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 인터뷰] 신준영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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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밖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다. 북측 사람들은 남측 역사학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북측 관계자들도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남북공동발굴조사단에 합류해 2007년 개성에 도착한 신준영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사무국장은 그때의 긴장감을 회상했다.
"첫해에는 북측에서 조사단원들을 하나하나 지켜보는 사람들을 내보냈어요. 간첩이 있나 싶었겠죠. 그런데 그러던 것이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니까 점점 자기 사무실에서 나오질 않아요. 자기들도 성가시고 어차피 저 사람들 땅만 쳐다볼 걸 알게 됐기 때문이죠."
신준영 사무국장은 역사학자들보다 앞선 1998년부터 기자의 자격으로 북한을 오갔다. 34년 동안 수감돼 있던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씨를 취재했던 것이 인연이었다. 그의 기사로 알려진 리인모 씨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에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북한을 오가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가깝게 알고 지내던 역사학자들이 그에게 불평하기 시작했다. "너 혼자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우리도 좀 같이 가자."
그 후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구성됐고, 2001년부터는 평양에서 학술회의도 열 수 있었다. 2004년까지는 회의만 반복하다 아예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오랫동안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평양은 외부인의 장기 체류를 허가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공간이 개성이었다.
그렇게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는 여러 차례 교류 후 쌓아 올린 성과였지만, 다시 새로운 문제들을 드러내기도 했다. 잠깐 만나는 회의와 한 달 동안 남측 사람들이 개성에 장기 체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감시의 눈'은 차라리 예상했던 바였다. 신문지가 문제가 될지는 몰랐다. 상점에서 안전을 위해 100개의 전구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쌓아주었던 신문지는 남한의 소식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모두 벗겨낸 후에나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측조사단에는 기록을 위해 사진가가 있었는데, 북측은 땅만 찍으라고 했다. 민가도 촬영하면 안 되고, 만월대가 자리한 송악산도 촬영하면 안 되고, 오로지 땅만 찍으라고 했다. 눈앞의 풍경도 담을 수 없던 사진가는 열불이 났다. 북측 관계자들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장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았고, 자기 자리에서 꿈적하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미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게으름'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북측 관계자들은 각자 맡은 업무와 자리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북측의 규율이었다. 촬영을 허가하는 범위도 야금야금 늘어났다. 감시하던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던 것도 그때쯤이었다.
결국, 처음에는 북측 관계자들을 미워하던 사람들도 이젠 모두 '개성병에 걸린 사람들'이 됐다.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중단된 지금은 남측조사단원들만 모이고 있다. 전국에서 모인 송년회에서 사람들은 이제 다시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를 개성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기에 바쁘다. 북측 사람들과 오고 갔던 대화와 민속여관에서 내오던 오이냉국을 떠올린다. 모두 좋은 기억뿐이다. 그래서 스스로 개성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우리와 달리 북한은 관계자들이 거의 바뀌지 않아요. 이제 벌써 13년이 됐으니 정이 들만도 하죠."
남측조사단의 도시락을 챙겨주던 북측은 늘 식사를 넉넉하게 내왔다. 하지만 양이 적은 남한 사람들이 자꾸 음식을 남기자, 북측은 주변 마을에서 강아지 두 마리를 데려와 잔밥을 먹이고 만월이와 송악이로 이름을 지었다. 남북공동발굴사업이 중단되면서 남측 사람들도, 평양 사람들도 데려갈 수 없었던 만월이와 송악이는 마을로 돌려보내졌다. 다시 개성에 가면 볼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사업 중단이 길어지면서 만월이와 송악이는 애꿎은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신준영 사무국장은 남북공동발굴사업이 중요한 민간교류이자 보다 큰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고고학자였고 역사학자이지만, 내일은 바둑 두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기자가 될 수도 있겠죠. 그렇게 북한에도 있고 우리도 있는 다양한 직업의 남북한 사람들이 어떤 계기로 자꾸 만나면 정이 들겠죠. 이렇게 장기적으로 한 공간에서 100명이 넘는 남북의 사람들이 득실득실하면서 같이 일한 적이 없어요. 만일 만월대 공동발굴사업이 종료된다고 해도 이러한 교류협력이 어떤 다른 형태라도 이어져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