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리터러시

이안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에서 내가 읽은 것은 시 '몸길'이 보여주는 바 어떤 조화로운 생태적 공간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고통스러운 도정이다. 그 세계는 지금껏 쓰인 상당수의 생태 시들이 보여준 도시인에 의해서 '발견'된 자연이나 또는 유년적 농촌 경험과 아직 훼손되지 않은 농촌 체험을 빌려 재구성된 자연 친화적 농경사회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읽은 대개의 생태시류(流)의 작품들은 그 세계를 찾는 자의 그럴 만한 삶과 의식의 변화나, 그 변화에 당연히 따를 법한 어떤 고통스러운 단절과 반성의 모습을

조성철
기사 듣기

이안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에서 내가 읽은 것은 시 '몸길'이 보여주는 바 어떤 조화로운 생태적 공간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고통스러운 도정이다. 그 세계는 지금껏 쓰인 상당수의 생태 시들이 보여준 도시인에 의해서 '발견'된 자연이나 또는 유년적 농촌 경험과 아직 훼손되지 않은 농촌 체험을 빌려 재구성된 자연 친화적 농경사회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읽은 대개의 생태시류()의 작품들은 그 세계를 찾는 자의 그럴 만한 삶과 의식의 변화나, 그 변화에 당연히 따를 법한 어떤 고통스러운 단절과 반성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냈다고 보기 힘들거니와, 시단의 현실과 관련하여 더 깊이 따져 들어가 보면 주류적 흐름을 과도하게 의식한 시 쓰기라는 혐의마저 지울 수 없다.

 

물론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이 생태적 세계를 자기화하기까지의 남다른 도정을 드러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시적 설득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영진의 매우 친절한 해설에도 불구하고 시를 되풀이해서 세심하게 읽지 않으면 그 도정을 이루는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이안의 시 언어는 지나치게 자기 현실을 은유의 세계 속에 감추고 있으며, 그런 만큼이나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긴장과 절제의 미덕을 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의식의 밑바닥까지를 포함한 삶의 리얼리티는 시 언어의 숙명적인 자리인 비유의 세계와 대립적인 관계가 결코 아니며, 또한 그것은 비유의 세계를 산문적 해석의 층위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적 상상의 생생한 촉매이자 바탕이 된다. 시가 경계해야 할 것은 리얼리티가 아니라 체험을 가장한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표현인 것이다.

새하얀 눈밭을 잇던

 

새의 발자국 급히 끊겼다

새는 전후좌우

어디로 마음을 낮추고 갔나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은 걸어서

얼룩만을 남겼으니

 

발자국도 화가 나면 자기가 끌고 온 삶을

허공 속에 꽁꽁 처박아버린다

'성난 발자국' 전문이다. 우리가 이 시에서 보는 것은 비상하는 새도, 지상의 눈밭을 걸어가는 새도 아니고, 새가 남겨놓은 눈밭의 발자국일 뿐이다. 시의 진술에 의하면 그 발자국마저 "급히" 끊겨 있으며, 그 흔적은 눈바람 속에 얼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연의 "걸어서"라는 표현은 "얼어서"의 오기가 아닐까.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이란 표현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늘이 아닌 지상의 새, 먹이도 없는 눈밭의 새의 발걸음, 그 새가 사라진 공간에 고통스러운 자취로서 남겨진 그 발자국은 시인이 살아온 삶의 행려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인이 지금 침통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지향해야 할 길마저 끊긴 곳이며, 거기서 얼어가고 있는 어떤 궤적으로서의 발자국이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얼룩"으로 변질된다. 시인이 처한 현실의 구체적인 정황은 짐작할 수 없지만, 시의 정황이 드러내고 있는 전언은 과거의 역정과 현재적 삶의 깊은 단절이며, "얼룩"이 말해주는바 치욕으로서의 현실 인식이다. 4연의 시의 흐름을 한곳으로 이끌어내는 결절점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가 나면", "처박아버린다" 등의 감정적 진술 속에 묻어 있는 과장된 제스처가 행간에서 크게 걸리거니와, "허공"이랑 시어가 "발자국"과의 연관 속에서 적실하게 사용되고 있는지도 나로서는 회의적이다.

누가 저 불 속에

한 채를 지었나

 

밤마다 부처를 붙잡고

새빨갛게 뜯어먹는 이놈은

또 무엇이냐?

풀은 풀을 뜯어먹고

 

잡아먹고

기를 뿐이나

오늘도

삶은 빼도 박도 못할 곳에서

새빨간 핏덩이가

불덩이 반찬을 먹고 감

- '茶毘' 전문

 

다비(茶毘)란 수행자의 생애와 그 지향, 그리고 일체의 인연을 불로써 무화 시켜 소멸의 세계로 돌려주는 의식일 것이다. 시인은 단절과 치욕으로 자신의 앞에 비루하게 남겨진 "자기가 끌고 온 삶"을 다비와 같은 제의로써 무()로 돌리고 현실로부터 초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불 속에/절 한 채를" 짓는 것, 불 속에 자신의 삶 일체를 공양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일 터이다. 시의 2연에서 시인은 그러나 자신의 그와 같은 태도가 "부처를 뜯어먹는" 또 다른 이지러진 욕망임을 깨닫는다. 이어지는 ""이 세계는 욕망과 무관한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시인의 태도와 선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난다. 결국 시인에게 남겨진 것은 "빼도 박도못할" 오늘의 삶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 삶의 실체를 시인은 "새빨간 핏덩이가/불덩이 반찬을 먹고" 가는 것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나는 욕망이 육신 혹은 삶을 먹어치우는 상쟁(相爭)의 현장으로 읽는다. "새빨간 핏덩이"라는 이미지는 붉게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불덩이 반찬"이라는 이미지는 그 불에 타는 육신을 연상하게 한다.

 

앞으로 가는 길은 끊겼고, 이상적 세계를 향한 젊은 날의 어떤 열정과 기획은 현재로 이어질 수 없는 과거가 되어 얼룩이 되었다. 또한 세계와의 불화를 건너기 위해 초월을 꿈꾸었으나 그 꿈은 자신을 완강하게 붙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 좌절된다. 이쯤에서 어떤 이들은 시인의 삶을 압도하며 전면화(全面化)될 현실의 구체적 실상을 기대할는지도 모른다. 그 세계가 이안의 시집에서 가능하다면 그것은 자본과 욕망의 한 분자로 전락해 가는 삶의 비애나 자신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것들에 대한 격렬한 풍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 세계는 그러나 그의 시집에서 악몽의 한 장면처럼 잠시 떠올랐다 사라질 뿐 선명한 구축으로서 전개되지 못한다. '낮 동안'은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한 시이다. "새벽녘/아기는 가위에 눌리는지/여물지 않은 손톱이 허공에 할퀴고/잠꼬대를 하고/아내도 나도 아기처럼/이를 갈고 허공을 할퀴고/잠꼬대를 하면서/하다 만 낮 얘기를 주고받는데"와 같은 구절들은 ""이 상징하는바 현실 세계가 시인의 가족과 삶을 얼마나 끔찍하게 억압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에게 현실은 악몽과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안은 그의 시의 좌절을 상쟁과 대립의 길로 이끄는 대신 상생과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눈밭 속에서 얼어가는 발자국('성난 발자국')을 녹이는 치유로의 전환이며, 자신의 좌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의미를 자기 내부 속에서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것들의 삶 속에서 동시에 이해하려는 공생적 태도로의 전환이다.

천둥 번개 지나간 곡우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혀 살아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 '숨길 1' 전문

시의 첫 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떤 정신적 위기 상황이다. 천둥 번개-곡우, 우박-꽃잎 사이에 시가 아슬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때아닌"이란 시어가 뜻하고 있듯이 그것은 예정된, 혹은 예측 가능한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카오스적 정황을 예비하고 있는 긴장된 시간대이자 공간이다. 상식으로 보자면 우박의 공격적 성질이 수동적 존재인 꽃잎을 일방적으로 으깨어버릴 듯한, 그런 상황에서 시는 그러나 자기의 급작스런 전환을 받아들일 한 점의 틈도 주지 않고 전혀 낯선 진경을 펼쳐 낸다.

시의 2연에서 우박과 꽃잎의 관계는 서로 몸이 부딪치되 "들숨과 날숨"이라는 생성(生成)의 숨결로 부딪쳐 전혀 새로운 관계로 전환되며, 또 다른 연에서 그 관계는 서로의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는 상호 수용의 관계로 확대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각각의 존재가 놀라운 질적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인데, 그 변화의 구체적인 형상은 다치지 않게 꽃잎을 깨우기 위해서 "자기를 녹"이는 우박과, 우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찢"는 꽃잎의 능동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서로를 향한 자기 수정과 헌신적인 희생으로 말미암아 위태롭던 "우박과 꽃잎 사이"의 대립과 갈등의 공간이 화해의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 창조의 공간, 다시 말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공간으로 되고 있다.

'숨길 1'은 지금껏 적대적인 존재로 이해했던 타자(他者)에 대한 긍정과 수용의 세계이며, 또한 그를 통해 삶 혹은 생명이 질적 도약을 이루는 상승의 세계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변화의 동력을 끌어내는 시인의 윤리적 태도가 지나치게 전면화되어 있다. "자기를 녹"이고 "자기를 찢어" 낯선 세계를 자신의 몸으로 동화시키는 우박과 꽃잎의 형상이 그것이다. 나는 그 형상의 서술에서 현저하게 약화 된 시의 리얼리티를 보거니와, 시에 있어서 경험적 감각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다.

바랭이 쇠비름 명아주 강아지풀 박주가리

환삼덩굴 털진득찰 도꼬마리 개망초 여뀌

듬성듬성 고추가 자라는

비알밭

양낫 한 자루

내가 서 있다

'몸길'의 전경이다. 시인이 "고추가 자라는 비알밭"을 찾는 것은 갖은 이름으로 호명된 풀들을 베기 위해서이다. 시인에게 그 풀들은 단순한 노동의 대상이 아니다. 시인이 곡진하게 이름을 부르고 있는 데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것들은 시인의 삶의 정서를 이루고 있는 "누대로 정든 이름들"이며, 서로가 생명의 한 고리로 살림을 이루어나가는 공생의 세계이다. "바랭이가 쇠비름에게 쇠비름이 명아주에게/환삼덩굴이 도꼬마리에게/하는 것처럼"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그 세계의 의미를 깊이 의식화한다.

내달리는 소서(小暑)의 비알밭을

풀보다 낮게 긴다

양낫 한 자루

참 다정히도 부르며 어루만지며

손목 잡아당겨 끌어안으며

양낫으로 은유 되는 인간의 노동과 자연인 풀들 사이에도 인간 우위의 대상화된 관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양낫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의 행위는 풀의 세계를 향해 겸양의 태도로 행해지며("풀보다 낮게 긴다"), 자연계 전체의 상호 생존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각자의 생명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공양하는 불성(佛性)의 태도로 이루어진다 ("참 다정히도 부르며 어루만지며").

 

비알밭 떼메고 입산하는 환삼덩굴이

하산길의 칡넝쿨 개망초가

내어는 밭골 따라

드문드문 인적의 징검돌

비린 몸길을 낸다

 

참으로 지극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산을 오르는 환삼덩굴에게 합장하듯 길을 내어주는 칡넝쿨과 개망초. 나는 앞에서 불성의 태도라고 말했거니와, 나눔과 배려의 마음이 있을 뿐 어떤 경계의 자리나 지배의 욕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시인의 지난날을 괴롭히던 일체의 인간 문제가 소멸되고, 전혀 새로운 생태적 · 윤리적 관계만이 오롯하게 빛나고 있다. 산문의 세계가 소멸된 자리에 들어선 어떤 경전의 비유 세계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인가. 인간의 정신이 찾아낸 대개의 유토피아가 그렇듯이 나는 그 세계가 아름답다기보다 두렵다.

나는 이안이 그의 현실의 삶과 생활, 그리고 내면을 이루고 있는 질문과 부정의 세계를 바로 그가 몇 편의 시에서 성취한 유토피아의 눈으로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럴 수 있다면 그의 시에서 현실-유토피아 사이의 입체적 자장이 생길 뿐만 아니라, 또한 현실과 산문의 세계에 지나치게 긴장되어 입을 다물고 있는 그의 언어도 어렵지 않게 말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박영근

 

1958년생. 시인. 1981반시로 등단.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 김미순,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리터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