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어 포터는 1990년대 과학사·사회학 분야에서 가장 독창적 저작 중 하나인 『Trust in Numbers: The Pursuit of Objectivity in Science and Public Life』를 썼다. 1995년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출간됐고, 한국어판은 2021년 한울아카데미에서 나왔다. 이 책의 논지는 한 문장으로 축약된다. "숫자는 객관성의 도구가 아니다. 주관성을 견딜 수 없는 사회가 만들어낸 통치의 언어다."
포터의 논증은 19세기 프랑스 공공토목 기술자들의 사례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다리·도로·운하 건설 프로젝트의 타당성을 평가할 때, 전통적으로 '숙련된 기술자의 판단'에 의존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과 부패 의혹이 누적되자, 판단은 '비용-편익 분석'이라는 수치 계산으로 대체됐다. 이 전환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다. 정치적 신뢰 붕괴에 대한 대응이었다. 숫자가 '합의할 수 없는 사회의 합의 장치'로 자리잡은 순간이다.
포터는 이 패턴이 19세기 이후 전 사회 영역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회계의 기업 경영 지배, 측정 의학의 임상 판단 대체, 계량경제학의 정책 분석 장악, 교육 표준화시험의 학습 평가 통제 등. 각 영역에서 '전문가의 암묵적 지식'은 '숫자의 명시적 절차'에 자리를 내줬다. 이 과정에서 잃은 것은 뉘앙스와 맥락이다. 얻은 것은 책임 소재의 분산과 권위의 표면적 중립화다.
포터는 '숫자에 대한 신뢰'가 두 가지 전제 위에 서 있다고 본다. 첫째, 측정이 실재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믿음. 둘째, 측정 결과를 공유하면 누구나 같은 결론에 이른다는 믿음.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측정도 '무엇을 측정할지'의 선택에서 자유롭지 않고, 같은 수치라도 해석자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온다. 결국 숫자는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계산 규칙의 산물'이다. 포터는 이를 "기계적 객관성(mechanical objectivity)"이라고 부른다.
2026년 한국의 공공 통계 논쟁은 포터의 분석에 정확히 부합한다. 산업재해 통계에서 하청 노동자 집계가 완전히 반영되는지, 탄소 배출량이 스코프 3(공급망)까지 포함하는지, 대북 제재 이행 보고에서 북한 해외 노동자를 '연수생'으로 분류할지 '노동자'로 분류할지 — 이 모든 분류 결정은 '기술적' 선택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선택이다. 포터의 언어로 말하면, '어느 숫자를 어떻게 계산할지'를 결정하는 순간 이미 결론의 상당 부분이 정해진다.
2026년 4월 두 개의 사례가 이 패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첫째, 한국ESG기준원의 평가모형 개정이다. 공급망 관리 지표 가중치를 5%에서 9%로 올리고, 스코프 3 배출량 공개를 고위 지표로 편입했다. 이 조정은 '기술적 개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국 대기업의 글로벌 공급망 책임을 강화하는 정치적 선택이다. 어떤 기업은 이 개정으로 등급이 떨어지고, 어떤 기업은 유지한다. 둘째, 성평등가족부의 아이돌봄서비스 실태조사다. 조사 대상에 '비이용 가구'를 새로 포함했고, 대기 시간 산출 방법도 변경됐다. 같은 '돌봄 공백'이라도 새 방법으로는 다른 수치가 나온다.
포터의 책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장은 6장 '정량화의 정치학'이다. 그는 민주 사회가 숫자에 의존하게 되는 역설을 설명한다. 전문가 판단의 권위가 약해지고 시민의 참여 요구가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숫자의 지배력이 강해진다. 왜냐하면 숫자는 '누구의 편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외관은 착시다. 숫자는 언제나 '누군가의 선택'의 결과물이며, 선택의 책임은 계산 과정의 복잡성 뒤로 숨는다.
이 분석은 AI 규제 논쟁에도 직접 적용된다. 2026년 한국의 AI 기본법은 '고위험 AI'를 지정하고 사전 영향평가를 의무화한다. 그러나 '고위험'의 정의는 수량화된 기준(예: 영향 인구 수, 오류 확률, 편향 지수)으로 표현될 가능성이 크다. 캐시 오닐의 『대량살상수학무기』와 포터의 『숫자에 대한 신뢰』는 30년 시차를 두고 같은 경고를 한다. 수치 기반 거버넌스가 투명성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치를 만드는 권력'이 새로운 불투명 영역이 된다.
포터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출구를 제시한다. 완전히 '수치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대신 '수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사회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는 이를 '민주적 계산(democratic computation)'이라고 부른다. 공공통계의 생산 과정 자체에 시민사회·학계·언론이 참여하고, 숫자의 한계와 전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관행을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2026년 한국은 이 '민주적 계산'의 인프라를 일부 갖추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국가통계포털(KOSIS), 국회예산정책처의 독립 분석, 국책연구기관의 공공데이터 공개 등이다. 그러나 여전히 핵심 통계(고용·부채·ESG·AI 영향)의 방법론 결정 과정은 불투명하다. 『Trust in Numbers』가 1995년에 제시한 진단은, 2026년 한국에서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이번 주 추천 독서: Theodore M. Porter, 『Trust in Numbers: The Pursuit of Objectivity in Science and Public Lif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324p) / 한국어판 『숫자에 대한 신뢰』(한울아카데미, 2021). 병행 독서로 Sally Engle Merry, 『The Seductions of Quantification』(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그리고 한국 맥락으로 이재열 『통계의 정치학』(한길사, 2023)을 추천한다. 『체르노빌』 관람 후 이 책을 읽는 것이 2026년 봄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포터가 말한 '숫자는 주관성을 못 견디는 사회의 통치 언어'라는 명제는 2026년 공공통계·AI 규제·ESG 평가 논쟁의 공통 뿌리다.
하청 노동자 집계, 스코프 3 배출량 포함 여부, 북한 노동자의 '연수생' 분류 등 분류 선택 자체가 결론을 결정하는 정치적 행위다.
공공통계 생산 과정에 시민사회·학계·언론의 참여를 제도화하는 '민주적 계산' 인프라가, 숫자의 불투명 권력을 완화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