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민주주의

자유국가에 관하여

조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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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대한민국은 8강에서 스페인과 맞붙었다. 승부차기에서 골대를 사수한 골키퍼 이운재는 하늘을 향해 쳐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합이 끝난 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축사를 남겼다. “오늘은 단군 이래 가장 기쁜 날입니다.”

 

일본 망명 시기 김대중 전 대통령.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일본 망명 시기 김대중 전 대통령.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단군 이래 가장 기쁜 날전까지 김대중 정권은 전국적인 규모의 노동자 시위에 직면해 있었다. 집권 후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였다. 특히 2001년 대우자동차를 GM에 매각하면서 노동자 1,750여 명이 해고되었고, 이 시위 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져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정부는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시위 관련자 수십 명을 대거 구속했는데 학생과 노동자 사회에서는 월드컵 공안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불어닥친 올림픽 공안시기에도 정부는 학생과 노동자들을 길거리에서 수거하듯 잡아들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1986년에 가택 연금을 당한 적이 있으니 지난 정권들이 한 수 가르친 축제 공안을 재현한 셈이다.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국제노동기구(ILO)는 김대중 정부에 구속 노동자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은 한국의 구속 노동자 석방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지만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월드컵 4강 달성이라는 축제의 정점에서 사회의 시야는 그림자에 미치지 못했다. 광장의 붉은 물결이 평소의 붉음과 사뭇 달랐던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축구 경기, 박지성은 결승 골을 넣고 영웅이 됐다. 그 전날 여중생 미선이와 효순이는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 이 사건은 월드컵의 열기가 가을 삭풍에 식고 나서야 시민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2010년으로 건너 뛰어보자. 용산 참사의 불지옥은 사회적 트라우마로 각인 됐지만 뒤이은 법정의 논리 지옥에 대한 기억에는 드문드문한 단절이 있다. 그때 우리는 천국을 겪고 있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첫 원정 16강 진출을 달성한 것이다.

 

자유국가 대한민국의 비밀은, 필연적으로 자유로워야 할 우리의 시민성이 언제나 자유국가에 강제적으로 복종할 의무보다 한참 아래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자유의 공동체에 결속된 것이 아니라 결박당하고 있다. 이 나라는 분명히 자유롭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자유의 수혜자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의 인질이다.

 

자유국가에서 우리가 만나는 가장 일반적인 자유주의자의 유형은 시장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적 주류이며,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고, 언제나 규제의 철폐를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와 노동력을 유연하게 사용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외친다. 그들은 시장 질서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손인 이유는 어쩌면 누구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완전한 시장의 자유가 완벽한 시장의 질서를 창출해낼 것이다!” 완전한 자유는 정말로 완벽한 질서를 창출할까? 만약 그렇다면 법과 경찰력은 철폐되어야 한다. 그것들이야말로 자유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과도한 규제이기 때문이다.

 

2014, 법원은 쌍용자동차가 187명의 노동자를 급작스럽게 정리해고한 결정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따른 것이므로 합법하다고 판결했다. 그것은 오랜 기간 반복되어온 자유시장의 일상이다. 하지만 여기서 노동자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법원은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단행되어 사업 운영에 손실을 끼친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일관되게 처벌해왔다. 반면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단행되어 노동자의 생활에 손실을 끼친 정리해고를 처벌한 사례는 없다. 자유시장 체제는 경영자가 해고를 단행할 자유를 느슨한 합법으로, 노동자가 업무를 거부할 자유를 엄격한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비대칭으로 작용하는 이 자유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은 없다. 자유로운 해고가 노동자로 가득 찬 사회를 위해 정말로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자유로운 파업이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를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줄 것이다. 노동의 자유로운 착취가 사회 전체의 후생을 위해 정말로 이로운 기여를 하는가? 그렇다면 재산의 자유로운 약탈이 사회 전체의 후생을 위해 이로운 기여를 할 것이다. 규제는 나쁜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종류의 자유를 침해하는 규제가 나쁘다. 우리는 어떤 것을 방임하고 어떤 것을 규제하는 반쪽의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자유라면,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우리는 자유의 영역이 강제당한 자유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한편으로 자본의 무제한적 경쟁이 시장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해 준다는 주장이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국적의 무제한적 경쟁 또한 통치 체제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 해줄 것이다. 인간의 생산 가치가 상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면, 국적이 상품으로 평가받아선 안 될 이유가 없다. 우리 각각의 상품 가치가 시장 안에서 냉정하게 평가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모든 국가가 시장으로 나와 우리의 냉정한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

 

시장 약자의 연쇄 몰락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시장 전체에 이득이 된다며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해왔다. 경쟁력 없는 상품을 만들어 낸 생산자가 소비자의 외면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국민에 이롭지 못한 체제와 복지 제도를 고집하는 정부가 버려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우리는 왜 자유롭게, 또한 아무 미련 없이 더 나은 국적을 선택해 떠날 수 없는가? 이 나라의 국적을 선택해 남는 국민은 소수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국민을 유지해 존속할 만큼 충분한 매력과 역량을 가진 나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종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식동물의 벌판과도 같은 시장에 벌거벗긴 채 내몰린 시장 약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시장 안에서 수많은 종말을 보았다. 약자의 종말이 정말로 자연의 숙명이라면, 자명한 논리적 귀결로서 그것은 세계의 끝자락에 위치한 약소국의 숙명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자유주의의 또 다른 신도들은 표현의 자유론자들이다. 그들은 자유가 사상의 진화를 이끌어왔으며, 이 적자생존의 사상 경합으로 우리가 현재의 완숙한 체제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상을 검단 하는 규제들은 당장 철폐되어야 한다. 우리는 시장으로 불려 나와 철저히 매장당할 기회를 봉쇄당한 덕분에 주체사상과 공산주의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 적들을 보호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를 수호하는 법이다.

 

2014, 정부는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이므로 제재할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반면 2012, 사진작가 박정근 씨는 트위터에서 북한 계정을 리트윗(재전송)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리트윗으로 구속된 세계 최초의 사례이다. 영역이 특정된 표현의 자유가 부분적인 자유라면, 부자유란 존재할 수조차 없는 개념이 되고 만다.

 

우리의 자유로운 체제는 진정 자유로운가? 자유로운 체제는 우월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우월성을 실험할 자유로운 기회를 마땅히 반갑게 맞아들여야 한다. 시민을 적대하는 언론들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해온 법률마저 우리는 불평 없이 용인했다. 적이 존재함으로써 그들에 맞설 수 있었고, 때로 승리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제 우리는 더 큰 적을 원한다. 우리는 반국가단체를 원한다. 공산주의자를 원한다. 심지어 김일성주의자를 원한다. 우리는 그들을 불러들여 토론을 벌이고 짓이기고 박살 낼 기회를 원한다. 우리는 자유가 그 모든 것에 맞서 승리할 만큼 충분히 위대한 가치임을 확인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적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이 자유국가는 우리에게 적에 대해 알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자유는 우리를 억압하는 조건에서만 허용되는 비겁한 수단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합의 아래 자유에 대한 그러한 해석이 당장 폐기되기를 원한다.

 

시장주의자들은 복지가 인간을 태만하게 하며 경제에 지나친 부담을 준다고 말한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철거민들이 개발 자본 앞에 도태되는 현상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 각각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며, 그래야 건전한 경제 생태계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시장 기득권과 자유주의의 결합은 필연적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 각각보다 우리를 포괄하는 추상적 생태계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보조하는 의료 행위가 과연 필요한지부터 고민해보아야 한다. 의학은 생물학적 자유시장의 작동을 방해한다. 의학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장기적으로 질병에 원천적 항체를 가진 우수한 유전자를 선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수명을 넘어선 노인과 환자들이 소모하는 사회적 자원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자유주의자도 우수한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스스로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자연의 법을 거슬러 삶을 갈구하는 존재이며, 적자생존은 시장주의자의 본능과도 합치되지 않는 원리이다. 간단히 치료되는 감기몸살에 걸린 부자가 죽도록 방치하는 사회는 비인간적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 사회는 권리금의 회수를 보장하는 간단한 법률이 없어 철거민들은 재로 산화시키는 사회만큼이나 비인도적이다.

 

1955, 이스탄불에서 비()무슬림 소수민족에 대한 폭행과 성폭력이 난무하는 시가 난동이 벌어졌다. 훗날 정부 지원 조직들이 약탈은 자유다라는 말로 폭도들의 테러를 부추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유를 말할 때 무엇에 대해서만이라는 단서가 붙는 사회는 이미 충분히 자유롭지 않다.

 

1988, 서울에서도 괴한 네 명이 통일 행사를 준비하던 한 민족 단체의 사무실에 습격해 자물쇠를 부수고 각목으로 남성 회원을 폭행하고 여성 회원을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안기부와 군 정보부에 의한 조직적 테러라는 제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초동수사에서부터 조직 범행의 가능성을 배제했고 사건은 미결되었다. 2004, 전직 북파공작원이 이 사건이 정부에 의한 정치 공작이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을 요구해온 이 단체 우리마당의 대표 김기종의 외침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사적 투쟁으로, 분단이 아닌 자기 자신을 원상 복구하려는 절박한 시도로, 국가의 폭력적 테러에 대한 저항에서 국가에 대한 폭력적 테러로 바뀌었다.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를 테러하기 전에 김기종이 이미 미쳐버렸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폭력의 매질은 언제나 자유주의였고, 우리는 그 폭력은 자유다!”라는 선행명령에 익숙하다. 리퍼트 대사 습격 사건 직후, 김기종을 행사에 초청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본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우파 단체 어버이연합은 민화협의 의장이 친박 대통령계 정치인 홍사덕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즉시 해산했다. CNN이 김기종을 우파로 소개할 때, 국내 우파 언론들은 한발 앞질러 그에게 좌파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폭력은 내용이 아니라 방향만을 갖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일방통행하는 사회의 희극적 풍경이다.

 

평등과 자유는 대립하는 가치로 여겨지지만, 그것들을 뒤집어놓은 불평등과 부자유는 사실상 동의어이다. 불평등은 언제나 자유의 특수한 제약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에 대한 만장일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아예 폐기해버렸다. 그런데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에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선거에서 만장일치는커녕 과반을 간신이 넘겨 당선됐다!

 

군형법은 합의된 동성애조차 강간에 준해 처벌하고 있다. 국방부는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 조항이 군 사기 진작을 위해 필요불가결하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1961년에 쓰인 유엔군 간이특수음식점영업허가 사무취급 세부기준 수립정부 보고서에는 현지 주둔 유엔군에 대한 위안 또는 사기 앙양 면을 고려하여 위안부들의 집단 수용 시설이 시급하다고 쓰여 있다. 군대 사기 진작을 위해 동성 간 연애는 강력하게 처벌하지만 이성 간 성매매는 자유롭게 허용됐던 셈이다.

 

새누리당의 이자스민 의원이 발의한 이주아동권리보장법은 몇 년 가까이 표류 중이다. 역차별이라는 이유로 반대 여론을 주도한 건 중도 성향 시민들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가 보편적무상 급식 제도에는 찬성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지만 성소수자는 예외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굶지 않아야 하지만 이주 아동은 예외인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반 차별 법규조차 차별적으로 제정하는 사회, 이것이 불평등이 부자유를 현출 해내는 모습이다.

 

자유로워야 할 것과 자유로워서는 안 될 것을 자유롭게 재단할 자유.

 

더 강한 자유가 더 약한 자유 위에 군림할 자유.

 

지금 자유 대한민국이 도달한 땅은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억압이 용인되는 곳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곳은 자유의 지옥이다. 편향된 자유가 우리를 기만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는 슬라보예 지젝의 인용으로 유명해진 독일 농담이 잘 드러낸다. 동독 노동자 한 사람이 시베리아로 떠났다. 우편물 검열을 피하기 위해 그는 친구와 암호를 정했다. “만약 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였다면 모두 사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였다면 모두 거짓이야.” 한 달 뒤 친구가 받은 편지는 모두 파란색으로 쓰여 있었다. “여긴 모든 게 완벽해. 딱 하나 살 수 없는 것이 빨간 잉크야!”

 

 

손아람

 

1980년생. 장편소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소수 의견, 디 마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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