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하는 몸

 

조선정

 

1. 퀴어 이론과 비평

 

코로나19) 펜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국가, 계급, 성별, 인종, 지역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불평등을 목도하고 있다. 백신 공급의 구조적 격차에서도 드러나는 세계 질서는 다시금 불평등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영속화하는 듯하다. 기후 위기와 맞물린 펜데믹 재난 시대는 세계에 대한 더 나은 해석,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비평을 요청하는데, 우리는 어떤 실천과 사유로 응답할 수 있을까?

 

다소 거창한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최근 공정, 혐오, 차별, 평등의 의제가 일상적으로 공론장을 주도하는 현상을 떠올려보면 분명 우리는 어떤 삶의 질서를 추구할 것인지를 열렬하게 질문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공론장이든 누가 입장하여 말할 수 있고 누가 그럴 수 없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누가 무엇을 말하는가 못지않게 누구의 목소리는 왜 들리지 않는지를 계속 살피는 것은 '' '''우리'라는 호명이 결코 자명하거나 완결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치열한 가치 논쟁의 저변에 단순히 세대 갈등으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어떤 근원적인 질문들이 조밀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이다. 주체()와 권력의 관계, 보편과 차이의 딜레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길항, 다문화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그늘, 희망과 원한의 역설 등등, 모더니티의 한계를 둘러싼 크고 작은 질문들 말이다.

 

물론, 여기에 섹슈얼리티 주제도 빠지지 않는다. 이 주제가 특히 까다로운 것은 인종이나 계급과 다르게 섹슈얼리티는 은폐와 규제의 이중적 고리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종이나 계급과 중층적으로 교차하므로 섹슈얼리티에 관한 지식은 고도로 복잡하고 정치적으로 두터울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근대 주체의 구성을 섹슈얼리티가 긴밀하게 매개한다는 것은 이제 비평 이론 분야에서 상식에 속한다. 19세기 말 성과학과 정신분석에서 시작하여 최근의 트랜스 이론에 이르기까지, 섹슈얼리티와 주체의 연구는 본질주의와 결정론의 잔재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점철되어왔다. 섹슈얼리티가 소거된, 투명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주체는 없다는 합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섹슈얼리티가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을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으로 포착한 90년대 미국 중심의 퀴어 이론은 수행성에 내재한 탈구의 가능성을 조명함으로써 정체성 정치 이후postidentity politics 탈주체 비평의 총아로 떠올랐고 지난 삼십 년 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이 글은 섹슈얼리티 담론이자 주체담론으로서 미국 퀴어 이론이 도달한 비평의 지평을 조망하면서 핵심적인 쟁점들을 제시한다. 세계에 대한 더 나은 해석,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비평적 개입으로서 퀴어 이론의 쓸모와 의미를 성찰하는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먼저, 퀴어 이론의 도래 이전 섹슈얼리티 담론과 주체 담론이 놓여 있던 지형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섹슈얼리티는 전통적으로 의학과 과학의 영역이었다가, 20세기 초반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의 세례를 받았고, 20세기 후반에는 페미니즘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의 여성 억압을 성 정치(sexual politics)로 이론화하는 동안,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1이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구성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하여 섹슈얼리티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푸코에 따르면, 호모 섹슈얼리티는 동성 성행위에 얽힌 복잡한 관계성과 사회성의 맥락을 통칭하는 단어였다가, 1870년경 현대적 의미의 게이 정체성을 범주화하는 용법으로 진화한다. 호모 섹슈얼리티가 비정상적 개인의 일탈로 규율당하는 과정에서 어떤 지식의 테크놀로지가 동원되어 섹슈얼리티를 지식 대상으로 재조직하는지가 그의 관심사이다. 그가 쓰는 성의 역사는 다분히 게이 섹슈얼리티를 특권화하는 면이 있지만, 섹슈얼리티가 고유한 정체성으로 인격화되는 과정에서 근대 주체의 섹슈얼리티가 에로티시즘과 같은 관계성의 윤리를 상실한 채 부르주아 합리성에 기반한 '도덕'의 차원으로 치환된다는 통찰을 제시하는 점에서 퀴어 이론 안팎으로 여전히 소진되지 않은 영감의 원천이라 할 만하다.

 

페미니즘과 푸코를 토양 삼아 퀴어 이론의 얼개가 구축되었다는 말은 '기원'에 대한 설명치고는 꽤 느슨하게 들린다. 이론의 기원을 쓰려는 시도는 무망하기 십상인데, 퀴어 이론의 역사 쓰기는 자못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뒤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퀴어 이론은 단지 퀴어로 호명되는 소수자를 위한 이론이 아니라 정체성을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근대 체제를 비판하는 비평이며 그런 점에서 근대 체제의 산물로서의 역사 쓰기에 내재된 모더니티의 진보적 시간관을 비판한다. 퀴어 이론의 기원 서사는 자의적이고 불완전할 뿐 아니라 자기 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기원 또는 텔로스telos에 대한 회피 또는 침묵이야말로 퀴어 이론이 비평으로 작동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2. “퀴어의 시간, 퀴어의 순간

 

페미니즘과 푸코의 토양을 전제로 퀴어 이론의 구성요소를 조합하다 보면 1990년을 흥미로운 변곡점으로 주목하게 된다. 우선 그해 처음으로 퀴어 이론을 제목으로 내걸고 학술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퀴어 이론의 교과서 반열에 오른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Gender Throubile 과 이브 세즈윅의 벽장의 인식론 Epistemology of the closet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석 달 간격으로 세상에 나왔다. 또한, 동성애 운동 단체인 퀴어 네이션Queer Nation이 창립되었다.

 

그해 학술대회를 기획한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당시 레즈비언 게이 연구가 성차(sexual difference)를 분석하는 이론으로 발전하기를 멈추고 차이를 원래 있던 것처럼 다루며 그 차이의 병렬식 나열로 성차 분석을 대신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당시 레즈비언 게이 연구는 이십여 년의 역사를 가진 분야로서, 진보적 사회운동의 열매였다. 1969년 스톤월 항쟁 이후 게이 해방운동이 가시화되었고, 페미니즘 내부에서는 레즈비어니즘이 (때로는 급진주의로 때로는 분리주의로) 균열을 일으키면서 페미니즘들로 분화했다. LGBT라는 용어가 통용되던 80년대 후반, 레즈비언 게이 연구는 정체성 정치에 올라탄 주체 이론이자 80년대 에이즈 위기에서 동성애 혐오와 투쟁하는 실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레즈비언'이나 '게이' 개인의 정체성을 부각하는 접근법으로는 근대 주체로 통합되지 않는 차이의 타자성이라고 할 성차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드 로레티스의 이런 지적은 레즈비언 게이 연구의 제도권 진입이 노정하는 역설을 함축한다. 드 로레티스가 이십 년 후 회고담에서 레즈비언 게이 연구가 단일한 학문으로 동질화하는 흐름에 거슬러 퀴어 이론을 제안했다고 술회한 것 역시 이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퀴어 이론은 20세기 중반부터 동성애()를 비하하는 배제와 낙인의 단어였던 퀴어를 과감하게 전유하는 탈환의 기획이다. 한마디로 정상 체계에 대한 반대로서의 퀴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퀴어 네이션의 상징적인 구호인 "We're here, we're queer, get used to it”은 더 이상 이성애 중심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살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한편으로는 정체성 정치가 동화(assimilation)의 테크놀로지가 되는 것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이션'에 내장된 근대국가의 영토 이미지를 환기함으로써 소수자화/게토화에 저항하는 이중 전략은 꽤 영리해 보인다. 퀴어 이론은 공사 구분에 기초한 근대국가의 규범 체계가 보편을 표상함에도 전혀 보편적이지 않고 선별과 배제의 원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폭로하되, 규범 체계에 포섭되기를 지향하는 대신 보편성 자체를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지를 질문한다. 이성애 문법을 세계의 밑그림으로 전제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모두를 위한 공적 공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퀴어 정치는 주류 편입과 인정 획득으로 끝나지 않을 지배 체제와의 싸움을 지향하며, 그런 점에서 정체성 정치를 사회 재통합의 근거로 포섭하려는 다원주의적 기획과 반목한다.

 

무엇보다 퀴어 이론은 에이즈 위기가 남긴 트라우마에 대한 응답이자 더 오래된 혐오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애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소수자 정치의 흐름에서 비약한 면이 있다. 에이즈 위기를 지나 살아남은 이들에게 멈춤과 슬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은 퀴어 공동체를 규합하는 정서로 증폭된다. 에이즈 위기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동성애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쾌락이 죽음을 부를 수 있다는 깨달음의 충격은 이른바 '안전한 섹스' 같은 것으로 봉합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통해 섹슈얼리티 담론이 스톤월 항쟁을 기점으로 한 진보적 역사 쓰기의 문법으로부터 이탈할 가능성이 열렸으며, 나아가 섹슈얼리티 담론이 감정/정동의 영역과 교섭할 가능성이 열렸다. 이후 애도가 공동체의 기억과 역사를 다시 쓰는 문화적 실천으로 적극적으로 해석되고,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과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차이가 재평가되는 방향으로 퀴어 이론의 확장이 이루어진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퀴어 이론이 정체성의 물화를 비판하고 동화의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며 에이즈 위기를 둘러싼 폭력의 문제를 성찰하는 동력으로 부상한 데에 80~90년대 미국이라는 시공간의 구체적 역사성이 결정적인 만큼, 퀴어 이론은 미국학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갖는다. 그것을 전제로, 좌파의 통찰을 빌려 비평을 시대의 투쟁과 소망에 대한 자기 이해"로 정의한다면 적어도 퀴어가 미국의 90년대 비평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세즈윅이 퀴어의 시간, 퀴어의 순간'이라고 환호했던 90년대 초반, 가장 낙관적인 퀴어 이론가 중 하나였던 마이클 워너는 퀴어가 개인의 정체성의 표지이기를 넘어 가족 구성, 군대, 소비, 계급, 재생산, 건강보험, 교육, 직업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고 논평한다. 말하자면, 퀴어는 주체의 관계성, 사회성, 정치성을 드러내는 구성적 외부로 작동하면서 이 사회에서 주체가 생산되는 방식을 말해주는 개념적 틀과 같다. 퀴어 이론이 주체 담론으로 유용한 것은 특정한 정체성을 식별하고 분류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계속 질문하고 성찰하기 때문이다. 퀴어 이론은 새로운 앎을, 오랫동안 앎의 특권적 지위를 누려온 서구 형이상학과 과학과 정신분석과 역사학이 알려주지 않았던 종류의 지식을 생산한다. 퀴어 이론은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는 지식 생산의 기제이자 근대 체제의 헤게모니를 비판하는 정치학이라는 이중의 쓸모를 가진다.

 

3. 퀴어 이론과 그 불만: 섹슈얼리티와 정치 사이

 

드 로레티스는 퀴어 이론 학술대회 후 사 년이 지났을 때 퀴어 이론이 "출판계가 쏟아내는 공허한 개념 놀이로 재빠르게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레즈비언 게이 연구의 전철을 밟기라도 하듯이, 퀴어 이론의 제도화에 묻혔던 질문들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퀴어 지식과 퀴어 정치학은 기존의 레즈비언 게이 연구가 도달한 지식 생산과 사회운동의 지평을 얼마나 넘어섰는가? 퀴어이론의 정치성은 정작 퀴어 범주를 구성하는 핵심 준거인 섹슈얼리티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가? 노골적으로 체제 이탈을 선동하는 듯한 퀴어 이론이 뜻밖에도 '단지 문화적인' 국면으로 퇴행하는 것은 아닌가?

 

퀴어 이론이 섹슈얼리티의 구체성을 억압한다는 비판의 선구자는 리오버사니이다. 그는 에이즈 위기 이후 섹슈얼리티가 거의 범죄화되었다고 진단하면서, 그 부정적 의미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에는 반대한다. 섹슈얼리티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에 있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를 아무리 도덕과 구원의 서사로 만들어도 마조히즘의 의미를 봉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섹슈얼리티의 가치는 그것을 구원하려는 노력의 진지함을 비하하는 데에 있다. 그에 따르면, 특히 호모섹슈얼리티는 모든 차이를 집어삼키며 증식하는 자본주의 욕망 구조에 저항하는 '같음(homoness)'을 욕망하므로 부정적이고 반규범적이고 일탈적인 속성을 끝내 벗어날 수 없다. 그는 퀴어 이론이 섹슈얼리티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정치적 수사로 경도된다면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데에 실패하고 마는) 흔한 부르주아 휴머니즘과 계몽주의에 투항하는 결과가 되리라고 끈질기게 비판한다. 퀴어 이론의 대중적 소구력은 두루뭉술한 급진주의 그리고 그 급진적 제스처가 섹슈얼리티에 대한 침묵과 무지를 방조한 덕분이다. 껄끄러운 문제를 모른 척하거나 회피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퀴어 이론은 일종의 탈게이de-gay 경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퀴어 이론의 대중화를 통렬하게 비판한 버사니는 역설적이게도 퀴어 이론의 핵심 테제인 부정성, 반규범성, 반사회성의 근원적인 영감을 제공한 비평가로 남아 있다. 그는 '동성애자는 좋은 시민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정상성에 대한 강박을 심문한다. 물론 그의 관심사는 부정성 자체를 일반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좋은 시민'이라는 범주가 섹슈얼리티를 탈각한다는 일관된 비평을 관철하는 데에 있다. 사실, 퀴어 이론의 폭발력은 이성애 사회를 표준으로 만드는 정상화 기제를 폭로하고 퀴어 하위문화를 가시화하는 쾌감에 기댄다. 객관적인 기준처럼 여겨지는 규범 체계는 실상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성애 규범성(heteronormativity) 이다. 그것은 이성애를 일관성 있어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특권적으로 보이게 하는 제도, 이해 구조, 실질적인 경향을 총칭한다. 세즈윅을 인용하자면, 이성애 체제는 상속, 결혼, 가문, 가족, 가정, 인구 같은 단어의 제도적 가명이자 역사 그 자체로 행세한다. 이런 비판에는 이성애 규범성의 실질적인 작동에 어떤 배제의 논리와 규율 권력이 개입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규범성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겹쳐 있다. '좋은' 시민과 '나쁜' 시민의 구분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시민'이란 무엇이며 그 범주가 왜 필요한지를 물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성애 규범성은 이성애여서가 아니라 규범성이어서 문제 아닌가.

 

그렇다면, 이성애 규범성의 반대항이란 애초에 성립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성애 규범성의 대립항이 아니라 종속변수로서 동성애 규범성(homonormativity) 개념이 성립 가능하다. 이것은 '자부심 넘치는 소수자 주체가 자본, 소비, 가정의 가치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추종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문제는 동성애 규범성이 퀴어 이론의 백래시로 작동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퀴어 이론이 주체 담론으로서 가진 한계를 파고든다는 것이다. 예컨대, 동성 결혼 합법화 투쟁에 드러나는 정상 가족에 대한 선망이라든가 대기업의 후원에 따른 프라이드 축제의 상업화를 동성애 규범성의 틀에서 비판한다면, 가정의 행복과 소비의 만족을 누릴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넘어 정확하게 무엇을 비판해야 할까? 주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상상력은 국가와 시장을 정체성과 권리와 행복의 합법적인 분배자이자 문제의 (원인이 아닌) 해결사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경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정적 프라이버시, 자유시장, 애국주의라는 체제로의 접근성"을 획득한 '건강한' 시민 되기의 텔로스에 복속되지 않는 주체의 차이, 몸과 자유와 평등과 공동체에 관한 새로운 이해는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을 퀴어 정치에 어떻게 기입할 수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나온 호모 국가주의(homonationalism)는 퀴어 이론이 주체화와 국가주의 환상에 유착하는 문제를 적확하게 비판한다. 성소수자를 '애국 시민으로 포용하는 호모섹슈얼리티와 미국 국가주의의 공모"는 퀴어 수사를 동화의 이데올로기로 소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보편 인권과 진보 이념의 잣대로 전용하는 사례를 예시한다. 이로써 '퀴어 네이션' 미국은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이성애 가부장제 국가를 계몽할 명분을 선취한다. 퀴어 선진국과 비/반퀴어 후진국의 위계를 강화하는 호모국가주의는 '백인이 유색인종 남성으로부터 유색인종 여성을 구출한다고 표현했던 서구 제국주의 페미니즘 각본을 '백인이 유색인종 이성애자로부터 유색인종 퀴어를 구출한다'로 바꿔 쓴 전형적인 제국주의 문화정치를 보여준다. 이는 국지적 지식을 보편적 지식으로 전치하는 유구한 미국 예외주의의 연장술이다.

 

앞서 정리했던 바,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는 지식 생산의 기제이자 근대 체제의 헤게모니를 비판하는 정치학이라는 퀴어 이론의 이중의 쓸모는 내부로부터 모순과 착종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앎을 약속한 퀴어 이론이 섹슈얼리티를 더 많이 말하지 않고, 근대 체제를 떠받치는 이성애 규범성을 비판해야 할 퀴어 이론이 안으로 동성애 규범성에 고착되거나 밖으로 호모 국가주의를 선동하는 등 '미국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퀴어 리버럴리즘으로 개념화되어 의심과 견제와 비판을 받아왔다. 이성애 규범성의 질서가 어떻게 재생산되고 유지되는지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동시에 그 비판이 퀴어 리버럴리즘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으려면 퀴어 이론은 스스로 퀴어링(queering)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4. 부정성 테제와 실패할 자유

 

퀴어링의 전략 중 하나는 시간성(emporality)을 질문하는 것이다. 리버럴리즘의 시간성은 미래의 약속에 열려 있다. 더 많은 권리와 자유와 행복을 약속하는 진보의 꿈은 끝없는 결핍에 우리를 결박시킴으로써만 지속 가능한 체제이기도 하다. 부정성, 반규범성, 반사회성 테제를 천명한 미래는 없다(No Future)에서 리 에델먼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인과관계의 일직선으로 연결한 이성애 시간관을 전제하는 인식론을 재생산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 또는 미래 지배 체제 (Futurch)"라고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미래주의의 시간성은 자본주의, 국가와 제국, 친족과 가족이 단절 없이 영속하리라는 믿음을 발판으로 하므로 언제나 어린이를 정상적인 삶의 질서의 수혜자이자 수호자로 표상한다. 사실, 부정성은 사회성이나 관계성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다. 파괴를 목적으로 삼거나 사회 변화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부정성은 상징계 질서에 이미 스며 있는 구성적 외부로서, 그 질서가 순수하고 일관되고 정연하게 작동한다는 믿음에 균열을 낸다. 문제는 부정성이 모든 것을 이성애 규범성으로 환원하고 그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 또 하나의 총체화 기획으로 경도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에델먼이 비판하는 어린이라는 표상은 무조건 이성애 규범성의 총화이기만 한가? 어린이에게 퀴어의 가능성은 원천봉쇄되어 있는가?

 

총체화가 봉착한 또 다른 문제는 부정성 논쟁에 참여한 주디스 핼버스탬이 합당하게 지적하듯이 지나치게 협소한 아카이브에 있다. 부정성 이론이 몇 명 안 되는 총애 받는 정전 작가가 기록한 특정한 범위의 정동 반응을 토대로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호세 무뇨스는 핼버스탬보다 더 솔직하게 부정성을 백인 게이의 최후의 보루'라고 전격 비판한다. 나아가, 부정성 아카이브의 편집과 확장을 제안한 핼버스탬의 절충적인 입장과 거리를 두면서 부정성에 탐닉하는 정서를 퀴어 유토피아니즘으로 전환하기를 모색한다. 그는 퀴어란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를 거절하는 것이고 다른 세계의 잠재성(potentiality) 또는 구체적 가능성(concrete possibility)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른 세계의 시간성을 텔로스가 아닌 '약속'으로 설명하면서 그는 목적론적 유토피아를 답습할 위험을 피해 간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약속을 실현하려면 우리는 약에 취해야 한다라는 파격적인 주체론을 내놓는다. 자아를 벗어나는 시간, 인과성이 파열되는 시간, 약에 취하는(ecstasy) 시간에 바로 퀴어 미래성(queer futurity)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정성의 편집과 확장을 모색하는 부정성을 폐기한 자리에 유토피아니즘을 두든, 그 방향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도 퀴어 주체의 수행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닮은 데가 있다. , 이들은 퀴어 주체가 이성애 규범성과 맺는 관계가 반대, 저항, 적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른 종류의 관계성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한편으로는 부정성이 그 자체로 일반적이고 총체적인 명제가 되지 않도록 구체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와 성공의 수사가 아닌 퇴행과 실패의 감각을 새로운 관계성의 자원으로 끌어올린다. 이런 접근은 지난 십여 년간 생산된 퀴어 지식의 가장 뛰어난 성과를 대변한다. 이는 부정성을 일반적인 기율로 총체화하는 것보다 부정의 감각과 정동의 결에 세밀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훨씬 생산적이고 또 정치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정의 감각과 정동의 결에서 생산적이고 정치적인 무엇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 생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지 미리 알 수 있다고 전제하지도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부정성이든 유토피아니즘이든 그것이 생산적이고 정치적이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대로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못하고 실패하더라도 거기서 이 세계와 맺는 새로운 관계성과 새로운(부정적) 감정의 투여가 이루어지는데, 텔로스와 무관하게 이것은 주체를 살아가게 해주기 때문에 너무나 소중하다.

 

바꿔 말하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행복을 얻을 필요는 없다. 이런 관점은 미국 퀴어 이론의 주류에 속하지는 않으면서 부정성 테제와 퀴어 리버럴리즘을 천착해온 영국의 퀴어 페미니스트 비평가 사라 아메드가 행복 각본에서 이탈한 정서 이방인(affect alien)”이 느끼는 불행할 자유를 설득하는 논리와 깊이 공명한다. 물론 불행할 자유가 강요되어서는 곤란하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누구의 의무도 아니며 역사의 텔로스도 아니다. 행복과 불행을 포함하여 퀴어가 세계와 맺는 다양한 관계성과 감정과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열린 대화가 더 많이 필요할 뿐이다. 주체는 무의식을 담은 그릇이나 정체성을 새긴 개인이 아니고, 권리의 다발을 지닌 시민이나 언어적 효과로 구성된 관습의 총체도 아니다. 예측 가능하고 논리적이고 일관적인 목소리를 내는 주체이기보다는 차라리 주체로서 매번 실패하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 동어반복의 틀을 벗어난 의미가 나올 수 있다. 주체는 반복과 연속성, 발전과 진보, 기억과 인과성, 강박과 도착의 시간성과 단절하는 계기가 어떻게 다가올지 알지 못한다. 퀴어 이론은 그런 주체의 실패의 감각과 정동의 결을 기록함으로써 기원과 텔로스 대신 에로스를 기록하는 역사 쓰기(erotohistoriography)"를 실험하고 있다.

 

'동성애자는 좋은 시민이어야 하는가?'라는 버사니의 질문은 '시민이란 무엇인가' '왜 시민인가' 등으로 해체되었다. 이제는 시민의 자격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주의 성립 자체를, 즉 주체의 가능성과 조건을 심문해야 한다. 그렇다고 더 많은 평등과 자유가 더 많은 주체에게 배분되도록 싸우는 것을 냉소할 필요는 없다. 다만, 푸코가 권력이 생산하는 그 모든 것을 통찰하면서도권력이 틀어막은 것(foreclosed)"을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버틀러의 지적을 곱씹을 이유는 충분하다. “생존할 수 없음과 알아볼 수 없음(unlivability andunintelligibility)"으로 밀려난 그곳에 퀴어 주체가 깃들고, 폭력과 상실과 불가능을 사는 낯선 몸이 있다면 말이다.

 

5. 회복하는 몸, 없음의 비평

 

그 몸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이름이 필요할까? 퀴어 주체가 정체성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기원과 텔로스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성취, 완성, 자유, 능동, 확장 대신 실패, 좌절, 해체, 수동, 고립을 살아가면서 버틀러가 말하는 살 수 있는 삶(ivable life)"을 위해 싸운다는 것, 통합되지 못한 잔재와 넘쳐 흐르는 잉여와 울퉁불퉁한 정동의 타래를 품은 낯선 몸이라는 것, 이런 사유의 흐름을 가장 주도적으로 그리고 독창적으로 보여준 비평가는 이브 세즈윅이다. 널리 알려진바, 세즈윅은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을 비판하고 회복 비평(reparative criticism)"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회복은 '정상'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현재를 견디고 살게 하는 회복적 욕망이고, 이 욕망에 감응하는 인식론이 있을 때 회복 비평이 가능하다. 그는 특유의 비학술적인 어조로 회복적 인식론을 전치사 '(besile)'에 기발하게 비유한다. 옆의 인식론은 강박적으로 진실을 파헤치고 본질을 정의하는 방식이아니라 가까이 접촉하여 질감을 느끼는 방식이다. 안팎, 위아래, 앞뒤, 전후 등위계적 이분법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대신, 옆으로 다가가 이것저것 시도하는 방식으로 무수한 감정의 미세한 결과 흐름을 풍성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세즈윅은 queer의 한 어원이 twerk (가로지른다는 뜻)라고 언급하면서 퀴어 이론을 횡단의 정치학으로 정초한 적이 있다. 또한 퀴어를 의미의 가능성, 사이, 겹침, 불협화음과 화음, 결핍과 과잉이 마구 얽혀 드러난 상태"로 정의한 적도 있는데, 이 유명한 문학적' 정의는 퀴어 이론이 섹슈얼리티자 주체 담론일 뿐 아니라 '읽기'를 수행하는 몸에 관한 담론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퀴어 비평가는 감춰진 진실을 강박적으로 복원하는 사람이 아니라점 사이를 연결하거나 건너뛰고 가로지르며 의미의 지도를 만드는 사람일 수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길을 잃고 알 수 없는 곳을 끝없이 헤매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옆으로 접촉하기는 공간적인 알 수 없음(spacious agnosticism)”, 거기에 내포된 온갖 두려움과 놀라움과 쾌와 불쾌의 파편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퀴어 비평가는 비평의 대상을 찾아 경계를 허물고 가로질러가는 주권자가 아니라 차라리 허물어짐과 가로지름을 당하는 몸을 경험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거기서부터 쓰여진 것 못지않게 쓰여질 뻔한 것이나 차마 쓰여지지 못했을 것을 길어올려 모든 의미가 똑같아지지 않는 곳으로 흘려보냄으로써 동어반복이 아닌 차이를 만들어내는, 자기로 회귀하지 않으며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 담론이 퀴어 주체는 구성적으로 세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퀴어 지식을 생산한다. 퀴어 주체가 미리 정의되지 않는 것처럼 퀴어 주체가 애착하는 대상의 범위와 자격 또한 미리 제한되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성은 미리 알 수 없는 경험이다. 말하자면, 얼마나 퀴어해야 퀴어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퀴어 비평은 주체와 대상에게 정해진 이름을 달아주고 소속할 자리를 찾아줄 수 없다. 대신, 이름 없음과 자리 없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름과 자리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계속 질문한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 이름 없음과 자리 없음을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 몰라도 되는 것으로 타자화할 수 없도록 없음 자체를 정치화하는 한편, 없음이 바로 의미가 생산되는 조건임을 강조한다. 회복이 복귀가 아니라 창조인 것 못지않게 없음이 의미의 조건이라는 것 또한 퀴어 이론의 중요한 역설이다.

 

십오 년 간격으로 퀴어 이론 특집호를 펴낸 학술지 소셜 텍스트 (Social)또한 그런 역설에 주목한다. 2005년 첫 특집호는 퀴어 이론이 실증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전제를 거스른 해체주의적 관점을 기반으로 지구화, 신자유주의, 문화정치, 주체, 정체성, 가족, 친족에 관한 가장 혁신적이고 예측 불가한 퀴어 주체는 구성적으로 세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퀴어 지식을 생산한다. (……) 이름 없음과 자리 없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름과 자리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계속 질문한다.

 

능한 연구를 제출했다고 평가하고, 주체/주제 없는(Subjectless)” 비평의 유연한 개방성을 상찬한다. 연구자와 연구 주제가 미리 정해진 범위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연구 과정에서 퀴어 지식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주체/주제의 '없음less'이란 부재/현존의 묘사라기보다 생산과 작동의 원리에 가깝다.

 

2020년 특집호는 퀴어 이론의 주체/주제 없음에다 대상/목적 없는 (objectless)" 비평이라는 정의를 보탠다. 누가 무엇을 왜 연구하는지 정해진 기준과 방향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퀴어 이론의 경계를 지우는 과감한 요약이다. 그러나 경계 없음이야말로 착취와 식민화의 수사이기도 하므로, 퀴어 이론의 세계적 확장에 내포된 문제를 짚을 필요가 있다. 퀴어 주체의 형상이 서구 백인 게이 시민에 한정되지 않게 된 지 오래인 지금, 퀴어 이론의 세계화는 미국의 국지성을 상대적으로 드러내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착시 현상 너머, 경계는 더 희미하고 모호한 방식으로 계속 다시 그어지고 있지 않은가? 주체/주제 없는, 대상/목적 없는 비평의 장에 누구나 뛰어들고 무엇이든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비평가가 서 있는 시공간은 진공상태가 아니며 비평 행위는 역사적 구체성과 상호작용한다. 가령 이슬람이나 아시아 국가의 퀴어를 재현한다고 할 때, 그것을 자유와 진보와 다양성을 표상하는 미국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역사적 구체성을 가진 로컬' 퀴어 지식으로 공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주체/주제 없음과 대상/목적 없음의 비평은 주체/주제와 대상/목적을 다양화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채워넣고 계속 자리바꿈하는 대신 주체/주제, 대상/목적 그 자체를 흔들어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파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특집호의 편집자들이 퀴어 이론을 주도할 새로운 동력으로 질병/장애(debility), 토착성(indigeneity), 트랜스(trans)를 지목하는 것도 주체/주제, 대상/목적을 못박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통일성에 구애받지 않고 주어진 전제에 갇히거나 특정한 재현 모델에 고착하지 않고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퀴어 지식을 생산할 가능성을 발굴하는 시도일 것이다.

 

6. 결론을 대신하여: 탈주체와 퀴어

 

요약하자면, 삼십여 년의 퀴어 이론의 궤적을 정체성에서 벗어나 탈주체로 향하는 흐름으로, 그리고 퀴어 비평의 가능성을 없음의 자유로 이해할 수 있다. 주체/주제 없는, 대상/목적 없는 비평으로서 퀴어 이론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 즉 미리 정해진 것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언제나 여기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존재하는 방식은 퀴어 비평을 투명한 진실의 영역이 아니라 차이와 욕망과 환상의 영역으로 만든다. '없음'으로 존재하는 비평이란 우리가 만들어낸 애착의 대상, 느낌의 대상, 불확실한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퀴어 비평이란 계속 읽는 (연습을 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언뜻 잘 읽히지 않는 상황일수록 잘못 읽을 실패의 가능성이 있고, 그럴수록 동일시를 거부하는 퀴어 비평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퀴어 비평이 가장 신중하고 사려 깊어지는 순간은 퀴어 이론의 핵심이 LGBTQAI+의 나열이 아니라 그런 분류를 의심하고 해체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이다. 퀴어라는 단어에서 탄압과 박해의 역사를 지우는 것은 지금도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경험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비가시화한다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비평가가 있을까. 다만, 세즈윅이 갈파하듯이 '커밍아웃을 호모섹슈얼리티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는 벽장의 인식론은 그 자체가 섹슈얼리티를 알 수 없게 하는 근대 서구 문명의 집단 도착이기도 하다는 것, 정체성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교차적으로 미리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퀴어 비평의 출발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퀴어 비평은 섹슈얼리티와 정치의 두 축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기보다는 그 둘의 관계를 계속 다르게 실험한다. 퀴어 비평이 읽는 것은 LGBTQAI를 이루는 각각의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성차 그 자체, 섹슈얼리티의 차이가 아니라 섹슈얼리티라는 차이이다. 섹슈얼리티는 내 몸이 소유한 것이라기보다 내 몸이 박탈당하는 경험이다. 퀴어 비평이 일깨운 교훈은 역사는 거울이 아니라는 것, 우리를 위안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존재가 부상하기 시작하는 입구고향'이 아니라 우리를 가로지르는 그 모든 단절을 들춰내는 것일 뿐이다. 거기서 차이를 마주하는 일은 즐겁지 않다. 퀴어 비평 덕분에 그 일이 왜 즐겁지 않은지를, 왜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질문하는 법을 연습할 수 있다. 차이를 만나는 것은 이미, 언제나, 너무나 퀴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