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요약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 긴장과 냉전 이데올로기가 일반 국민의 일상과 심리에 미친 영향을 묘사한 수필적 글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 국가 안보의 강박관념과 북한의 공포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게 침투했는지 표현한다.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절대로 금한 도라무깡앞에 있었다. 개천에 가로로 잇대어 있는 직경 1미터쯤의 시멘트 하수관들, 그것들은 금세 빗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내 발도, 플라스틱 슬리퍼도 젖어갔다. 그래도 돌아서면 다시는 여길 건널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번째 하수관은 절반 이상이 깨져 철근 골조에 시멘트 덩이들이 꼬치처럼 꿰여 있었다. 그 밑으로 콸콸 빠져나가는 흙탕물이 보였다. 몸이 떨렸다. 이제는 되돌아가나 마저 가나 마찬가지, 머릿속에 교과서 활자로 지나갔다. “미끄러지면 다리가 부러지든지 머리가 깨진다.”

 

그때 나는 보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필터를 갈아 끼운 듯 산등성이도 노랑이 추가돼 국방색이 되고, 저기 우리 동네 지붕들은 주황 곰팡이가 핀 듯했다. 어머니가 곗돈 떼였을 때 하늘이 노래졌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필터가 다시 진분홍으로 바뀌었다. 신축 중이거나 철거 중인 건물들 사이에 논밭이 벌겋게 찍혀 있는 들판을 바람이 외치며 달려오고, 피눈물처럼 굵고 미지근한 빗방울이 철퍽철퍽 떨어졌다.

 

"육 여사가 총 맞았어!”

 

집에서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TV 흑백 화면의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는 검은 양복과 흰 한복들이 모였다 도로 흩어졌다 하기를 천천히 반복했다. 총소리는 생각보다 작고 둔했다.

 

나는 욕실로 가서 후들거리는 종아리에 물을 끼얹었다. 기적을 봤다는 얘기는 할 새도, 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기적이 아니었다. 반드시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 육영수 여사께서 저격당하셨는데, 괴한의 총탄을 맞아 고무신도 남겨놓고 실려 나가셨는데, 하늘이 가만있을 리가 있나? 어쩌지, 어쩌지.

 

오줌이 마려워 깬 새벽, 또 어느 구석에 간첩이 검은 그림자로 서 있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비밀 작전을 하다가 흠칫 멈추어, 내가 깼는지 안 깼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들켰다는 걸 알면 그는 총 개머리판으로 우리 식구의 머리통을 짓이기고, 두 검지를 우리 입속에 쑤셔 넣어 양쪽으로 찢을 것이다. 안 깬 척하려면 나는 위아래 속눈썹이 맞닿을락 말락 한 눈을 더 떠서는 안 되지만, 티 나게 꾹 감아서도 안 된다. 숨소리도 더 커지거나 작아지면 안 된다. 이불에 감긴 채로 꼼짝없이, 땀 밴 베개에서는 열기가 올라오고, 오줌보는 터질 듯, 터질 듯 한계를 넘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눈을 깜박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주 굉장히 낮겠으나 확률이 제로인 법은 없다. 바로 이 순간, 휴전선을 지키는 국군 아저씨들의 눈꺼풀이 한꺼번에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눈 깜짝할 새를 놓치지 않고 북괴는 쳐들어온다. 밤에 잠들려다 하필 이런 생각이 들면 나만이라도 깨어 있어야 했다. 이 순간, 치명적인 일치가 지나갈 때까지만, 그런데 국군 아저씨들의 눈꺼풀이 모조리 닫히는 순간이, 막 지나간 그 순간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이라면? 다시 이 순간, 또다시 이 순간······ 나만이라도, 나만이라도. 잠과 함께 죄책감이 덮쳐왔다. , 어쩌지.

 

북괴는 우리 국민의 속마음까지 투시할 수 있었다. 우리 중 단 한명이 속으로 잠깐 딴생각을 할지라도, 그 생각을 휴전선의 균열로 물질화시켜 밀고 들어올 능력이 있었다. 신에 버금가는 전지전능한 악이었다. 빨강 도깨비 정도가 아니었다. 수시로 터지는 간첩 사건의 연루자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다른 인간들마저 망치려고 움직일 뿐인, 요즘 식으로는 좀비였다.

 

북괴만인가, 그 위의 중공, 더 위의 소련. 그들이 악의와 야욕으로 시시각각 부풀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어제 무너지지 않았고 오늘도 버텨낸다는 것이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의 1980년대같은 얘기를 들어봤자 국민학생으로서는 가늠도 안 되거니와, 생뚱맞았다. 지금 저런 소릴 해도 되나? 온몸으로 온힘으로, 막는 데만 열중해도 안 될 세계 민주주의의 최전선에서? 어머니가 전화 통화를 오래 할 때,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떡을 나눠줄 때, 예쁜 담임선생님이 결혼식 올린다고 결근할 때,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이래도 되나? 내 어린 시절은 종말 직전이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는 건조한 가을이라서, 대기의 물방울에 햇빛이 반사돼 하늘이 변색되는 현상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 비할 바 아닌, 실로 기적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없는데도 수돗물이 나오고 버스가 다녔다.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평소보다 붐비는 대학 도서관 앞을 평소처럼 어슬렁거리지만 사지가 뻣뻣했다. 이런 때 이런 장소에서 마주치게 되는 얼굴들의 총출동, 입학할 때 기지 바지라든가 원피스 등 엄마(가 입혀준) 패션은 반년 만에 남녀 공히 청바지와 칙칙한 남방으로 통일됐다.

 

잔디밭을 뒤덮은 전경들을 거대한 국자가 휘저었다. 그들은 이지러진 방사형 도로를 새까맣게 메우며 밀려왔다. 가운데 공터의 인구 밀도는 점점 더 높아지는데, 반쯤은 벙거지 모자로부터 운동화까지 연베이지색 일색인 백골단들이었다. 곧 그들의 고공 무술이 시연될 터였다.

 

어수선하면서도 조용하고, 공기는 무거웠다. 누군가 가방이라도 떨어뜨렸는지 시멘트 바닥에 쇠붙이가 땡강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게 아니고 도서관 6층 창문 유리가 깨졌음을 알았을 때는 창을 막은 철망마저 우그러져 있고, 한 손에 빨간 나팔 스피커를 든 시위 주동 학생이 밧줄에 매달려 있었으며, 벌써 창문이 미어지게 경비원과 경찰들이 상체를 내밀고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밧줄에 매달린 주동자는 위로 끌어올려지다가 도로 쳐졌다. 좌우로 흔들리더니······ 사라졌다! 추락해 며칠 뒤에 사망한 이는 황정하 열사다. 그날, 하늘로부터 땅으로 검은 셔터가 차르륵 내려와 탕 닫혔다.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일찍이 1980년 김의기 열사는 광주 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했다. 그가 남긴 동포에게 드리는 글에는 같은 구절이 반복된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암흑 속에서 학과의 구분도, 성격, 기질, 취향 따위도 없었다.

 

우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어릴 적 생각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동기들은 투사로 성장해 의문사, 고문사당하고 급기야 스스로 불꽃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내내 지리멸렬했다. 그러면서 자문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쯤 뒤 오랜만의 회동, 제각기 브라운운동(brownian motion)처럼 불규칙, 예측 불가의 인생을 살아왔다. ‘참여정부에 참여하게 된 한 친구가 새만금 매립과 이라크 파병에 대해 변명했다.

 

국정을 맡겼으면 믿어줘야지!”

 

버버, 버버버버. 나를 비롯해 반론은 빈약했다. 속으로는 수긍도 되니 어쩌랴. 비판과 통치는 다를 것이다. 정부더러 국운을 걸고 무모한 모험을 하나는 뜻은 아니었다. 국제 역학 관계라든가 일반 국민은 알지 못하고 알아서도 안 되는 사안도 있으리라. 이상만 고집하다 현실 정치에서 실패하기를,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였다. 예나 제나 조국은 위기고,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 있다. 자칫하면 역사가 퇴보한다. 예전에 독재 정권을 밀어내야 했듯이, 지금은 민주 정부를 지켜야 한다. 믿고 힘을 몰아줘야 한다.

 

인간의 몫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폭력이라는 말이 많이 들린다. 그래도 조국 폭력이라는 말은 없다. 조국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할 리가 없는 신성한 우리나라고, 국가는 그럴 수도 있는 실제 체제를 뜻하는 모양이다.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쉰이 넘도록 나는 국가에 매달렸다. 매번 최악을 막기 위해 억지로 투표했고, 당락에 마음 졸였고, 다음을 기다렸다. 국가에 모든 문제를 맡기고 제대로 된 정권만 들어서면 해결해주리라 은연중에 믿었다. 이제 그만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