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겨울, 불법체류자 강제단속의 위협 아래 10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이국에서 목숨을 놓았다. 자신이 돌리던 기계에 밧줄을 묶고, 동해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고, 화장실 쓰레기통을 밝고, 밧줄에 목을 걸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던가. 노숙하다 얼어 죽으며, 달려오는 전동차를 향해 걸어가며,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며 죽음을 향해 걸어갔던 그들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무엇이었던가.
1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조치’ 카드를 들고 법무부가 강력한 단속에 나섰지만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힌 출국대상자는 7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추산되다. 대부분의 불법체류자들은 지난겨울 생필품을 사들고 구석진 데로 숨어들었다. 또 그 가운데 몇몇은 ‘강제추방 반대와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들에게는 쉽지 않은 두려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죽거나 다칠 수도 있고 어쩌면 돈을 벌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주노동자들은 당장 떠날 돈이 없거나 빚이 많고, 임금을 받지 못해서 혹은 억울해서 한국을 떠나지 못했다. 그 중 후자를 택한 샤하 하산은 천막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혼자 싸우는 것은 힘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같이 싸우니까 힘이 생긴다. 여기에서 워킹비자 받을 때까지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불법 사람으로 늘 불안하고 힘들게 살았다. 이제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들은 말한다. “강제추방과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말살하고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신종 노비문서인 고용허가제가 바로 이주노동자들을 죽음에 내몬 살인 주범이다”라고. “사장의 동의가 없으면 다른 공장에 취업할 수도 없고, 아무리 욕먹고 맞고 월급을 떼여도 사장에게 잘못 보이면 해고되고, 해고되면 바로 불법체류자로 낙인찍어 강제추방하겠다는 게 고용허가제”라고.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어요.
명동성당 돌계단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나랜드라를 만났다. 플라스틱 대접에 비닐의 씌우고 밥과 닭볶음과 김치를 한데 얹어 밥을 먹으며 꽃무늬 치마를 입고 있는 한국어 선생님과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얼른 보아서는 볕에 그을린 한국 사람처럼 얼굴도 넓고 약간 째진 나랜드라는 몽고 계통의 구릉족이라 했다.
“자동차 배터리 분리하면 위험한 유리 많아 조심해야 해요. 납은 엄청 많이 나와 아주 무거워. 하루 몇 번씩 지게차로 실어다 줘야 해. 두 시간만 하면 납이 이렇게 쌓여. 납은 아주 위험해. 얼굴에 튀면 큰일 나요. 얼마 전에 한국 친구 납 얼굴에 튀어서 18바늘 꿰맸어요. 그런 일 한국 사람 못 하고 하지 않는 일이에요. 2년 넘게 그 일 했어요. 사장 지금도 막 오라고 해요. 저 돈 벌 수 있는데 공장 안 가고 여기서 농성해요. 나 고국에 가고 싶은데 안 가요. 우리 후배들 생각하면 마음 아파서. 여기 와서 내가 한 고생 똑같이 해야 하나. 이런 생각 들기 때문에 노동허가 모두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는 최근 2년 동안 안산의 배터리 분리수거 공장에서 책임자로 일하며 월급을 1백70만 원 받았다. 이주노동자 임금으론 파격적인 액수다. 나랜드라는 네팔에서 노동일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베테랑급 기술자가 되었다. 문제가 생기면 사장이 농상장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그에게 물어볼 정도란다. 이 일 저 일 전전하며 3D란 3D는 다 경험해본 나랜드라를 통해 이주노동자가 어떤 노동형태에 종사하며 살아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또 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돈만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몸소 겪은 고통을 통해 인간의 평등과 인권운동에 눈을 떠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97년 7월에 산업연수생으로 왔어요. 처음 공장은 의정부 덕계리에서 스위밍풀 만들었는데 한 달 하다 너무 힘들어 그만두었어요. 인천 주안 가서 노가다 했어요. 1년 하다 IMF 터져서 1년간 일 못 했어요. 홍콩에 가 있는 여자친구가 돈 보내줘서 생활했는데 1999년부터 일도 많아졌어요. 그 다음 의정부에서 금형하고 샤링했어요. 1년 정도.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거기서 월급 안 올라가 인천에 넥타이 만드는 공장 들어갔어요. 칼라 만드는 것, 염색, 프린트 일도 하고 포장도 하고. 염색일 어려워요. 유해물질 엄청 많아요. 화학물질 많기 때문에 옷에 딱 떨어지면 빵꾸 나요. 옷은 버리면 되지만 팔 얼굴에 튀면 무지 위험하죠. 눈에 안 들어가게 안경 쓰고 일하고. 전 여러 가지 일 거치고 기술 많아요. 귀뚜라미보일러 만드는 데서도 일하고, 도금 일도 여덟 달 하고. 냄새나고 너무 힘들었어요. 컴퓨터 자판 만드는 것도 몇 달 하고, 그 일은 조금 잘못하면 사이즈 안 맞아요. 그리고 또 넥타이 공장 들어갔어요. 부도 나서 그만두고. 마지막에 플라스틱, 자동차 배터리 분쇄해서 내용 빼고 재활용하는 일 오래 했어요”
그는 ‘네팔공동체’에서 일하며 1995년 불교단체 NDF(Nepal Buddhim Family)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네팔의 문화나 종교를 알리며 거기에서 모이는 수익금과 월급의 일부를 고국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쓴다. 네팔은 지금 내전 중이다. 소수의 부자와 왕정, 그리고 그에 반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벌이는 반군 사이의 싸움으로 위험한 상황이다. 그의 꿈은 헤어져 사는 여자친구와 결혼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나 어릴 때 아버지가 왕정 반대해서 찍혀서 인도로 나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9년간 살았어요. 그때 모든 땅을 빼앗겼어요. 나는 어릴 때 카트만두로 인도로 에베레스트로…… 왔다갔다해서 공부 많이 못 했어요. 네팔왕국에 들어와도 좋다고 해서 들어왔는데 가진 게 없어 너무 힘들게 살았어요. 한국에서 자원봉사자들 보면서 나도 네팔 가서 좋은 일 하고 싶다 생각 들었어요. 물 없어 빨래 못 해. 여기 와서 우리 빨래 들고 가서 빨아줬어요. 날씨 추워 옷 갖다주고 밥 해주고 김치 만들어주고……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고용허가제인가 노예노동 허가제인가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다섯 달째다. 추울 때는 영하 18도까지 내려가던 겨울 동안, 난방도 되지 않는 천막에서 자면서 기본적 생필품과 식수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겨울을 났다. 산재의 후유증과, 추위와 영양 부족으로 인한 감기, 근육통 등으로 너나 할 것 없이 힘들었다. 이제 날은 풀렸는데 병원에 다니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그들 중 대부분이 당 치수와 혈압이 높다. 무엇보다도 메아리 없는 긴 싸움에 지쳐간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을 공장에도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가? 돈도 떨어지고, 아프고 힘든 상황을 견디며 이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몇 년 동안 ‘네팔공동체’에서 일하며 현재 명동농성단에서 연대국장을 맡고 있는 쉬디 버랄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감기로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따스한 봄에 보니 쉬디는 까무잡잡하니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품위가 있는 게 정말 브라만답다.
“아직 연수생제도 문제 그대로 있어요. 고용허가제 연수생제도 같이 하니까. 계속 1년마다 연장 계약해야 하고 돈 못 받고 월급 적어도 한 회사만 다녀야 해요. 사업장에 들어가면 사장한테 여권 뺏겨. 그것 때문에 노예처럼 붙어 있어야 해요. 그냥 주는 대로 20만 원 받기도 하고…… 견디다 뭐 나가더라도 무능력자 되는 거고 불법자 되는 거야. 어느 나라 가도 내가 네팔에서 왔다는 건 여권,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건데…… 그거 뺏기고 뭐 옮기지도 못하게 사람한테 그렇게…… 내가 동물도 아니고. 동물도 뭐 자유롭게 나돌아다닐 수가 있는데. 인간 사는 세상에서 인간으로 와서…… 이런 문제 10년 걸려왔단 말예요. 그런데 이번 법, 그거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요.”
고용허가제를 받아들인 것은 그동안 쉬쉬하면서 묵인해왔던 이주노동자에 대한 수요와 이에 부응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유입이 암묵적인 수준에서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 이제 국가가 공식적인 노동력으로서 이주노동자를 인정하고 그것을 관리 · 감독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하지만 고용허가제는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빼앗고 합법적인 노동기한도 3년만 주며, 그나마도 1년마다 재계약을 하도록 해서 노동3권 행사를 사실상 원천봉쇄한 이른바 ‘노예노동 허가제’다.
정부는 2월 말까지 자진 출국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8월에 고용허가제 또는 산업연수생으로 재입국을 약속했다. 하지만 다시 큰 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아무리 보장해준다고 해도 올 수가 없다. 한국에 들어와도 산업연수생이나 고용허가제로 오게 되면 몇 달 후에 다시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작년 3월을 기준으로 미얀마의 아웅산(가명)은 3년 이상 4년 미만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용허가를 받으러 고향에 다녀왔다. 그가 미얀마 대사관에 낸 돈은 빼앗긴 여권 재발급과 3년 동안의 세금을 합쳐 2백70만 원이었다. 왕복 비행기 표값까지 합하니 4백만 원이 들었다. 그나마 빚은 쳤지만 고용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된 아웅산과 달리 임금이 체불되었거나 한국에 오기 위해 들인 비용을 다 갚지 못한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는 어떻게든 숨어 일할 수밖에 없다. 즉 고용허가제는 “다시 들어와서 불법체류자가 되라”는 법이 될 공산이 크다.
“우리 공장에서 일하고 있고 일할 수 있는 자격 가지면 노동자라 불러야 하는데 일 배우는 사람을 되어 있고, 하는 일은 기계처럼 하는 거니까 그게 제일 나빠요. 물론 이번 고용허가제는 우리들이 노동자라는 것 인정해요. 하지만 공장을 옮길 자유가 없어. 3년 미만자만 합법적인 신분 얻을 수 있어요. 4년 이상 체류한 사람 모두 떠나야 해. 합법 받아도 맘대로 공장 옮길 수 없으면 금방 불법체류자 돼. 이런 거 보면 노동자는 노동잔데 노동자 권리 하나도 없어. 이거 어떻게 이해해야 돼요? 3~4년 된 사람 이제 막 빚도 갚아가고 일도 잘하고 말도 알아들어. 문제 해결하려면 몇 년 연수생 안 받고 이 사람들 일 시키면 돼.”
쉬디 버랄의 지적처럼 사실 오늘날 이주노동자 문제의 핵심에는 산업연수생제도가 있다. 이는 중소기업의 인력난 해소라는 애초의 명분과 달리 각종 비리와 인권침해와 불법체류자 양산이라는 문제를 낳았다. 이 제도는 합법을 가장한 편법 제도로, 연수생으로 규정되어 있음에도 ‘연수는 없고 노동만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또 이 제도는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을 강제한다. 연수취업 계약서에는 국내 최저임금 이상을 주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최저임금조차 보장하지 않고 있으며 임금 중 상당 부분을 ‘이탈 방지’ 등의 이유로 회사가 강제 적립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여권 압수, 외출 금지, 감금 노동, 성폭력 등 갖가지 인권침해를 묵인하는 제도였다.
“연수생 국가에서 몇 명 데려오라는 것만 허락하지 직접 관리하지 않잖아요. 중소기업협동조합 그런 민간단체에서 우리 관리해요. 거기에 수많은 로비자금들이 있어요. 한 달 1인당 2만 4천 원 받아요. 한 사람이 2만4천 원이지 몇십만 명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몇백 억? 우리 생각할 때 그렇게 문제 많은 연수제도 왜 또 안 없애나, 그 돈 때문인가, 이런 생각도 들어요. 다 쫓아내고 한국 사람만 일하든가 일을 시키려면 노동자 권리를 다 주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노동자로 일하지만 뭐 남의 집 못 가게 끈으로 묶어놓은 개처럼 취급받기 싫어요. 우리 일하면 노동자로 인정받고 세금 내고 싶어요. 인정해줄 건 해주고 혜택받을 건 박도. 합법적으로 노동비자 받고 일하고 싶어요.”
쉬디 버랄의 말처럼 산업기술연수생의 선발과 배치, 사후 관리 등 전 과정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중기협)’가 담당하고 있다. 정부는 국내 업체들이 개별적으로 외국 인력을 들여오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1994년 외국 인력의 도입 창구를 ‘중기협’으로 일원화하고, ‘중기협’이 외국의 인력 송출기관을 선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중기협’의 독선적 운영과 송출기관들과의 유착으로 온갖 비리가 생겨났다. 실제로 중소기업청이 2002년 9월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중기협’이 6년간 산업연수생들을 도입 · 관리하면서 챙긴 수입이 565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수입의 대부분은 자체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결국 산업연수생이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인해 사업장을 이탈하여 불법체류자가 되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중기협’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져왔던 것이다.
산업연수생으로 재입국한 중국 동포 임모 씨는 “단속에 걸릴 위험만 빼면 불법체류자 신분이 연수생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냥 불법체류자는 낮에 일하는 것만으로도 연수생 시절 잔업에 특근까지 하는 것만큼 버는데 뭐 하러 고생하겠습니까? 연수생들의 연수 후 체류 연장 여부를 회사가 결장하기 때문에 신분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죽어간 이주노동자들도, 단속 · 추방을 피해 어두운 곳에서 공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도, 농성투쟁을 하는 이주노동자들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국 땅에서 떳떳하게 노동자로서 권리를 누리며 합법적으로 노동하는 것이다.
가스총 · 그물총으로 짐승 잡듯 내몰아요
강제추방 과정의 폭력성과 외국인 보호소의 인권침해도 심각하다. 법안 자체보다 법안을 실행하기 위해 비인간적으로 모는 ‘인간사냥’ 때문에 그들은 싸움을 택했다고 했다. 1월 7일 집회를 마친 후 명동성당으로 돌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을 경찰과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가스총까지 발사하면서 연행해갔다. 이 과정에서 십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 연행된 두 명은 ‘현대판 노예섬’이라 불리는 화성보호소로 이송되었다. 캐비, 헉, 굽다, 바트라시 등 네 명으로 시작된 단식투쟁이 며칠 사이 17명으로 늘어나면서 보호소 측은 이주노동자들을 독방에 감금시키고(6명), 16일째 단식을 진행해온 11명의 이주노동자들을 강제 출국시켰다. 강제 출국 전에도 보호소측은 몽골의 바트라시와 다아가 피를 토하고 하혈을 하였지만 기침약만 주고 의사 진료를 거부했다. 또 개인 일기장이나 수첩 등 일체의 개인 소지품도 압수했다. 결국 3월 3일 바트라시, 다아, 뭉크엘티나, 초거엘티나 등 몽골 노동자들은 단식 16일째에 강제 출국당했으며 3월 4일에는 알렉세이, 알렉산더 등 러시아인들도 독방에 감금된 상태에서 단식 중 러시아로 강제 퇴거당했다. 쉬디 버랄은 말한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만이 아니라 경찰까지 와서 잡아가요. 가스총, 그 물총 쏘고. 그거 짐승이나 강도 체포할 때 쓰는 거 아니에요? 이주노동자 그물총으로 잡는 거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하는 거예요. 우리들 남의 나라에서 죄 지었다 그렇게 끌려가면 범법자 되고 감옥 가고 죽어요. 우리나라 내전 중이니까.”
4월 1일 명동성당 농성투쟁단 공동대표 샤말 타파(32, 네팔) 씨도 강제 출국당했다. 샤말의 방에는 CCTV가 설치되어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그는 2월 15일 출입국관리사무소 단속반에 의해 강제연행되어 여수출입국관리소로 이송된 뒤 31일간 단식을 하다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법무부는 기습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샤말 타파 씨를 강제 출국시켰다. 명절에도, 노는 때도 고국에 갈 수 없던 샤말은 10년 세월이 흐른 뒤 외국에서 범죄자가 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지난 12월 30일 한국 정부에 의해 폭력적으로 강제추방된 비두와 자발 씨는 방글라데시에 도착해서도 본국 정부로부터 범죄자로 몰려 경찰기관에 억류되고 법무부에 소환당했다. 특히 독재나 종교 · 정치 · 인종 간의 문제로 내전이 진행 중인 네팔이나 미얀마 등 위험한 정치 상황에 놓인 나라 사람들은 출국이 곧 감옥이나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 이유로 올 2월 9일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8백15명은 자진 출국 거부를 선언했다.
위험한 정치적 상황에 있는 나라 사람들에게 망명신청을 받아들여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법적 의무이자 최소한의 인권에 해당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도 1994년 ‘UN난민협정’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마웅저가 그런 경우다. 그는 일명 ‘8-8-88 대학살’로 불리는 1988년 8월 무차별 총격을 가한 군부에 의해 수천 명이 죽은 후에 한국에 들어왔다. 아직 고등학생이던 그는 감옥에 갇힐 것인가, 총을 들 것인가, 외국으로 뜰 것인가 세 가지 길 중 세 번째를 택했다. 그는 2000년 5월 난민 지위 신청을 했는데 21명 중 세 명만 받아들여진 상태다. UNHR(유엔 한국지부)에서 심사를 받던가 한국에 남든가 제3국으로 추방되든가 둘 중 하나가 그에게 선고될 것이다. 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조국과 가고 싶지 않은 제3국 사이에 한국이 있다. 등 떠밀면 떠날 수밖에 없지만 그에겐 10년째 일하며 공부하고 함께 활동한 친구들이 있는 한국이 청춘을 묻은 제2의 고향이다.
“미얀마 사람도 정신 나간 사람들 많아요. 몇 년 전 친구 하나 지하철역 넘어갔어요. 이상하니까 친구 둘이 붙어 다녔는데 갑자기 지하철 나가 뛰어들어 죽었어요. 최근 정신 많이 나가서 얼마 전 세 명 미얀마 보냈어요. 어떤 사람은 너무 정신이 많이 나가 비행기도 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정신병원 보내 치료받고 고향 갔어요.”
미얀마 마웅저의 얘기처럼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실정에서 비롯된 정신적 압박과 두려움은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앗아간다. 고용허가제를 앞두고 실시된 강제단속은 임금체불당하고, 산재를 당해 손가락이 잘리고, 병들어도 병원조차 갈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을 양산한 것이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나라
레자와 故 후세인 씨의 경우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장시간 노동, 임금체불에도 불구하고 항의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강제단속의 공포를 보여준다. 지난겨울 내내 인천의 자취방에 숨어 살다 병원에 입원한 레자(방글라데시, 45세)는 강제단속이 실시되자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임금체불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1년 전부터 배가 아팠지만 잡혀갈까 봐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불법이니까 일 안 줘. 비자 있어야 일할 수 있어. 비행기 값 없어 집에 못 가. 모아둔 돈 하나도 없어. 갈 데 없어. 무서우니까 밤에만 돌아다녔어요. 돈 없으니까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김치, 물고기하고 계란 후라이하고 밥해서 낮 1시, 2시 그렇게. 라면, 빵 있지만 배 아파서 못 먹어. 배고프니까 잠만 자. 생각 많아. 자식 생각, 아내 생각, 고향 생각. 이제 나 어떻게 살아야 해? 고민하니까 머리 아프고 배고파 잠만 자. 추워도 보일러 기름 많이 때면 안 돼. 한 시간 쓰고 또 끄고…….”
통증을 참을 수 없었을 때에야 동네 병원에 간 그는 검사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 병원에서는 검사비로 20만 원을 받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데도 통증이 더해지자 큰 병원에 갔다. 진단 결과는 십이지장 출혈로 드러났고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치를 뻔’한 수준이었다. 수도 다카 출신인 레자는 1992년 관광비자로 놀러왔다 눌러앉았다.
“방글라에 일 없으니까 관광비자 3개월짜리로 일하고 돌아가고 다시 오고……. 방글라 사람들 배운 사람 창피해서 일 안 해요. 계급 때문에. 한국에서는 아무나 일해도 되니까 오게 돼요. 다시 고국에 가서 일 없으니까 1년 후에 또 나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내, 아들 보고 싶어도 못 가요. 지금 저는 불법 상태예요.”
지난겨울 강제단속이 실시된 동안 그는 자취방에 갇혀 살았다. 임금 체불이 된 상태로 회사가 부도가 나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한국에 온 지 10년도 넘었지만 인천 이외는 가본 적이 없다는 그는 누구에게 손을 내밀거나, 두려움 때문에 다른 회사문을 두드릴 엄두는 애초에 못 냈다. 중간에 사징이 잠시 바뀌었을 때를 제외하고 처음 그를 데려간 사장 밑에서만 일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롱, 옷 뒤집는 것, 실밥 따는 것, 재단하는 것 잡아주고 시다했어요. 그래서 미싱 배웠어요. 봉제공장에서 미싱 배워서 한 군데 계속 있었어요. 사장 좋은데 월급 적어요. 처음 30만 원, 다음 50만 원. 인천에서만 일했어요. 무서워서 다른 데 못 가. 저번에 여권은 사장이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인 사장이 도와줬어요. 한국에서 나쁜 사람 아직 못 만났어요.”
처음 공단거리를 지나다 알게 된 봉제공장 사장은 그의 말에 의하면 ‘너무너무 잘해주고 좋은 사람’이었다. 야근할 땐 만 원 이만 원씩 주고 “닭 사먹어” 하기도 했다. 사장은 현재 임금체불로 노동부에 신고된 상태다. 노동부 조사결과 ‘그 잘해주고 좋은 사장’이 부동산과 예금을 합해 재산이 15억 정도 되는 걸로 드러났다. 링거를 꽂은 그의 손등은 빼빠로 문질러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살이 붙어 있다. 잠바 만들면서 카우스(소매 끝부분 박을 때 손을 뒤집어 계속 밀어가며 360도 돌여야 한다)를 하도 많이 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사장과 과장에게서 “한국 아가씨보다 두 배로 일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다고 자랑한다.
“이제 퇴직금, 월급 받으면 가야죠. 생각만 하면 아파요. 마음도 아파.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피곤해요. 돈 없어 며칠 동안 약 먹고 일당 일하러 다녔어요. 지금은 너무 아파 일 못 해. 집사람이 많이 아파서 걱정이야. 보고 싶고 생각 많아서 아파. 1년 됐어. 병원에 갔는데 머리가 이상하다 그래. 아들 보고 싶어. 5년 못 봤어. 이번 주에 대학 입학했어. 하지만 지금 돌아가지 못해. 돈 없으며 사랑도 없어. 아들 만 원 주세요. 나 돈 없어 하면 돌아서 나가. 돈 있어야 사랑 있어. 1년만 기다려라. 돈 없어도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나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후세인(방글라데시) 씨는 4월 9일 밤 8시 반경 가슴 통증을 호소해 병원으로 옮겼다가 상태가 위독하여 큰 병원으로 옮겼으나, 10시 반경 사망했다. 원인은 ‘과도한 노동과 스트레스의 요인으로 인한 급성심근경색증’. 그가 다니던 이불공장은 먼지와 솜털이 많이 날리는데 집진기나 환풍시설이 없었다. 또 최근 강제추방 단속으로 사람이 줄어 서너 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14시간 넘게 일하며 때로는 새벽 2시까지 포장작업을 했으나 임금이 밀려 회사를 그만둘 수 없었다. 또 강제단속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외출조차 하지 못한 채 몇 달째 살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작업장으로 올라와 밀려 있는 일을 처리하던 중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른 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일하며 공부하며 사랑하며
‘인권’문제로 인터뷰했던 마웅저와 통화하다 그가 후배 세 명과 함께 산다는 부천의 자취방을 찾기로 했다. 그들이 무얼 먹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부천에서 40여 분가량 버스를 타고 내려 시장통을 돌고 돌아 자취방에 도착했다. 3층 양옥에 부엌 하나 방 하나인 방이 서른 개쯤 있는 닭장집이었다. 방 안에 알루미늄 샤시문이 있어 열어봤더니 타일이 깔리지 않은 화장실 겸 창고가 있었다. 옷장 하나 티브이 하나 책상 하나 컴퓨터 하나 놓인 방은 네 명 눕기에는 조금 좁아 보였다. 월세 22만 원이라 했다.
데이트하러 가는 듯 신나 보이는 부따는 모임에 간다고 말했다. 유창하게 말하다 자주 웃음을 터뜨리는 중국인 2세 부따(27세)는 한국에 온 지 5년 되었다. 그는 신발공장에서 일하는데 저녁이면 모임에도 나가고 한국어 공부도 3년째 하고 있으며 고국의 역사와 현실 등에 대해서도 열심히 토론하고 공부한다. 또 한국 친구들도 노래 듣다 모르면 그에게 물어볼 정도로 노래 박사다.
“대학 2학년까지 다니다 92년도 12월에 데모해가지고 전체 대학이 4년 동안 문 닫았어요. 88년부터 닫고 열고 닫고 열고 공부할 처지가 안돼요. (웃음) 졸업 빨리하려면 미얀마 가면 돼요. 공부 안 해도 졸업장 줘요. (웃음) 그냥 줘요. 정치 운동만 안 하면. 그런데 학교 다니며 싸움 안 하는 사람 없어요. 먹고 자고 놀기만 하니까 아빠가 야 너 뭐 어차피 학교도 문 닫았는데 돈 벌든지 뭐하든지 해라. 할 일도 없고 외국 가서 돈 벌어야겠다 생각했어요……. 처음 파주에서 5개월 동안 야간작업만 했어요. 2교대로 매일 12시간. 사출기 만드는 회산데 잔업 철야 수당 없고 일 매우 힘들었어요. 힘들어도 참았어요. 아빠한테 3천 달러 빌려왔잖아요. 빚 못 갚고 그냥 가면 안 되잖아. 3천 달러, 3천 달러, 3천 달러만 생각하고 일했어요. (웃음)”
얼굴이 희고 이목구비가 수려하면서도 깊고 선한 눈매의 아타(28세)는 카렌족이다. 수줍음이 많은 그는 일요일이면 청량리까지 교회를 다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고 축구도 곧잘 한다고 한다. 그는 돈 벌어 형편이 어려운 사촌 동생들에게 학비를 보내준다. 얼굴이 금세 빨개지는 아타 대신 선배인 마웅저가 설명해준다.
“미얀마는 135개 민족 있어요. 그 중 카렌족은 기독교를 믿어요. 다른 민족도 미얀마 독재정권에 반대하지만 소수민족은 더 많이 당했어요. 그 중 카렌족 많이 죽었어요. 말은 대놓고 안 하지만 집안 친척들 어려움이 많았을 거래 생각해요. 카렌족 영국 식민지 되면서 미얀마 식민지되고 탄압 많이 받았어요. 우리나라 서로 싸우지만 우리끼리는 공부하면서 서로 다른 차이 뭐냐 공부해요. 또 민주화되면 각 민족마다 연방제도로 가자 한 나라로 독립하자 입장 다를 수 있어요. 비디오 보고 책 보고 우리나라 상황 공부하고 토론해요. 위에서 대표끼리 친해서 되는 일 아니잖아요? 밑에 있는 우리가 서로 친하게 지내야 되잖아요? 불교 기독교 얘기도 하고, 카렌족 당하는 것 미얀마 사람 때문이 아니라 군부 때문이라고 그거 이해해주라고 하고. 다른 인종끼리 종교끼리 많이 싸우잖아요. 인도네시아, 태국, 동티모르…… 이슬람, 기독교, 불교 서로 죽이고 마을 태우고……. 우리 50년 동안 무장투쟁했어요. 우리 남의 종교 문화 이해해야 돼요. 그래야 민주화되어도 서로 싸움 없어요.”
얘기 도중 마웅마웅수(41세)와 틴솔(45세)이 먹을 것을 잔뜩 들고 놀러왔다. 후배들은 마웅마웅수를 ‘미얀마 대장’이라 부른다. 그는 마흔 되어가는 나이에 뒤늦게 한국에 왔지만 나이 생각 안 하고 열심히 적극적으로 일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현재 밸브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데 지금 함께 사는 선배 틴솔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는 고용허가제 때문에 고향에 다녀오느라 돈을 많이 썼다고 한다.
“어려워도 서로 끌어주고 도와줘야 해요. 우리나라 형편 어려우니까 더 힘을 보태야 해요. 한국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나라보다 편했다 생각 들어요. 결혼 늦게 해 애기 아직 어려. 힘들고 애기 보고 싶으면 부천역 나가 당구도 하고 놀아. 한국 드라마 다 좋아해요. 장금이하고 올인(옆에서 틴솔이 ‘명량소녀’‘자두야 학교 가지’ 등등을 읊어대니 모두들 웃는다). 평일 날 술 하면 일 못 나가니까 토요일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술 마시고 놀아. 친구들하고 한 달에 한 번 노래방 가서 태진아, 김건모 노래 부르고.”
틴솔은 일찍 장가들어 대학생 딸 둘에 고등학생 딸이 하나 있다. 가족사진을 보여주자 자기들에게는 안 보여줬는데 이렇게 예뻤냐며 모두 웃는다. 사진 속의 얼굴과 달라 물어봤더니 한국 와서 살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그는 밤에 잠이 잘 안 온다고 했다. 딸들이 공부 잘하고 있는지 별일 없는지, 학교 마치고 무슨 일 할 수 있는지, 일 없으면 자기처럼 또 고생하는 거 아닌지 생각이 많아서 일 힘들게 해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많다고 했다.
마웅전느 아웅산 수지가 이끌고 있는 NLD(버마민주민족동맹) 한국지부에서 일하다 작년에 그만두었다.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정당 활동이 아니라 약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에는 APEBC(Assistance Program for Education of Burmese Children)라는 단체, 일명 ‘만원계’를 만들었다.
“태국과 미얀마 국경에 난민 많아요. 나라에서 쫓긴 민주화 운동가들 합쳐 150만 명. 거기 학교 다닐 수 없는 아이들 10만 명 돼요. 부모 없는 고아 살펴야 해요. 거기 마약 밀수 많아요. 거기 성매매, 소매치기, 거지 많아요. 우리 생각할 때 학교 있으면 아이들 보살필 수 있다. 그래서 운동가들이 땅과 건물 빌려 학교 세웠어요. ‘양지오 스쿨’에서 월세 경비 모자라 만 원씩 걷어 돈 보내줘요. 공장 다니는 친구들 아무리 어려워도 마음이니까. 처음엔 정권만 바꾸면 잘살 수 있다 생각했어요. 민주화되면 개인적으로 가족과 그냥 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정부 바뀌어도 민주화되는 게 아니다 이제 알아요. 군사정부 무너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 많이 있어요. 우리 아이들 공부 못 하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간디 방식, 수지 방식, 비폭력 평화방식 좋아해요. 인종 문제, 종교문제, 폭력문제, 여러 문제 해결할 방법으로 비폭력밖에 없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제 장기적으로 평화인권활동하고 싶어요.
다른 세상을 꿈꾼다
버스를 타고 나오면서 15년 전 선배에게 맛있게 얻어먹던 부천역 골목의 닭곰탕 집을 기웃거렸다. 열 시간 열두 시간 일하고도 자취방에 돌아와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20대의 필름들이 돌아가며 그들의 자취방과 오버랩되었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인텔리였지만 이국에 나와 밑바닥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있었다. 혼자 견디었던 눈물겨운 시간은 이제 다른 세상을 향해 열리고 있다. 아래에서(under) 오래 서 있던(stand) 그들은 이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더 아픈 사람들을 이해(understand)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이주노동자들을 사귀면서 처음에는 “힘들죠? 뭐가 제일 힘들어요?”라고 물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질문을 하기 힘들다. 그들이 정말 힘들게 하루하루 산다는 것을 조금은 체감하고부터이고, 또 아무리 힘들어도 그들 대부분은 “괜찮다”며 환히 웃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웃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그들은 정말 힘들지 않은 게 아니다. 이미 두려움과 고통을 있는 대로 다 겪은 그들의 가슴 밑바닥에 분노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심장처럼 같이 뛰고 피처럼 함께 흐르는 감정을 새삼 힘들다고 드러낼 필요가 있겠는가.
문득 최인석의 소설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생각난다. 밥어미라는 스파이를 발견한 열고야국은 인간과 사랑과 즐거움이 율법인 나라다. 먹고살기 위해 노역을 하거나 사람이 사람을 사고 팔거나 하지 않는 나라다. 전쟁도 착취도 차별의 벽도 없이 오로지 이해와 관심만이 잔칫집 대문처럼 열려 있는 곳이다. 그런 나라는 진정 꿈일까.
김혜자
시인. 1961년생.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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