매 부수, 여성서사의 대중화와 ‘퀴어서사'의 가시화,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로서 SF를 향한 주목), 그리고 거기에 보폭을 맞췄던 무수한 비평들…….
혹시 당신은 2016년의 또다른 풍경을 기억하는가?
오혜진 과거에 붙들려 있는 분들은 자꾸 지금의 문학은 '죽은 문학'이라고 말해요. 특히 2000년대 문학의 작가와 독자들은 짱돌 들고 전선에 서본 적 없는, 그저 텍스트로만 세계를 간접 체험한 세대라는 거죠. 그게 1990~2000년대 문학이 자폐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이유랍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거 그만 쓰고 강하고 힘 있는 서사, 하루키에 대항할 수 있는 소설로 백만 독자, 천만 독자 만나는 게 문학을 살리는길이라는 거죠. 그걸 위해 '장편소설'이라는 양식이 특권적으로 선택된 거고요. 신경숙 표절 논란은 199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 문학 전반의 '타락'으로까지 의미화되고,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문학/비평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당연한 것처럼 제기됐죠. (..) 제가 보기에 한국 문학이 독자를 잃고, 고급담론으로도 대중 담론으로도 수용되지 않게 된 이유는 한국 문학의 '타락'이나 오염'에 있지 않아요. 오히려 새로운 지적·문화적 정동과 문제의식을 통해 갱신되는 이 사회의 변화에 기존 한국 문학/비평 담론이 거의 무관심하기 때문이죠.
오혜진은 '신경숙 사태'를 둘러싼 각양의 반응들에서 '운동성'으로 축약되는 1980년대로의 퇴행과 ‘자율성'으로 축약되는 1990년대로의 퇴행을 확인한 다음 양측에서 'K문학'이라는 시대착오적 욕망을 추출해냈다. 이에 따르면'한국 문학/비평 담론이 진정으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이 계도자를 자치하며 공소하게 반복하고 반복했던 '문학의 위기’나 ‘비평의 위기' 같은 수사적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총체성'의 복권을 꾀하며 야심차게 논의되었던 '장편대망론'이 관성적인 'K스러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 하고 말았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제도권 문학장이 몇몇 특수한 창작과 비평에 의하여 부흥할 수 있으리란 엘리트적 신념의 발로일 뿐이다. 한국 문학/비평 담론이 진정으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이성애자 선주민-비장애-남성-지식인' 중심의 기존 문학 체계에 스스로 매몰되어 새로운 지적·문화적 정동과 문제의식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무능한 재현 장치로 낙후되는 상황이다. 문학권력 비판자들이 한국문학의 흥망을 '변절과 타락의 서사'로 설명하며 감상성과 미문주의, 그리고 소녀 취향 운운하는 젠더화된 논리를 동원했던 때처럼, 혹은 거대출판 관련자들이 원론적인 이야기로 문학장을 탈정치화 하며 상업주의와 공모했던 이력을 부정하고 문학에 특권을 부여하는 명백한 기만을 저질렀던 때처럼, '한국 문학/비평 담론'이 사회의 변화에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며 “더 나은 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기준을 갱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장르화된 방식으로만 겨우 존재없다.
하면서 영원히 그들만의 은어로 남을 수밖에 오혜진의 이러한 논거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근거는 바로 '독자'다. 교보문고에서 공개한 성별/연령별 도서 판매 비중'에서 적실하게 드러나듯 현재 가장 발 빠르게 첨단의 지식과 문화를 소화하며 새로운 정치적 · 문화적 주체로 부상 · 활약하고 있는 20~30대 여성은 제도권 문학장의 거의 유일한 참여 주체다. 실제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평가받는 '문예지'가 독자의 열띤 응답을 받았던 경우는 20~30대 여성에게 유효한 사안을 특집으로 내걸었을 때뿐이었다. 결국 '문학의 대중성'과 '비평의 공공성'을 되찾는 방법은 제도권 문학장의 실질적인 독자 공동체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거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 영합”하는 데에 있다.
앞서 언급했던 제도권 비평장의 '소란'은 이러한 '독자적 전회'에 힘입은 바가 크다. 『82년생 김지영』에 말미암아 제도권 문학장으로 유입된 혐오에 반발하고 항의하는 이들은 문학과 삶이 관계하는 방식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길 요구했다. 이들은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자랑스레 천착해왔던 내용들, 이를테면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주제에 '진정성'을 앞세워 우는 남자에 대한 서사나 “민족의 여성화에 대한 공포와 민족의 남성화에 대한 열망”으로 자궁의 오염 같은 표현을 역사에 끌고 오는 서사 등을 거부했으며, 반대로 한국 문학이 오랫동안 폄하해왔던 내용들, 이를테면 퀴어나 장애 등 집단적 주체가 놓친 소수의 얼굴들이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시위(方成)하는 서사 나 비인간 행위자가 주동적으로 활약하며 기후 변화 같은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표상으로 바꿔내는 서사에 호응했다. 서사의학자를 자처하는 리타 샤론의 말마따나 '이야기'가 “삶의관념을 만들고 의미를 전달하는 원초적 방법”이라면, 그러니까 다종하게 만들어진 서사를 참고하여 하나의 사건이나 세계가 이해되는 것이라면, 제도권문학장의 독자들은 독서라는 매우 개인적 행위를 통하여 보다 좋은 '재현(representation)'이 예술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길 바랐던 것이며 나아가 보다좋은 ‘대의(representation)'가 사회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길 바랐던 것이다. 비평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독자들과 실시간으로 교류하며 이러한 의지를 '해석' 하거나 '보충'하며 자신의 몸피를 키워나갔다. 1996년에 태어난 평론가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독자와 비평이 서로에게 영향을미치며 양적으로 질적으로 팽창했던 순간이 한국문학사에서 있기나 했었나싶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상상의 공동체'가 문학을 통하여 다시금 구축되는 것처럼 다가온다. 2000년을 전후하여 제도권 문학장에 충격을 안겼던 가라타니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과거의 문학은 공감을 매개로 상상의 공동체(네이션)를 형성했지만 지금의 문학은 그런 과제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머지 단순한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자'로 거칠게나마 뭉뚱그려지는 어젠다 속에서 앞서 언급한 문학들은 요긴한 참고문헌이자 “연대체”를 결집하는 “래퍼토리"로서 효력을 보이고 있다. 소수자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문학이 호출되는 장면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다. 문학의 활기는 너무도 명명하다.
혹시 당신은 내가 김봉곤에게 어떠한 문장을 남겼는지 기억하는가?
김봉곤의 소설에 주요하게 나타나는 은닉과 폭로에 대한 열망은 사랑의 한 단면을 꼭 닮아 있다. 아무도 당신이 퀴어라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나만큼은 그걸 알고 싶다는, 그리하여 당신이 퀴어라는 사실을 사랑하고 싶다는, 내밀한 고백, 이제 (…) 그의 문장은 모든 것이 잠재태로 숨겨진 현재를 떠나 모든 것이 현실태로 드러난 과거를 향한다. (…) 과거에서 그는 사랑을 발견한다. (…) 당신을 열렬히 사랑했던 퀴어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그는 항변한다. 여전히 당신을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퀴어는 자기밖에 없다고. 그러니 당신이 퀴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겐 은닉하더라도 자기에게는 폭로해달라고, 폭로된 과거에 기대어 은닉된 현재를 해결하기. 사랑이 시간이라는 범박한 개념과 접속하는 순간.
바르트와 프루스트가 연상될 만큼 김봉곤은 퀴어의 생활(은닉/폭로)과 사랑의 모습(만남/실연/재회)을 시간(과거/현재)에 결합시키는 데에 집중해왔다. 김봉곤의 인물들은 대체로 '은닉' 된 상태로 ‘만남/재회한 '현재'에서 '폭로된 상태로 '실연한 '과거'를 떠올린다. 또한 그들은 섹스나 대화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모조리 톺아본 끝에 자신을 퀴어로 정립하게 만드는 정동들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갱신”한다. 자연히 그들의 비선형적인 복수의 생애는 연애하는 자신의 감정 구조를 자각하는데에 유일한 존재 목적이 있는 '신파' 처럼 “서정적이고 아련한 분위기”로 충만할 수밖에 없다.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아로, 시간을 “윤색하는 이러한 과정(퀴어링 queering)은 1인칭”의 형상으로 실현된다. 김봉곤의 인물들은 “시간의 경계를 타고 넘는 매혹적인 퀴어”인 자신이 바로 재현의 주체라 명시하며(인물(서술자) 실제의 작가와 유사한 특질들을 일관되게 표출하는데(서술자작가), 이러한 순차는 당사자성을 확보해내어 '현재'에 독자가 읽고 있는 '과거'의 감정을 '미래'에 소설로 쓰겠다는 “시제의 교묘한 장난”, 다시 말해 퀴어적 시간관의 실재성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오토픽션(autofiction)'은 이를 공고하게 지탱하는 형식적 토대로서 동원된다. '자기 자신'을 뜻하는 '오토(auto)'와 '허구'를 뜻하는 픽션(fiction)의 모순적인 결합에서 짐작되듯 오토픽션은 반 사실적이고 반-허구적인 방식으로 자서전과 소설을 넘나들며 '인물서술자작가'라는 포함 관계를 '인물 서술자작가'라는 등식으로 매끄럽게 변환시킨다. 김봉곤인 인물들이 패션부터 계절까지 자신을 조직하는 세편들을 과할 만큼 늘어놓을 때, 그들은 분명하게 실존하는 퀴어가 되어 시간에 관한 기존의 재현과 대의를 전복한다.
시간에 대한 미학적 점유와 거기서 파생된 '지독하게 세속적인 재현체계, 적어도 나에게 김봉곤의 소설들은 생경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놀라운 것이었다. 어쩌면 한국문학에서 가장 낯선 좌표에 안착한 이야기나 한국문학사에서 퀴어소설의 계보도를 그린다면 가장 빛나는 위치에 두어야 할 소설이라는 표현은 그리하여 가능했다.
시절과 기분에서 기원한 장문의 비평을 쓰면서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떤 감정을 어렴풋이 떠을렸다.
2020년, 그런 생활에 등장했던 'D'는 김봉곤이 불쾌감을 자아내게끔 자신의 서사를 별다른 가공도 거치지 않은 채 무단으로 인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해당 소설이 수록된 단행본을 출판한 창비(시질과 기분)와 문학동네(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는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했으며, 김봉곤은 당사자의 동의 아래 사적인 내용을 인용했으며 이후에 제기된 수정 요구에 적절하게 응했다고 반박했다. SNS를 중심으로 격렬한 논박이 오고가던 중 『여름, 스피드의 표제작에 등장했던 '0'이 자신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그제야 출판사는 펴낸 책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김봉곤은 사과문을 게시하며 문학 활동을 중단했다.
‘김봉곤 사태'를 통해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제기 됐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사안만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김봉곤은 정말로 잘못한 것인가. 타인의 서사를 문학에 담아낸 시도는 지금까지 많았는데, 어째서 김봉곤만 논란에 휩싸인 것인가. 소수자 문학의 기수로 조명된 작가가 정작 다른 이의 피해 호소에 무감하게 대응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적 대화를 그대로 가져온 일종의 표절을 저질렀기 때문인가. ② 신경숙 사태 당시 '문학권력'으로 지목됐던 '창비'와 '문학동네가 다시 거론된 것은 우연인가, 문학동네 편집자로 근무하던 김봉곤이 문학동네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을 받은 데엔 어떠한 결탁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③ 어째서 출판사는 '여성'인 D의 피해 호소와 '남성'인 0의 피해 호소에 다르게 반응했는가. 이것은 출판계의 불균등한 젠더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④ 도대체 비평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번 사태를 일찍이 예견하고 예방할 수는 없었는가.
지면의 한계로 음모론 수준의 사안은 건너뛰고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적어도 “인용의 무단을 판별하는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제삼자가 선명하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정황이 있다. 허나 김봉곤 사태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동안 김봉곤의 소설들은 퀴어라는 조건 아래에서 (…) 쉽게 판단 대상이 되거나 논의 대상이 되었 던 사랑을 대상화하지 않는 윤리적 소설로 지지되었다. 김봉곤의 미학성은 일정 부분과 일치했으며 작가 본인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타자화 없이 가능한 재현의 (…) 문법을 계발하려는 노력" 에 동참하려는 독자들은 김봉곤의 소설들과 행복하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연쇄라는 자신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하여 타인의 서사를 폭력적으로 절취한 이상, 심지어 당사자의 지적에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이상, 김봉곤의 미학성은 그저 하나의 기만으로 비추어질 뿐이었다. 대중과 평단의 기대감은 어느새 배신감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예견된 사태였을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자기에 관한 서사(auto-fiction)'는 곧 자신과 얽힌 타인에 관한 서사(allo-fiction)일 수밖에 없다. 비평의 형식으로 김봉곤에게 쏟아졌던 가학적인 주문들("더 고백해” “네 이야기를 써” “우리는 네가 궁금해” “네가 겪은 더 끔찍한 이야기를 해봐)은 사실상 타인의 서사를 착취하라는 요구였다. 문학사에서 오토픽션을 표방한 작품들이 어떠한 논쟁에 휘말렸는지 기억한다면 조금은 다른 각도가 일찌감치 나왔어야 했다. 일인칭 의 자기 서술과 '일인분의 실존적 선언 사이의 거리는 충분한지, 개별적인 경험의 실존성에서 유적 존재론을 도출하는 전략에서 '인용'과 적시는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는지, 자신의 시간(…)에 대한 확고하고 단정적인 소유욕으로 아카이빙의 서사성을 조정하는 과정은 건전하게 수행되는지 등등. 이에 대해 매번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부터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물어라도 봐야 하냐는 식으로 비평가가 항변하는 것은 스스로의 나태와 무능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비평가가 전문성을 갖춘 '직업'이라면 작가가 수차례 언급한 창작론에 어떠한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죗값이 있다면 그것은 비평적으로 순진한 나머지 작가로 하여금 추가적인 가해를 저지르게끔 부추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진정으로 참담케 했던 것은 출판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비평가가 연이어 쏟아내는 의아한 문장들이었다.
『문학과사회』 2020년 가을호에서 강동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결과적으로는 작가들을 위한 안전장치가 되어줄 수 있었을 비판적 목소리가 비평장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층위에서 마련될 수 있지만, 우선은 간략하게나마 최근 비평들이 내장하고 있는 문학사 비판의 역사철학적 인식 구조를 검토하자. (…) 90년대 문학주의에 대한 비판을 비평적 입각점으로 설정한 최근 비평들의 선명한 세대적 선 긋기 작업은, 80년대를 '정치의 시대'로 대타화 함으로써 '문학의 시대'로 나아가려 했던, 80년대와 90년대 사이의 역사적 단절을 선언했던 90년대 비평의 인식 구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 최근 비평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비평적 글쓰기 대상의 편중화 현상, 이전 세대 작가들의 작품들에 대한 담론의 부재 등이 과연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그것은 90년대 이후부터 관성화된 형태로 유지되었던 현장 평론 모델의 재생산을, 즉 '한국 문학의 '현재'를 통해 '미래'와 '새로움'이라는 텅 빈 기표를 향해 속도전을 벌이는 비평의 관행을 여전히 닮아 있다.
강동호에 의하면 '신경숙 표절 사건은 “한국 문학과 비평 시스템의 역사적 임계점을 가시화하는 상징적 징후였" 고, 문단 내 성폭력은 문학주의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던 기존 이념의 보편성과 유효성이 전반적으로 회의되기 시작했던 계기였다. 서두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이후의 시간엔 독자적 전회로 인하여 “문학적 주체론에 대한 물음이 본격적으로 재점화” 되었다. 여기서 강동호는 '문학동네 (구체적으로는 김건형과 인아영)가 주도한 그 이후의 비평이 “과거 비판을 통해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열겠다”는 세대론과 목적론으로 말미암아 속도전의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가설을 내 놓는다. 지식인 비평(가)에서 작가 비평(가)로 비평적 글쓰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서히 이행되면서 비평가의 역량은 얼마나 더, 잘, 많이, 빠르게 새로운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냐는 시험하에서 판가름 나는 것으로 바뀌었고, 문학주의의 통치성 아래 비판은 (….) 비가시적인 형태의 구성적 외부로 재배치되어 침묵으로 대신 되었다는 것이다.
2010년대 후반의 비평사를 정연하게 일괄하면서도 푸코의 개념을 가져와 제도권 문학장의 구조를 분석하고 새로운 이후의 비평까지 모색한다는 점에서 강동호의 평문은 탁월하다. 그러나 김봉곤 사태의 근본 원인이 세대론'과 '목적론'에 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어딘가 전가의 혐의가 있다. 최근의 비평가가 그토록 의욕적으로, 과거에 대한 “비판적 문학사”를 작성하며 “당대 문화에 대한 (..) 지형도 그리기에 몰두하는 까닭은 새로운 시대/세대의 문학을 주도하겠다는 권력 지향적 욕망에 있을까, 아니면 이전의 문학이 뿜어내던 K스러움을 향한 무한한 역겨움에 있을까. 혹자는 이러한 반박이 바로 세대론'과 '목적론'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강동호의 가설은 수많은 차별과 혐오가 횡행하는 사회 현실에 맞서 세계의 지배 서사를 바꾸려는 '생존적 글쓰기'를 어떠한 '전략적 글쓰기'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며, “구체적 양태”와 “창작 현장과 비평의 환경과 조건”과 비위 사건의 실체 여부, 에서 차이를 보이는 '이자혜 사건'을 참조해 그러한 글쓰기를 '속도전에 매몰된 미흡한 글쓰기'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게다가 “최근의 비평 담론”이 “1980년대의 민중 주체 → 1990년대의 개인주체 2000년대의 탈주체로 연결되는 변화와 전환의 큰 흐름에 결과적으로 동참하며 비평사의 지난한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하나, 그것의 결과로 문학주의가 재소환되어 비판이 사라진다는 추론에 대해선의문이 남는다. '문학주의적 통치성'을 “비판 없는 섬세한 독해”라는 “특정한 스타일의 글쓰기(…)를 하나의 유력한 모델로 인식하게 만드는 진실의 체계"로 이해한다면, 문학주의를 확립했던 1990년대의 비평과 구조적 상동인 2010년대의 비평에선 당대 문학에 대한 비판을 찾을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문학과사회 의 리뷰란만 펼쳐도 반례는 수도 없이 많다. “페미니즘 영웅 서사에서 내세워지는 여성의 가장 주된 가치가 여전히 돌봄과 양육뿐인지, 그럴경우 어떤 인식적 효과가 원치 않게 창출 되는지, 나아가 그 여성적인 것의 가치를 상쇄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미한 레즈비언십이 채택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종내 지우기가 어렵다는 점이 이 소설의 한계점인데, 그것은 여러 인물의사정과 욕망을 병렬함으로써 구조적 피해자로서의 여성이라는 단일한 존재 감각을 추출하여 연대의 구심점을 찾아가는 조남주식 여성 서사가 자주 봉착하는지점이기도 하다. “소설이 끝난 뒤에도 독자는 해언의 얼굴과 표정을 떠올릴 수 없다. 언급했듯 "레몬의 처음부터 끝까지 해언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잘못 누락된 것이 아니라 해언이 애초부터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은유로서 기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바로 그 지점에서 [소설은 애도에 실패하고 말았다. 소외된 자들로부터 터져 나오는 문제들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데이트 폭력,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특성으로 언급되는내부 식민지적 차별, 소설 내부에서 생물학적 남성으로 상정되는 전공투 및 줄리아나 도쿄의 여성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부적 (계급) 소외의 문제가모두 의미 있는 개별적 주제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소설에서 어떠한연관 관계를 지니고 얽혀 있는지, 그리고 각각을 소설에서 새롭게 해석하고자하는 것만큼 각 의미 층위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 있는가 하는 점은 확언하기어렵다. 『문학동네』를 펼쳐도 마찬가지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자신의 행태를 아보며 문학적 '회색지대'를 고집하는 작품들 또한 적지 않게 제되고 있다는 경향 자체는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다. (…) 공격과 심판을 받아 생계의 위험에 처하는 중년의 남성 선생들을 그리는 이 문학적 작업들은 지금 한국사회에 터져나오고 있는 여성의 성폭력 경험 고백과 미투 운동의 의의를 무력화하는 수사와 상응할 뿐 아니라 현실의 권력구조와 남성 동성 문화의 폭력성을 괄호 안에 둔 채 여성 인권과 퀴어 인권을 경쟁시키는 허구적 구도를 적극적으로 양산한다. 지금 화해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현재의 파열 자체를 직시하고 그에 감응하여 자신도 변화하려는 태도에서부터 가능할 텐데, 변하지 않는 가족의 기억에 의존하는 화해는 실은 불가항력적인 가족의 질서로 재귀하는 위태로운 봉합일 수 있는 것이다. 누나로 설정된 화자들이 돌봄의 대상을 추억함으로써 가능해지는 화해의 패턴은 그 대상이 온순하게 화자를 따를 때에만 환대의 자리가 마련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 결국 환대에 감동하려는 우리 시대의 준비된 열망이 충분히 안전해진 손님을 접대하는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초대장을 하필이면 어떤 퀴어에게 즐기 발송하는 어떤 문학장에게 문제를 반송해야 한다. 문학주의적 통치성은 이렇듯 철학적으로 연역된 모형이지, 실제적으로 귀납된 모형이 아니다. 강동호의 비판 부재서사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지만 여러 진실을 누락한 포퍼식 서사다.
무엇보다도 '비판의 부재'라는 지적이 다름 아닌 비평가로부터 발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미심쩍다. 자기비판의 성격을 띠는 글에 이렇게 묻는 것은 아무려나 저열한 일이지만, 그의 글쓰기가 내포할 수 있는 여러 위험성, 그중에서도 전도된 진정성과 나르시시즘에 짙은 의문을 품었으면서 어째서 그는 그것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공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어서 침묵했 던 것일까. '나'에 대한 아카이빙이 중층적이고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경험의 여러 측면을 재현하기보다 자기 서사의 일관성을 입증하려는 (사후적인) 소유욕에 장악되고 있다고 생각한 셈인데 어째서 “비평가들이 김봉곤 텍스트의 표절(혹은 무단 인용) 가능성을 미리 알 수있는 (의혹은 가능하더라도) 방법은 사실상 부재하다” 며 어떠한 책임을 면피하는 것일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특정 진영에 모든 잘못을 넘기는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만의 억측일까.
덧붙여 '비판'이 있었다고 사태가 다르게 전개되진 않았을 것 같다. 강동호의 말마따나 “주체화/예속화를 작동시키는 진실의 기제에 저항하고, 역사화하고, 상대화하려는 실천으로서의 비판, 즉 장치로서의 비판을 지속해서 발명, 했다면 김봉곤은 타인의 서사를 가져오는 글쓰기를 멈췄을까. '소수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요즘의 비평 담론은 인정 투쟁에 사로잡혀 당대 문학을 과도하게의미화한다 등등의 논지로 진작에 비판이 이루어졌다면 독자들은 김봉곤의 소설들을 피했을까. '오토픽션은 위험하고, 김봉곤의 글쓰기는 경계할 만하다. 수준의 비판을 제외한다면 어떤 것도 이번 사태를 예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구조에 관한 비판적 논의는 분명 제도권 문학장에 어떠한 결실을 선사하겠지만,그것이 만능 도구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허황된 공상에 불과하다.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에서 인아영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이렇게 반복되는 구조주의적 진단들은 소설가, 시인, 평론가, 편집자 등 출판 노동자와 문학장 전반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조에 착취당하는 희생양 아니면 구조와공모하는 부역자'라는 이분법적 폐쇄회로 안에서 영원히 맴돌게 한다. 우리는 아마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거나 둘 모두일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김봉곤사적 대화 무단 인용 사태' 이후 나 역시 한 명의 독자이자 비평가로서 텍스트에 재현된 대상과 소설이라는 장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성찰적으로 분석해야 할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텍스트의 문제를 현실의 다양한 층위에서 고려하고 비평의 연쇄적인 효과를 고민함으로써 함께 시스템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행위자로서의 반성도 크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 글에서는 충분히 다루지못했지만, 문학장 안팎에서 동료들이 제출해줄 논의를 배우고 의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인아영에 의하면 강동호는 최근의 문학비평에서 (...) 중요한 키워드인적이 없었던 “비평가의 세대를 한국문학 비평의 기본 단위로 상정” 하는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소수자 중심의 비평은 “천지개벽 미증유 현상"체럼 갑작스레 돌올된 것이 아니며 연속적인 영향 관계의 계보”를 따라 꾸준히진행되다 “세상의 시각이 달라" 져 가시적으로 육박된 것이다. 강동호가 “한국문학 비평의 제도적인 문제를 세대 구획을 통해 인식하고 젊은 비평가를그 구조의 핵심적인 증상으로 진단하고 있" 는 것은 그러므로 완벽한 오진인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박이 오토픽션 트러블이라는 특집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뜨악하게 다가오며,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봐도 김봉곤과 관련된 논의가전무하다는 사실은 더욱 뜨악하게 다가온다. 편집위원들은 출판사의 크고 작은 결정 사항들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하며 협력하는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 사태에 대해 발언해야 할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며 문제가 제기된 후작품과 이를 둘러싼 맥락을 충분히 사유하지 않은 불찰이 크다고 적었던비평가의 글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말이다. “푸코의 계보학”은 “역사를 분석할때 행위자의 주체성을 누락한다”는 막스 베버의 지적을 인용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견고한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불완전하고 미약한 수행"이며 거기서 산출되는 의미라고 인아영이 적시할 때, 자신의 작업을 부당한독해에서 구출하겠다는 욕망만이 감지되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그에게중대한 사항은 작품을 섬세하게 독해하지 못하여 가해 행위를 방조하고 말았다는 '반성'이나 피해자가 처했던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과'가 아니라 자신의 작업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절하할 수 있냐는 분노다.
강동호와 인아영, 혹은 문학과 지성사 편집위원과 문학동네 편집위원이 서로를 향하여 신랄한 비방을 날리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저토록 격앙되었나 궁금한 마음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높은 확률로 '비평적 헤게모니'일 것이다.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도모하고 비슷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보다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하는 것이 과연 김봉곤 사태를 겪으며 변화된/될 제도권 문학장에 유효한 것인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아직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머물러 있는 평론가가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실로 지난 수년간은 극심하고도 격심한 윤리적 쟁론의 시대였고 윤리가 정치가 되고 정치가 문학이 되고 문학이 윤리가 되는 폐쇄회로의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최근의 창작과 비평은 이 정치적 올바름에 의해, 한편으로는 세대 간 투쟁을 낳고 또 한편으로는 성별 투쟁을 낳았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대 내 '같은 젠더의 투쟁을 야기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런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이른바 퀴어 작가 김봉곤의 작품들을 둘러싼 ‘김봉곤 사태'라는 것이 불거졌다고도 판단할 수 있다. (…) 이 문제가 아주 복합적인 건, 김봉곤 문학이 박상영 문학과 더불어 일종의 대표적 퀴어 문학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의 문학은 그동안 '무조건적으로' 옹호돼야 한다는 정치적 필연성에 의해 많은 젊은 평론가들이 강하게 이끌려 왔다. 마치 어제까지 정치적 올바름으로 응당 취급돼야 하던 소설적 경향에 마가 끼어든 형국으로, 퀴어 문학 자체의 자동적 올바름이 그 내부로부터 파열되는 아이러니한 양상이나타난 것이다.
최근 들어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충분히 읽지 못해 올해 나온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과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고, 겸해서 조해진의 장편 단순한 진심과 정한아의 단편 술과 바닐라 같은 작품 정도만 간신히읽었으면서 어떻게 2020년의 소설을 결산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 한 작가를절필까지 시켜버린 '이상문학상 거부 사태'는 쏙 빼놓을 수 있는지 그저 궁금할따름이지만, 하여튼 방민호는 정치적 올바름이 현금의 문학을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중대차한 인류적 문제에 응답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총체적 문학이 어째서 융성해야 하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지만, 하여튼 그는 문학사란 결코 올바른 것들의 교체사인 적이 없으며 “그것은 문제 제기의역사”라고 말한다. '아웃팅'이 생존에 위협을 가할 만큼 차별과 혐오가 횡행한 지금-여기의 실정에 ‘퀴어'가 정말로 '올바른 것들인지, 오히려 '퀴어'야 말로 '문제 제기'는 아닌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지만, 하여튼 그는 이번 계기로 무조건적인 변호의 대상인 퀴어문학이 내파되었다고 판단한다. 동시대 비평에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혐오적 상상력을 경유하지 않고도 새로운 미학과쾌락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지 타진해보는 일련의 문학적 시도가 작가의개인사적 관심을 넘어서 시대사적 필연성에 연결되고 있는지 알았을 것같지만, 하여튼 그는 퀴어문학에 각별했던 무수한 비평이 정치적 올바름을 파기하는 맥락에서 발표 되었다는 사실과 한 작가의 잘못으로 지금까지 누적된논의가 폐기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손쉽게 무시하고 있다.
'바깥의 비평'이 소리 높여 외치는 비판 정신은 고고하고 아름다우며 윤리적이다.그 윤리적 요청을 따라 문학 시스템의 바깥으로 걸어 나가 독립적인 비판 정신을떨치며 사는 것도 가능은 하다. (물론 당사자만 자기 자신을 그렇게 여길 위험성은상존한다.) 불가능한 건 문학 시스템 내부에서 조금이라도 더 개선된 시스템을 만들기위한 실천 주체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비평가를 단지 출판사에 소속되거나 기존 시스템과 연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성이 손상된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그 주체들은졸지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해버리고 만다. 기존제도에 대한 변화를 주문하는 비판들이 그 안에서 무언가 변화를 도모하려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 판타지 무협 서사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포즈도 참고 읽기 민망하지만 더욱 실망스러운 건 개별 비평가의 정신과 의식 전환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구태의연함이다. 외람된 말이지만 나는 이 부분을읽으며 <가짜 사나이>의 몇몇 유행어가 떠올랐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타락하고나약한 비평가의 정신머리를 오랜 수련을 통해 독립적인 비평 정신으로 고쳐놓는데 있다면 “너 뭐야, 비판성 문제 있어” 라거나 4번 비평가는 문학주의야. 4번 비평가는 독립성이 없어. 4번 비평가는 문단밖에 생각하지 않아 같은 공허한 정신주의적 훈육의 언어만이 메아리칠 뿐이다.
모든 문제를 '권력'의 차원으로, 그것도 아주 일차적이고 일면적인 '권력' 의 문제로 접근하는 제도 비평은 구체성이 부족하여 “실질적인 대안의 마련에 무기력” 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적절하나, “모든 문제를 비평의 책임인 것처럼 받아안”는 것은 현실의 죄를(비록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하더라도) 자기의 책임으로 떠안아 스스로를 “문제 해결의 주체로 정립하는“모종의 주체화 과정”에 불과할 뿐이라는 항변은 적절치 못하다. 데이터를분석하여 제도권 문학장의 사회적 조건을 연구한 논문들이 말해주듯 비평에는 특정 작가와 작품의 상업성을 견인하는 힘이 있으며 자연스레 직업적인 책임감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비평가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야 한다" 는 신화를 깨뜨리는 과정에서 현재의 문학 체계를 순백의 색깔로 옹호하며 비평가에게 면제 특권을 쥐어준다면 그것은 명백히 기만일 뿐이다. 자율, 자립, 독립, 비판과 같은 덕목들에 대한 검증 요구를 기각하면서도 “문학 시스템 내부에서조금이라도 더 개선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실천 주체" 를 구상하고 싶었다.면 영점 바깥을 겨냥한 제도 비평의 허점을 비아냥거리며 비판에 대한 요청을무화시키기보다는 어떠한 책임이 비평가에게 일임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우리가 이후의 시간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면 그 이유는 '달라진' 우리가 달라진 비평을 하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해야 한다.
2021년, 항구의 사랑에 등장했던 '칼머리'는 자신의 서사가 낱낱이 공개되어 '아웃팅' 까지 당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해당 소설을 출판한 민음사는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했으며, 김세희는 모든 문제 제기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며 법적 공방을 예고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몇몇 추가 폭로가 나왔고, 그제야 출판사는 작가가 요청한 대로 해당 소설의 판매를 중지했다.
김세희 사태는 놀라울 만큼 김봉곤 사태와 닮아 있었지만, 세간의 반응은 잠잠했다. SNS는 격해지지 않았으며, 제도권 문학장은 태연하게 돌아갔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민음사는 2016년 이후 '비평가 중심'의 세계의문학을 폐간하고 편집자 중심의 릿터를 창간했다. 즉, 민음사의 한국문학은 비평가가 아니라 편집자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 비평가가 '칭찬' 하면 출판사가 홍보한다는 서사는 여기서 완전하게 무화되어 버린다. '온갖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여 특정 작가를 밀어주는 비평(가)'의 존재 역시 설득력 있게 통용되지 못한다. 신경숙 사태와 김봉곤 사태에서 촉발된 수많은 논쟁의 이면에 '문학권력론'이 전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김세희 사태를 둘러싼 기묘한 정적은 문학권력론'을 경유하지 않고는 제도권 문학장을 비판하지 못하는 어떠한 담론적 빈곤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2016년을 전후로 제도권 문학장은 상당하게 바뀌었고, '현실-작가 텍스트(와 그것이 발표되는 플랫폼) - 독자 현실'의 연쇄 속에서 어느 연결 지점에도 손쉽게 빗금이 쳐질 수는 없게 된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여전히 옛날의 허상을 부여잡고 지금-여기의 창작과 비평과 출판과 독자의 상황을 외면한다면, (의학적인 표현으로) 올바른 진단은 불가능하며 올바른 처치도 불가능하다. 어떠한 변화가 실질적으로 도래하길 꿈꾼다면 한때 문학의 외부라 여겨졌던 요소들을 다시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항구의 사랑』을 읽고 나서야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떤 감정을 사랑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스스로를 정체화할 수 있었던 것은 문제가 되었던 작가의 소설을 통해서였다.
이것은 기나긴 서글픈 고백이다.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위하여 난망하겠지만 노력해보겠다. 그러니 당신도 의심을 잠깐만 거둬 달라. 다시 믿어 달라.
한설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aykal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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