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요약
한국 사회에서 난민 문제 관심이 급속도로 사라진 반면, 국내 거주 외국인의 관심은 증가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정책에서 외국인들은 동화와 적응의 논리 속에서만 소비되고 있으며, 이는 이방인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제한적 시선을 드러낸다.

 

1. 이방인 없는 사회

 

한 해가 지나고 신문 지면에서 확연하게 줄어든 주제가 있다면 아마도 유럽의 난민 문제일 것이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과 유럽에서 극우 정치세력의 약진이 있은 뒤로 유럽의 난민 문제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이슈가 아니라 서구사회의 정치적 위기를 보여주는 쟁점 중 하나로서만 언급되는 듯하다. 2015년 터키의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촉발시켰던 난민 문제 관심이 식어 버린 것은 비단 한국 사회만은 아니다. 아일란의 2주기에 그의 고모가 세계는 난민 문제 관심을 잃었다고 비판했다는 기사에 따르면 말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난민과 대면하는 유럽과 달리 난민 문제를 어디까지나 해외의 상황으로만 접하는 한국 사회에서 무관심이 훨씬 빠르게 퍼져나갔다. 한국 정부가 난민 지위를 인정한 경우는 2015년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100명을 넘어선 적이 없는 상황에서 난민은 엄밀하게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아니다.

 

1년에 100여 명도 되지 않는 난민을 수용하는 한국에서 난민과 디아스포라는 해외 토픽에 불과했고 이젠 그마저도 서구사회의 반이민 극우적 정치세력들의 등장을 설명하는 방식으로만 소비된다. 난민의 관심은 완전히 사라진 데 반해서 국내로 이주하고 활동하는 외국인들의 수나 그들의 관심은 상당히 커졌다.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수를 논하는 것보다 유튜브와 TV채널의 한국을 소개하거나 한국을 배우고 적응해 가는 외국인 관련 방송의 증가로 더 잘 체감될 것이다.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방송에서 난민 혹은 불법이주자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외교관 출신인 욤비 파크리트 토나 광주대 교수의 사례가 국내 난민 문제로는 드물게 관심을 모은 적이 있었다. 밝고 활달한 욤비 교수의 자녀들은 지금도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서 활동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그 관심의 양상이 아버지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인터넷에서 소비되는 그들의 이미지는 홍어회를 먹으면서 "전라도 사람이라면 먹어야죠."라고 말하는 능청스러운 '흑동생'과 그 흑인 소년에게 어색하게 "자네 부모가 전라도 사람인가?"라고 되묻는 한국 노인의 만담과 같은 일화로 고정돼 있다.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에 동화되며 어떤 구김살도 없이 밝은 모습으로 한국 사회를 즐기는 이미지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최근 확산되고 있는 외국인 출연 예능과 동일하다.

 

외국인 출연 예능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애착을 형성하는 서사를 기본형으로 한다.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면서 정작 모국어인 영어가 기억나지 않아 영어사전을 찾고 '양놈' 탓을 하는 '푸른 눈의 한국인'(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받아들여진 외국인들을 과잉 대표하는 것은 백인이다.)들이 예능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런 과잉 적응과 동질화의 강박은 단순히 대중의 기호로 한정되지 않는다. 강미옥은 한국의 이주자 관리 패러다임인 '다문화주의' 정책은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부응하는 국가통치의 일환으로, 결혼 이주를 통해 안정적인 인구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노동 이주를 장려하고 지원함으로써 기업과 노총에 필요한 노동력을 수급"하려는 수단으로서 진행돼 왔다고 지적한다. 정책적인 시각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들은 한국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국가에 의해 구획된 자리들에 배치되고 적응하며, 작동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인간을 국가적 기획과 의도에 맞춰 관리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속성이라는 점에서 새로울 것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문화의 영역도 동일하게 동화와 적응의 논리 속에서 이방인들을 소비하고 있다는 건 우려되는 상황이다.

 

범죄와 (촌스러운)이질적 문화로 소환되는 조선족을 예외한다면 한국 대중문화 속에 동화와 적응의 과정 바깥에 서 있는 이방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국어조차 잊는 과잉적응과 어눌한 한국어가 보여주는 미숙한 적응이 있을 뿐이다. 문화적 재현 속에서 적응하는 주체만이 가시화되고 그렇지 않은 존재들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조선족과 탈북자의 재현에서 일탈과 부적응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방인의 일탈과 부적응조차 동일한 민족집단이라는 거시적 내부에 편입된 조선족과 탈북자들을 통해서만 소비되고 있다는 것은 실상 어떤 외부도 상상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동화하지 않는 이방인조차 더 큰 내부의 상상력 속에서만 소비된다. 그런데 조선족과 탈북자 이외에도 동화의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백인-남성'들이다.

 

인기를 끌었던 예능 '비정상회담'(서구국가의 '백인-남성' 인구가 과잉 대표된) 출연자들은 각자 자국의 경험과 논리를 들어 한국 사회를 진단한다. 이들은 동화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진적 서구' 혹은 '국제화된 세계'의 구성원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간다. 그렇다면 이들은 동화되지 않는 이방인인가? 탈북자와 조선족이 민족집단이라는 더 큰 내부를 보여주듯이 이들 역시 '서구=근대'라는 한국 사회가 도달하고자 했던 더 큰 내부를 보여준다. 김광기는 한국에서 (근대화의 원형으로서) 미국 미국적인 것의 추종이 한국 사회 내부에서의 존재감 획득의 수단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적인 것의 추구는 한국 사회 외부를 향하는 욕망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인정을 확보하기 위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서구=근대'로 편입돼(되기 위해) 형성된 한국사회의 경험이 놓여 있다. 동화의 수단으로서 다문화주의를 추동하는 욕망에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부응하는 국가"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자리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서구=근대화'의 내부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더 큰 내부의 구성원으로서 '백인-남성'의 권위적 역할을 승인하고 있는 셈이다.

 

대중문화 속에 재현되는 이방인은 이상하게도 모두 내부론자들뿐이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내부가 민족과 '서구=근대'라는 두 이질적 경계면을 따라서 구성돼 있다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한국 사회 내부에 주어진 역할도, 자리도 없이 도래하는 난민도, 자신의 사회적 근거를 상실하는 경험으로서의 디아스포라도 없다. 동화되지 않는 것들을 모두 비가시화하는 한국 사회는 외부도, 이방인도 없다. 이방인은 한 사회를 유지하는 암묵적 규칙인 '자연적 태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자연적 태도가 실상 전혀 자연스럽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부자에겐 당혹스러운 경험이다.

 

이방인도 외부도 없는 재현은 그 당혹스러운 감각을 결여하고 있다. 당혹스러움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방인의 이미지란 단지 이방인답다고 믿어지는 자연적 태도의 재현일 뿐이다. 이 글에서는 인종 민족 국적 등 이방인이 되는 사회적 조건, 정체성의 요소들을 살피는 대신 당혹스러운 경험으로서의 이방인의 이미지에 집중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인종 국적 등 정체성의 요소들이 이질적인 경우에도 내부자로써 소비될 수 있다. 이방인의 조건은 정체성이 아니라 당혹스러움과 그 감정의 원인이 낯설음의 발견이다. 이 글에서는 조해진과 손보미의 소설을 짚어가며 이방인의 낯설음과 당혹감을 알아가고자 한다.

 

2. 전심전력으로 가닿는 마음

 

낯선 이와의 만남에 기대지 않는 소설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민담학자 블라디미르 프로프는 모든 이야기(민담)에 주인공이 (보통 부모에 의해서 주어지는) 내부의 규칙에 따른 '금지'를 위반하는 사건이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금지된 행동 뒤에 따라오는 것은 외부에서 찾아오는 악한, 즉 이방인의 등장이다. 이방인이 사회의 규칙을 당연시하고 따르는 '자연적 태도'에 의문을 던지는 자라는 걸 생각한다면 질서가 깨진 뒤에 찾아오는 이방인은 인과적 관계를 가시화하는 상징인 듯 보인다. 낯선 이인 이방인이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건이 없더라도 소설은 익숙한 것의 낯설음을 발견함으로써 그 외부를 보충할 것이다.

 

조해진의 2017년 단편집 '빛의 호위'는 낯선 누군가와의 만남을 소설의 축으로 하고 있다. 그 낯선 누군가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던 지역의 사람일 수 있고('번역의 시작', '문주', '시간의 거절')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이일 수도 있다.('동쪽 의 숲')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서 찾아든 낯선 과거('사물과의 작별', '잘 가, 언니')이거나 확고하다 믿던 자신의 세계가 깨지는 순간('산책자의 행복')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낯설음의 발견은 때로 자연스러운 아닐 수도 있다. 낯선 이, 이방인을 향하는 눈길만큼이나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고 지켜 내려는 욕망도 강하기 때문이다. 조해진이 '빛의 호위'에서 전력을 다해 이방인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전작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보여준 갈등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을 향하는 마음이 방황 없이 만유인력에 의한 이끌림처럼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일지 모른다.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는 방송작가인 ''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난민으로서 살아간 탈북자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 밟아가는 시간들의 이야기이다. 불우이웃을 위한 모금 방송의 다큐멘터리 작가인 김은 얼굴의 종양이 거대한 혹으로 자란 소녀 '윤주'를 위한 방송을 준비한다. 방송에는 윤주의 사연과 얼굴의 혹을 제거하기 위한 수술의 과정을 촬영할 예정이었고 가장 많은 기부금이 몰리는 시점에 방송하기 위해서 일정을 3개월 연기한다. 그러나 3개월 뒤 윤주의 혹은 악성종양이 되고 만다. 자신의 결정으로 윤주의 종양을 제거할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한 김은 절망한다. 그는 우연히 벨기에 브뤼셀로 간 탈북자 'L', 로기완의 기사를 접하고는 그의 여정을 뒤쫓으면서 윤주의 자신의 연민이 정말 책임 있는 행동이었는지 고민한다. 윤주의 미안함과 책임감이 실상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김은 로기완이 브뤼셀에 있던 동안 썼던 일기를 얻게 되고 그의 행정을 뒤쫓는다. 김은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의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로기완을 만났다', 57)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짜' 연민의 그를 둘러싼 고민은 방송을 위해서 누군가의 불운한 삶을 재구성해야 하는 자신의 일이 타인의 불행을 감정적으로 소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일 뿐이란 회의감에서 비롯된다. 김의 그런 불안감은 그의 연인이자 동료인 PD 재이의 냉소 때문이기도 하다. 재이는 연민을 "자신의 현재를 위로받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대상화하는, 철저하게 자기만족적인 감정"(52)이라고 비난한다. 재이의 냉소적 태도로 인해 커지던 불안감이 윤주의 사건으로 폭발하고 만다.

 

김은 로기완의 일기를 따라 그의 위태로운 삶을 되짚어 간다. 함께 북한을 탈출했던 어머니의 시신을 병원에 팔아서 번 돈으로 도착한 벨기에서 난민으로 살아갔던 로기완의 죄의식 위에 윤주의 죄의식을 품고도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의 인생을 겹쳐 놓으려고 한다. 김이 자신을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 삶을 배워가고 있는 사람"(91)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 때문이다. 김은 로기완을 돕던 의사 ''"고백의 형식을 빌려 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순간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과정이 정당했다는 것을 완벽한 타인으로부터 확인"(120) 받으려는 욕망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그건 김의 욕망이기도 했다.

 

김은 로기완의 행적을 뒤쫓으면서 그와 동일한 감정을 느껴보려고 한다. 그러나 돌아갈 곳 없는 난민이 돼 낯선 타지에서 방황하던 로기완과 돌아갈 안정된 삶이 있는 김의 체험이 같을 수는 없다. 김은 로기완이 일기에 담지 않은 많은 감정들을 자신의 상상으로 채워 넣는다.

 

일기에는 적혀 있지 않았으나 그럴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아프게 고동쳤을 로의 박동소리를 나는 들을 수 있다. 그만둘 수는 없었다. 로에겐 배가 고프다는 감각이 실질적인 고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미 학습돼 있었다.(103)

 

그의 일기를 따라 걸을수록 익명의 탈북자 L에서 로기완으로, 그의 체험은 잘 알고 있는 무엇이 돼 가고 그의 감정 역시 김의 것이 돼간다. 그러나 과연 김이 느낀 게 로기완의 감정이었을까? 소설은 난민 지위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영국으로 떠난 로기완을 김이 만나는 순간에서 멈춘다. 로기완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가 일기를 통해서 배운 로기완이 그의 본모습인지 아니면 방황하는 자신을 타인의 일생과 겹쳐 놓음으로써 위로받으려고 했던 상상이었는지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소설은 김의 절박한 마음 쪽으로 많이 이끌려간 듯 보인다. 브뤼셀에서의 로기완의 여정을 거의 다 따라잡았을 때, 김은 항암치료로 윤주가 잃어버린 한쪽 귀가 자신을 찾아온 것 같은 환영을 본다.

 

너의 오른쪽 귀는 내가 영원히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을게. 그 귀가 끝내 하지 못한 말, 그 말을 듣기 위해 나는 살아갈 터이다. 그러니 윤주야, 너는 이제 네 앞의 괴물과는 싸우지 마. 그건 승패가 없는, 이겨도 진 것과 같은 소모적인 게임일 뿐일 테니.(181)

 

김은 자신이 윤주의 상처와 위태로운 삶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윤주의 김의 연민은 진심이지만 동시에 멀리서 전해 들은 윤주의 삶의 연민일 뿐이다. 그가 들은 윤주의 고통은 정말 윤주의 것일까? 아니면 김이 견딜 수 있도록 재현된 감각일까? 김과 윤주의 재회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진심은 확인받지 못한 감정으로 머문다. 김이 배운 로기완과 실재의 로기완이 같은 이인지 확인받지 않고 소설을 끝맺었듯이 말이다.

 

소설의 서술자는 김의 절박한 마음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로기완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김의 소망이 올바른 길이었는지 확인시켜 주지도 않는다. 소설은 "만나는 것 그 자체보다 그 만남을 준비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172) 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머문다. 이방인의 삶을 통한 구원의 열망과 낯선 이방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의 의구심의 갈림길 사이에서 소설은 전심전력을 다하는 간절한 마음을 따스하게 지켜보는 자리에 멈춘다.

 

단편집 '빛의 호위'에 묶어 있는 소설들이 취하는 태도는 '로기완을 만났다'와는 사뭇 다르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은 흐릿해지며 자신의 삶의 근간들도 불확실한 것으로 바뀐다. 낯선 이방인 로기완의 김의 확신이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존재의 낯설음이 채워간 것이다. 산책자의 행복은 확신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낯설음의 감각을 선명하게 해 준다. 그 감각은 '빛의 호위'로 묶여 있는 소설들의 심부에 자리하고 있기에 이 작품이 소설집 전체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대학강사였던 홍미영은 강단에서 자리를 잃은 뒤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진다. 그는 야간에 일하는 편의점에서 자신을 알아본 학생들뿐 아니라 그에게 의지했던 영민한 유학생 메이린조차 외면한다. 그는 메이린의 조언자 '라오슈(老師)'였으나 이젠 그가 메이린에게 했던 조언을 따를 힘이 없는 위태로운 삶으로 전락한다. 친구 이선의 죽음으로 방황하던 메이린에게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127)하라고 조언했던 미영은 다가오는 어머니의 죽음과 생활의 기반을 상실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에게 살아 있다는 감각은 이제 고통일 뿐이다. 메이린을 견디게 했던 '살아 있다는 감각'의 의미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무엇이 돼 버린 것이다. 미영은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살아 있음을 선택하지만 그의 삶은 "목적 없이 뻗어 있는 길 한가운데서"(140) 서성이는 길 잃은 이방인이 되고 만다.

 

'산책자의 행복'에서 미영을 향하는 메이린의 문장들은 로기완의 일기와 달리 자기 삶의 확신으로 그를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견고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삶과 변화된 현재 사이의 간극을 벌려 놓을 뿐이다. 이제 타인은 로기완처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낯선 이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문주'의 작중 화자인 '문주'는 철로 옆에 버려진 그를 발견한 기관사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계 프랑스인이다. 그는 한국의 영화감독 서영의 제안으로 자신을 도와준 기관사와 친부모를 찾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으로 온다. 그러나 한국에서 문주의 과거를 찾는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의 입양 과정을 담당했던 베로니카 수녀는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었고 문주를 발견했던 기관사의 이름도 알아내지 못한다. 문주는 복희식당의 늙은 여주인에게 자신이 "내가 넘버 원 사랑하고 미안한 사람, 그 사람이랑 닮았"(215)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이 죽어 가는 그녀의 잃어버린 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버린 건 아니라고, 언제 죽어버릴지 모르는 철로 같은 곳엔 더더욱 버리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해달라고, 깨어난 그녀에게 어쩌면 나는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소리를 질러댈지도 몰랐다.(217)

 

 

그러나 문주는 자신의 바람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의 삶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과거와 그를 도운 낯선 이에 대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 멈추어 선다. 문주는 자신을 발견했으리라 추정되는 기관사의 동료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서 전해 듣게 된다. 문주를 발견한 기관사가 그녀를 안전한 고아원으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직접 아이를 돌보던 한 달간 최선을 다했었다는 걸. 한국에 온 뒤로 '문주'라는 자신의 이름이 실상 '먼지'의 사투리가 아닐까, 그처럼 누군가에게 중요한 적 없이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란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문주에게 필요했던 건 자신이 누구인지, 그가 누구였는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