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신간

이은옥 시집 『나에게는 천 개의 서랍이 있다』

조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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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축제에 합류하기위한 말들이 잘 맞아떨어지게 만들기 위해, 세상의 빠른 변화와 기억과의 간극의 언어를 불러오는 시인이 있다. 그리하여 끝끝내 기억을 시로 적어 시간을 무화(無化)시키고 몽상에 드는 시인이 있다. 시의 곳곳에 나타나는 구름처럼 모습은 변하고 유유히 흘러가지만 또한 돌아오려는 이은옥 시인이 있다.

 

성큼성큼 앞서가던 시간이 문득 돌아보는 곳에 백지를 앞에 두고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세상의 변방에 자신을 놓아두면 일상과 백지의 틈으로 유년의 옛집이, 손때 묻은 고향의 사물들이, 살아온 흔적들이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이렇게 쌓인 기억이 서랍처럼 닫혀 있다가 입을 열면 시인은 귀 기울여 백지에 받아 적는다.

 

기록은 기억이 소멸하는 현재에서 시인의 삶의 존재를 증명한다. 상황 혹은 사건이 자신의 감각과 사고(思考)로 재구성된 것이 기억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시인이 원하는 삶의 방향에 관여한다. 기억이 기록되는 방향은 시인이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킨다. 시로 기록되는 유년과 고향, 혈육, 친구들은 시인의 뿌리로서 과거이면서 시인이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으로서의 미래. 기록된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수직적 시간을 허물며 시인을 현존하게 한다.

 

고향인 바닷가 마을과 지금 살고 있는 대도시 사이, 가족들과 친구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 유년의 시간과 성인의 시간 사이에서의 괴리를 시인은 온몸으로 느끼며 흔들린다. 그럴 때 도시 일상의 틈인 에 시인은 자신을 내려놓는다.

 

4부로 되어있는 시집에서 시인은 각 부마다 의미 있는 소제목을 붙였다.

 

1부는 초극(超克) : 수런거림과 두리번거림 사이에서 조롱을 사다이다. 첫 시 앵두에서의 앵두처럼 시에는 시인의 내장알몸까지 녹아들어 있다. 여기, 스스로 변방의 생일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처럼 고요하고 차가운겉모습 속에 들끓는마음을 지닌 사람, 그리하여 분열하는 모습을 시로 쓸 수밖에 없는 시인이 있다. 그는 세상의 빠른 변화가 가져온 광기와 변태가 들끓는 지금의 삶이란 결국 공중에 살고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허공에 떠 있는 삶에서 우리를 울렁이게 하는것은 기억 속 유년과 고향, 가족들, 친구들이다. 세상의 변화 속에서 시인은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 같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질은 사람다움일 것이다. 시인의 기억이 자주 유년과 고향으로 향하는 것은, 그 시절이 사람다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급류에 떠밀려가듯 변화의 시간 속을 가고 있는 불안함 속에서 그는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잃지 않기 위해 기억이 가져오는 옛 모습을 시로 쓴다. 이러한 시들이 모인 제1부의 제목이 초극(超克)”인 것은 적확하다.

 

2부는 간극(間隙) : 광화문에서 수천 개의 떨어지는 달을 줍고, 해가 떴다. 행적에 불과한 한 편의 기록이다. 22년 동안 일상은 비슷하게 반복되었지만 세상에는 숱한 변화가 있었다. 일상을 반복하는데도 시간의 틈이 만든 차이들을 시인은 장시(長詩)로 기록한다.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어떤 시대를 횡단해 왔는지를 새삼 알게 된다.

 

3부는 장극(牆隙) : 틈으로 갈라진 경계마다 기호들이 난립하고 변방에서 개인의 질서를 정립하는 방법을 서설하다이다. 일상에서도 문득 서먹서먹한 틈이 느껴지는 감각과 생각이 중심이 되는 시들의 단어나 문장을 따라가보면 그 틈으로 흘러내리는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주인을 따라가지 못한 검정개와 함께 고향의 빈집을 끝내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삶의 어지러움을 물리치려 운문(雲門)”에 들었으나 삶을 향한 마음이 쉽게 닫히지 않는다. 폭우, 사망, 실종 등의 현실을 뒤로 하고 다시 한번 문조기를 잡으면 마음은 열림과 닫힘 사이에서 유년의 기억으로 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은 불안하다. 음악과 사유몽상으로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불안을 사라지지 않는다. 유년과 고향에 대한 기억의 문을 열어놓고 시인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늘려 간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기억들을 시의 언어로 적는다.

 

기억이 기록되어 삶을 증명함에도 불구하고 생()은 텅 빈 액자이며 그 속의 캄캄한 밤은 두껍다고 느낀다. 두꺼운 어둠을 오래 지나온 시인은 깨닫는다. 삶 혹은 당신을 안다는 것은 정말 모르는 것과 같다. “삼국지수족관 속“TV뉴스속 전쟁과 장상에서 옥수수 먹는 다큐가 다르지 않다고. 그러므로 사과구두나무이라는 각각의 사물 사이가 무관하지 않다고 삶의 오두막에서 새가 된 사내에게 편지를 쓴다.

 

현재 삶과 과거의 기억 사이에서 불안한 시인은 삶의 질서를 정립하려 하지만 여전히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출가를 꿈꾼다. 그리하여 제4부의 제목은 세극(細隙) : 바람의 틈으로 구름이 난분분하고, 출가를 자극하다가 된다.

 

세상사에 흔들리던 시인은 마음을 정화하고자 흑자색꽃 속에 물을 받아 몸을 씻는다. 그리고 나를 내다버린구름 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또한 빈 들 빈집에 들어가텅 빈 상자가 되고자 한다. 그렇게 빈 마음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끝내 자신을 내다 버리지 못한 시인은 나와 너, 화자와 시인,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에서 처음처럼 그 안에서 흔들리다, 처음처럼 그 안에서 죽기로 한다. 그런 결심 속에서 모든 풍경은 공사 중이고 시인도 자신을 도색 중이다. 모든 일상과 여러 곳으로의 여행을 지나 기억은 고향으로 회항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뿌리인 고향을 기록하는 아름다운 시를 완성한다. 첫 시이면서, 마지막에 위치해 있는 어성전의 봄···.

 

오래 기다려온 이은옥 시인의 시집이 당도했다. 천 개의 서랍 일부가 열렸다. 열린 서랍에서 날아오른 시의 날개 무늬는 아련하게 슬프고 불안하게 아름답다. 여기, 섬세한 기억을 가진 시인이 있다. 빠르고 빽빽하게 흘러가는 도시의 현재에서도 그는 느리고 깊게 새겨진 유년과 고향의 기억을 퍼 올려 언어로 기록한다. 이은옥 시인의 시들을 읽으며 독자들도 각자 자신의 기억 속 서랍을 열어볼 것이다. 시의 무늬를 더듬으며 오랜만에 느리고 깊고 편안한,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겨울의 빈 들을 지나가는 바람 같은 헛헛한 숨을 쉬기 시작할 것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많은 서랍이 빨리 열리기를, 그리하여 새로운 언어의 무늬가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김유자

 

2008<문학사상> 등단, 시집 고백하는 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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