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 사회의 본질과 권력의 정당성
진보적 운동은 사회를 개선하려는 운동이다. 사회를 개선하려는 운동은 먼저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전제는 사회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체질을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나온다.
권력을 차지한 집단이 그 권력을 어떻게 획득했는지 그리고 그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단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권력을 자기들 맘대로 행사해도 되는 것이라면, 사회를 개선한다는 발상은 설 자리가 없다. 누가 권력을 쥐든지 권력이 그들 맘대로 행사되는 사회에서는, 권력으로부터 시혜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권력의 편을 들 것이고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저항하다가 진압당하거나 아니면 더 큰 손해를 피하기 위해 아예 손해를 감수하면서 굴종하게 된다. 가끔 반란에 성공하는 세력이 나오지만, 그들 역시 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자기들 맘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그 결과로 시헤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지지하고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항하거나 굴종하는 결과가 반복된다.
이런 상태에서도 변화는 있다. 권력자가 바뀔 것이고, 때로는 권력 집단의 구성도 바뀔 것이며, 더욱 드물게는 하나의 권력 집단이 다른 권력집단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권리가나 권력 집단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지배하는 강자와 기배당하는 약자로 나뉘는 상태로 유지된다.
이런 상태에서도 공익은 실현될 수 있고 실제로 자주 실현된다. 살인,강도, 사기 따위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대개 공권력에 의해 색출되어 처벌을 받는다. 물론 공권력의 수사 능력을 따돌릴 만큼 도망치는 재주가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범죄자는 법망을 피하는 경우가 드물지만은 않게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전지전능하지 못한 탓이고, 사회를 개선하더라도 모든 범죄자를 빠짐없이 잡아들여 처벌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군주제나 독재 치하에서 범죄의 발생이 민주정치에서보다 낮아질수도 있다.
군사력의 증강이나 경제성장을 공익이라고 보면, 이런 공익 역시 군주나 독재자의 절대 권력에 의해 더 잘 실현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민주정은 스파르타의 군국주의에게 패배했다. 징기스칸,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 등, 역사적으로 독재자가 출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힘을 찬양하면서 추종했고, 더 많은사람들은 개인적 보신을 위해 굴종했다. 이들 대다수 인민은 독재자의힘에 저항한 사람들이 약할 때에는 외면하다가, 저항세력이 독재자를쓰러뜨린 다음에는 독재자의 권력욕을 비난했다.
이렇게 승자를 찬양하고 약자를 짓밟는 사유의 형식에는 사회의 개선이라는 발상이 깃들 여지가 없다. 오직 권력의 정당성을 따져 묻는 사유의 형식에서만 사회의 개선이라는 발상이 깃들 수 있다. 다른 나라를침략하고 정복하는 행위에서부터 한 개인의 인신을 구속하는 행위에이르기까지, 권력의 행사는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권력이 단순히 강하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생각은 곧 존재하는 권력은 모두, 그것이 권력으로 남아있는 한, 정당하다는 말과 같다. 이런 자세는 권력의 정당성을 따질 여지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고대와 중세의 정치는 주로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의해 주도되었다. 때로 권력의 정당성을 따지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문제제기는 대부분 기존 권력에 의해 묵살 당했다. 아주 드물게 문제제기에 그치지 잃고 기존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저항의 사례도 없지는 않지만, 이들 역시 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기존 권력과 대동소이한 체질을 드러냈다.
권력의 체질 자체를 변경하고자 하는 기획은 사회를 하나의 인위적 결합으로 이해하는 사유형식과 더불어 나타났다. 사람들이 단순히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면서 모여 사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남이 생산한 물품을 훔치거나 빼앗는 재주가 뛰어난 자들에게는 질서 잡힌 사회보다는 질서가 잡히지 않은 사회가 더 낫다. 반면에 인민의 대다수는 만약 사회에 질서가 없다면 강도나 깡패에게 무시로 시달려야 한다. 농사를 짓더라도 언제 누구에게 약탈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굳이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고 굳이 더 나은 농사기술을 개발할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회의 질서가 이익이다. 나아가, 질서가 잡힌 사회에서는 이들 대다수 인민이 열심히 일하고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할 테니 사회 전체에게도 풍요가 찾아온다.
정부는 일단 이래서 필요하다. 개인들의 행위 가운데는 사회의 건강한 질서유지에 도움이 되는 부류, 질서를 적어도 해치지는 않는 부류, 그리고 질서를 해치는 부류가 있다. 이 중에서 정부는 오직 세 번째 부류, 질서를 해치는 부류만을 권력을 가지고 통제해야 한다. 정부 권력의 정당성은 개인 또는 집단의 행위 중에서 이처럼 사회 전체의 질서를 해치는 부류를 억제하고, 색출하고, 나아가 처벌할 필요에서 비롯된다.
다음으로 일정한 공동기획을 위해서 정부권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외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한다든지, 개인들로서는 이룩하기 어려운 대규모의 공익적 사업을 벌이기 위해 인민의 지원을 끌어내는 과제가 그런 것이다. 범죄 처벌을 위해서나 공동기획을 위해서나 정부의 권력은 필요한 만큼만 행사되어야 한다. 필요한 이상으로 정부가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강도나 깡패의 권력과 다름이 없다. 필요한 한도 이상으로 남용되는 권력은 원천적으로 정당성을 상실한다. 이처럼 권력이 남용되는 경우에 사회가 건강한 상태로 유지되려면 인민이 힘을 합해서 남용되는 권력을 혼내줘야 한다. 공동체의 위임을 받은 권력이 개인들의 범죄행위를 처벌하듯이, 권력자가 권력을 남용하는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공동체 전체가 나서서 권력의 범죄를 처단해야 한다.
공동체가 권력 남용에 대항해서 힘을 합치지 못한다면, 사회는 약육강식의 체제로 전락한다. 권력이 남용되는데도 인민이 힘을 합해서 그런 권력을 처단하지 못하는 상태는 이미 공동체가 무너진 상태와 같다. 자기들이 사는 사회의 기본 질서에 관해 인민 사이에 합의가 붕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민 가운데 일부는 권력자의 힘을 찬양하면서 추종하고, 일부는 겁을 집어먹고 굴종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처단하려는 가장 건강한 인민의 일부가 소수로 주변화되는 등, 사회의 기본성격과 권력의 정당성에 관해 구성원들이 사분오열된 상태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가 약육강식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상태는 권력이 필요한 한도 안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권력의 남용에 대한 감시와 제재가 철저하게 이뤄지는 상태다. 인간 사회를 인위적 결합으로 인식하고 들어갈 때, 정부의 권력은 일정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공동체로부터 위임받은 것으로 자리매김 된다. 정부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다시 말해 권력이 작동할 때마다 사사건건 인민이 필요를 따져서 위임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부 권력의 한계는 법과 제도에 의해 다시 위임된다.
정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조직은 내부적으로 굉장히 다양한 부분들로 구성된다. 흔히,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가 있다고들 말하지만,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행정부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각종 위원장들로 구성되고 나아가 차관, 국장 등을 비롯한 수많은 관료들로 구성된다. 국회에도 수백 명의 국회의원들과 보좌관들과 전문위원들과 관료들이 있고, 사법부에도 각급 법원의 판사들과 이들을 보좌하는 공무원들이 있다. 이들 각자가 법에 의해 지위를 보장받는 만큼 필요한 정부의 권력을 나눠가지며, 따라서 귀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감시될 필요가 있다. 이들 각자의 권력 남용을 방지할 제도적인 장치는 일차적으로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적인 견제와 균형이다.
관료, 공무원, 공직자들은 집단적 이기주의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한 부서의 권력이 다른 부서의 권력을 침범해 들어갈 때, 일차적 스로는 견제와 균형이 작동할 수 있지만, 이 두 부서가 집단적 이익을 공유하기 위해 담합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겅부의 직위를 차지한 공직자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외부적 감시 또한 항상 필수적이다. 언론기관과 시민사회 그리고 일반 시민들 전체로 구성되는 공론장이 이와 같은 외부적 감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권력이 오로지 필요한 만큼만 정당성을 가진다는 대원칙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합의되고, 일상적 권력이 일차적으로 법과제도에 의해 견제되는 가운데 균형점을 찾으며, 공직자들 사이에서 집단 이기주의가 발호할 수 있는 여지는 공론장의 감시에 의해서 통제되는 상태의 사회가 약육강식에 비해 진보된 상태의 사회다. 내가 이해하는 한, 한국 사회의 진보를 지향하는 모든 꿈은 무엇보다도 이런 상태를 지향하지 않으면 단편적이거나 감상적인 몽상이라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2. 한국 진보운동의 현재
현재 한국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들이 지리멸렬의 상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소리를 보수파보다도 '진 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더 자주 입에 담는 현실은 이 지리멸렬이 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각기 나름의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느라 열심인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하고 찢어질 때,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저주스러운 표어를 쉽게 들먹이면서 마치 그것으로써 분열이 정당화된다는 듯한 태도까지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환경적인 요인들이 굉장히 크게 작용한다. 논의에 필요한대로 몇 가지만 거론하자면, 첫째는 한국전쟁의 경험과 북한의 존재다.전쟁을 겪었던 세대, 그리고 그 세대의 참혹한 경험을 물려받은 전후 세대 가운데, 안보위기'라는 정치적 수사가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의미를가지는지를 따지는 물음 자체를 불안하게 여기는 정서가 광범위하게퍼져 있다. 둘째, 한국전쟁 이후에 이어진 독재체제의 결과, 사회적 자원이 대단히 불균등하게 분포한다.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자금, 조직, 설득의 통로 등에서 그들의 경쟁상대인 보수 세력에 비해 까마득한열세에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진보 진영에 종사하는 개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당장 불리한결과를 참아낼 만한 여유가 부족하다. 셋째, 한국 사회의 인구 가운데는 왕조시대의 정치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율이 매우 높다. 정파 사이에 벌어지는 정치적 경쟁 자체를 혼란으로 여기면서 불안해한다든가,공권력이 권력을 남용하더라도 자기가 직접 피해를 보지 않는 한 심상하게 넘기면서 오히려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을 귀찮게 여기는 정서등이 한국 사회에는 폭넓게 분포한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사회의 구조적 개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입지는 크게 제한된다.
그러나 진보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환경을 고치는 데 목표가 있기 때문에, 환경이 어렵다고 불평만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는다.이와 같은 환경적 요인과는 별도로, 한국의 진보 세력들이 지리멸렬에이르도록 연대하지 못하는 데에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운동가 및 지식인들의 정치의식 자체가 지극히 협소한 탓도 매우 크다. 나는 다른 곳에서, 가짜문제, 선험주의, 교조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한 바 있다. 여기서는 절차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유형식만을 거론하기로 한다.
두 사람이 피자를 나눠먹는다고 할 때, 어떻게 나누는 절차가 가장 공정할까? 진공관 속에서 벌어지는 분배의 절차라면, 한 사람이 자르고 다른 사람이 먼저 집어가도록 하면 가장 공정할 것이다. 자르는 사람으로서는 가능한 한 균등하게 잘라야 자기 몫이 최대한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균등한 분배가 정의를 보장하지 못한다. 피자를 생산하는 데 더 많이 기여한 사람으로서는 균등한 분배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한 사람이 몸집이 훨씬 크다면, 필요에 따른 분배여야 공정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분배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공정성의 기준으로는 이밖에도 무수한 고려사항들이 포함된다.
이 모든 고려사항들을 모두 충족시키는 공정한 절차는 없다. 다시 말해, 공정한 절차라는 것은 실제 행위자들 사이에서 흥정과 양보에 의해 합의가 이뤄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행위자들의 감정과 계산과 욕심과 이익 등을 불순물로 여겨서 제거한 다음에 어떤 순수한 지평으로부터 발견되어 행위자들에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공정한 절차가 사회안에서 확립되지 못하는 상황은 공정한 절차의 이상적인 표준을 사회구성원들이 찾아내지 못한 상태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스스로 당면한 문제의 본질적 성격을 오인하고 들어간 상태인 것이다.
유시민과 심상정이 통합진보당을 깨고 나갈 때의 사정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당시 그들에게 나름대로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당의 조직을 장악한 일파가 (그들을 '경기동부'라고 부르는 게 정당한지 여부에는 나는 관심이 없다) 자행하는 전횡에 절망했기 때문에 그들은 딴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었던가? 이런 질문은 당사자들에게는 어쩌면 잔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 그들이 심정적으로 느낀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그때 문제되었던 '대리투표'를 '관행' 이었다고 받아들이고 참는 길이 객관적으로 있었다. 그렇게 참고 (단 그런 식의 '관행'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원칙을 일단 정해놓고) 후일을 기약했더라면, 현재 통합진보당의 형편이 과연 지금 실제 형편보다 나빴을까?
피자를 둘이서 나눠먹을 때, 한 쪽이 공로'나 '필요'를 내세워 더 먹겠다고 기어이 고집을 피울 때 다른 쪽에서 균등 분배를 똑같이 고집만한다면 합의는 불가능하다. 각자 나름대로 '공정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쌍방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공정성'이라는 단어에 슬그머니 실어서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협상을 통한 합의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평화적인 분배를 위해 한 쪽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도 자주 있다. 합의를 이뤄내느냐, 그리고 합의가 나중에 얼마나 지켜지느냐에 비하면, 합의의 내용 자체는 언제나 덜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절차의 공정성이 외부의 초월적 지평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생활 내부에서 창출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선거 때마다 벌어지는 부정선거 시비, 정당 내부에서 경선 과정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는 사태, 유권자들의 정당 혐오증을 탓하면서도 정작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로 당을 깨고 나가는 행위 등은 모두 결정의 절차가 내부에서 합의에 의해 생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떤 추상적 원리에 의해 외생적으로 부과되어야 한다는 착각에 빠진 탓이다. 자신이 주체로서 공정성을 창출해야 한다는 임무를 망각하고, 추상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투사된 공정성'의 객체가 되고자 자원하기 때문이다.
진보운동이 집단적 의사결정의 절차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분열을 거듭한다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대안적 정치세력으로서 신뢰를 얻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새누리당이라는 매우 강력한 보수 정당이 있고, 그 배후에 자본과 관료와 군부와 사법부의 기득권이 도사리고 있으며, 나아가 학계와 언론계마저도 보수편으로 일방적으로 치우쳐 있는 정치지형에서, 집권할 수 있을 정도의 다수표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으로는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투표한다고 믿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에게 안정감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강력한 보수세력을 대신해서 집권한 다음에, 강력한 보수세력의 저항을 무릅쓰고 뭔가 진보지인 방향이 개혁을 달성해낼 수 있으리라는 안정감을 줘야 한다. 걸핏하면 안에 사기들끼리 싸우다가 판 자체를 깨버리는 무책임한 행태는 신뢰보다 불신을 자아내기에 알맞다. 2012년의 두 차례 선거, 2014년의 지방선기에서 모두, 민주당을 (또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포함한 범진보세력이 패배한 것은 유권자 다수가 보수 세력을 딱히 지지한 탓이라기보다는, 보수 세력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안세력에게 정권을 맡기기에는 불안한 까닭에 결단을 미룬 탓이라고 봐야 한다. 유권자들의 결정장애 증상을 치유할 수 있어야 진보운동에 희망이 있고 한국 사회가 개선될 희망이 열린다.
집단적 의사결정의 절차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내부에서 끝없는 논쟁과 분열만을 계속하다 보면, 동맹관계를 맺어야 할 사람들 사이에 적대감과 불신과 원한이라는 소모적인 감정이 자라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감정들은 자체로도 백해무익하지만, 나아가 적극적인 의제의 개발에 투자되어야 할 정신을 갉아먹는다. 김대중에게는 한반도 평화라는 필생의 목표가 있었고, 노무현에게는 균형발전이라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그들이 선거에서 당선된 데에는 정치공학적인 타산도 작용했고, 운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지에 관한 비전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노무현의 집권 이후 진보세력은 경제민주화라는 표어를 내걸기는 했지만, 박근혜에게 탈취당하고도 구체적인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가 공약을 완전히 묵살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허공에 고함지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민주화의 내용을 충실하게 개발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내부의 이합집산에 정신이 팔린 탓이다.
나는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 현재 시점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 의제를 제안할 것이다. 이 의제들은 경제적 분배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권력의 분배에 관한 내용 또는 권력의 분배가 바람직하게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정치의식의 배양에 도움이 될 내용들이다.
3. 진보운동이 추구해야 할 다섯 가지 의제
1) 사법개혁
용산참사 재판, 국정원 대선개입 관련 원세훈 재판, 정봉주 재판, 노회찬 재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등등, 권력의 향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많은 재판에서 한국의 사법부는 사회적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검찰은 유독 권력과 관련되는 사건에서 실체적 진상을 파헤치기는커녕 은폐의 선봉장 노릇을 하고 있고, 법원마저도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정당한 법리를 묵살하는 경우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근원을 굳이 찾자면, 법과대학의 커리큘럼에서 찾을 수도 있고, 사법공무원의 인사 체계에서 찾을 수도 있으며,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판례들, 그리고 그 판례에 스며들어 있는 법조계의 문화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그만큼 이 모든 문제들을 단시간에 해소할 수 있는 묘책은 없다.
현재의 시점에서 진보 의제로서 시급한 대목은 일반 시민이 법을 법대 졸업생 또는 사법고시 합격자들의 생계수단으로 방치하지 않도록 기풍을 조성하는 데 있다. 노무현 정부가 강조했던 공판중심주의라든지, 국민참여재판의 확대는 이런 방향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기틀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제도로는 최소한 지방검사장과 지방법원장을 주민들이 선출하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한국은 일본을 통해 대륙법을 수입한 것으로 통상 일컬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영미법 체계와 다르다는 편리한 변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륙법의 대표적인 나라인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영미법의 요소인 판례재판, 배심 재판, 소송절차의 엄격한 준수 등의 원칙을 점점 더 많이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법이라는 것이 법조공무원들의 기술시 사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생성되는 상시이 반스이라는 민주주의의 대명제에 부합하는 길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만아니라, 독일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김사와 판사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지방검사장과 지방법원장 직선제만으로 한국의 사법부가 그동안 밝혀내지 못하던 종류의 권력형 비리 사건에서 실체적 진실을 낱낱이 밝히는 기능을 충분히 이행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수십년 동안 쌓여온 법조 문화와 관행, 법조인들 사이의 연고관계, 법과대학의 교육과정 등이 한꺼번에 바뀌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상태에 이르는 변화는 오랜 기간이 걸린다고 보더라도, 당장 지방검사와 판사를 선거로 뽑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의 법의식을 고양하는 데에는 커다란 효과가 있을 것이다.
2) 의회개혁
의회개혁의 첫 번째 과제는 국회의원 선거제를 바꾸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권력에 의한 전횡이 가능한 이유 중에는 국회에서 새누리당이 과반수를 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선거제도가 핵심에 자리한다. 실제 지지율에서는 어떤 정당도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하는데도 선거제도 때문에 의석분포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18대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정당득표율에서 불과 37.5%을 얻고도 의석은 51.2%를 차지했다. 19대 선거에서 새누리당은 42.8%의 득표만으로 의석은 50.7%를 얻었다.
이 피해는 고스란히 소수당의 몫이다. 대표적으로 민주노동당은 18대에서 5.7%의 정당득표율을 획득했는데, 300석을 모두 비례로 분배했더라면 19석을 차지했을 테지만 실제로는 5석밖에 얻지 못했다. 19대의 통합진보당이 얻은 10.3%의 정당득표율은 전체의석으로 환산하면 33석이 되지만, 실제로는 13석밖에 얻지 못했다.
만약 새누리당이 득표율에 비례해서 120~13)시의 의식을 가진다면,쟁점 법안에 관해서는 청문회나 국정조사에 관해서는 국회에서 과반수의 동의를 얻기 위해 협상이 불가피해진다. 청와대의 지령대로 움직이려고 해도 새누리당이 과반수를 점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득과 소통, 홍정과 양보의 정치가 국회에서부터 생동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에서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기 위해서는 독일식 보상식 비례대표제가 최선으로 보인다. 이 제도에서는 전체 의석의 절반을 지역구에서, 나머지 절반은 정당명부에서 충원하는데, 각 당에게 돌아갈 총의석은 정당득표율에 의해서 결정된다. 먼저 정당득표율에 따라 각 당이 얻을 총의석을 배분한 다음에, 각 당의 지역구 당선자수를 뺀 나머지를 정당명부에서 채우기 때문이다. 현재 300석을 가지고 이 제도를시행하게 되면 현행 지역구 수를 100개 이상 줄여야 하는데, 그런 방안은 지역구 출신 의원들로 구성된 국회를 통과하기 어렵다. 따라서 전체의석을 500석으로 늘리고, 지역구 250석 명부 250석으로 정하는 편이바람직하다. 아울러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것도 소수파의 설움에 시달리는 진보정당들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의제에 해당한다. 신진 정치인들에게 문호를 넓히는 의미와 함께 국회 내부의 다양성이 확대되는의미를 수반하는 만큼,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고 토론과 설득에 의한 정치를 지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3) 병무개혁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안보위기' 라는 수사는 한국 사회의 개선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한다. 북한의 존재 자체를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은없지만, 적어도 필요 이상으로 위기를 과장하는 권력의 버릇은 고칠 길이 없지 않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방안, 그리고 한국의 시민의식이 더욱 민주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필수적인 방안은 평시강제징집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전시에는 강제징집이 불가피하다. 물이야 할 질문은 평시에 왜 강제징집이 필요하나는 것이다.
장교와 하사관은 현행대로 충원하되, 일반 병사의 경우 자원병과 기업군인으로 충원하는 방안이다. 이렇게 했을 때 현재와 같은 병력을 유지할 수는 없다. 따라서 꼭 필요한 인원으로 병력을 감축하는 한편, 여성이나 장애인이라도 병역을 원하는 사람은 기능과 역량에 맞춰 복무할 수 있도록 하면 전체 병력 자원이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아울러복무 연령을 확대해서 가령 17세에서 45세까지 사이에 어느 때라도 군복무를 원하면 입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아가, 군복무 기간 동안 전문 영역에서 지식과 기술을 익히도록 한다면 막대한 국방예산을직업교육과 사회교육에 선용하는 길도 열린다.
요컨대, 업무가 필요한 직책에 사병을 충원하고, 그 자리에서 일할 사병에게 업무 수행능력을 기를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이유는모른 채 그저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는 군대 문화가 기능적 필요에 따라 일하는 문화로 바뀔 수 있다. 군대 생활을 통해 사병들도 인간적 존엄성을 체득함으로써 건강한 시민의식을 배양하는 한편, 장교들로서도사병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문화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4) 실질적인 지방자치
지방자치가 부활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방정치의 중앙예속이라는불만은 날로 커지고 있다. 세입의 대부분을 중앙정부가 독점하는 문제도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이 문제는 나로서는 전공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다룰 수 없다. 단, 여기서 제안하고 싶은 의제는 지방정부를 선출하는 선거제도를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 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현재는 지방선거의 모든 규칙을 국회에서 법률로 정하고 있다. 미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는 물론이고 프랑스와 같은 단일정부의 형태를 취하는 나라에서도 이것은 생각할 수 없는 언어도단에 해당한다.
인위적 결합으로 이해할 때, 길합의 단초는 당연히 말단 또는 풀뿌리에 해당하는 지방 공동체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다. 따라서 기조가기단게의 주민들이 해당 공동체의 정부형태와 신기제도를 스스로 경하는 기이 마땅한 순서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왕조체제에서 일제강점기와 미군점령기를 거치는 와중에, 헌법이 인민의 합의에 의해 제정되지 못하고 정치엘리트들 사이에서 정해진 다음에 인민에게 베풀어지는 형식을 띠었다. 1987년 헌법 역시 대통령 직선제 조항만이 인민의 합의를 반영했을 뿐, 나머지 조문들은 일반 시민이 방치하는 가운데 소수의 법률기술자들이 정한 결과를 공포했을 뿐이다. 이처럼 도착된 헌정의식을 일거에 뒤바꿀 길은 물론 없다. 다만, 지방자치단체의 정부형태와 선거제도만이라도 민주사회에 알맞은 순서가 되도록 각 자치단체의 주민들이 정하도록 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5) 교육개혁
한국의 교육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매우 높다. 6·4 지방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된 것은 이런 열망이 표출된 결과다. 이 글에서 일관해서 주장한 얘기지만, 교육제도 역시 올바른 교육제도 따위를 외생적으로 찾아내서 부과하는 식의 발상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올바른 교육제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행정당국,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고 실습할 것인지에 관해 합의가 이뤄진다면 바로 그것이 올바른 교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중등교육에 관한 결정은 교육감을 중심으로 광역자치단체 수준에서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육제도가 조령모개의 난맥상을 보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중앙 정부가 획일적으로 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교육정책 때문에 다양한 학생들의 수요와 호기심, 그리고 다양한 교사들의 전공과 가치가 억압되고, 그 때문에 하생들도 교사들도 탐구를 향한 의욕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초중등교육에 관한 한 중앙 정부는 개입을 최소화하고, 커리큘럼, 교재, 교수방식, 학교 내의 의사결정 등을 모두 자치단체 차원에서 자율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 고등교육, 즉 대학체제만은 중앙 정부가 관장할 필요가 있다. 최고 수준의 연구와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은 많은 비용과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자원을 가급적 효율적으로 할당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능 역시 현재처럼 관료주의에 물든 교육부에게 맡겨서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교육부를 발전적으로 해체해서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고, 학계의 전문적인 안목을 갖춘 인물들이 해당 분야의 목소리들을 청취하고 조정해서 고등교육에 관한 주요 결정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가령, 국립대학만이라도 프랑스나 독일처럼 기능중심으로 재편성한다든지 아니면 적어도 캘리포니아처럼 연합대학 체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4. 결론
한국 사회에서 '진보'라는 단어는 일종의 고유명사 비슷하게 사용된 면이 있다. '진보'를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야만적인 권력이 아직도 작동하는 사회다보니,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 사이에 피해의식의 연고가 형성되는 경향을 이해할 수 없는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정이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진보라는 단어는 사회의 구조적 개선을 지향하는 본래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개선은 실질적인 개선을 담지하는 의제가 형성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 글에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병폐를 권력의 전횡으로 진단했다. 따라서 진보운동은 권력이 전횡을 지지르기 못하는 상태의 사회를 만드는 방안에 초점을 맞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진보진영 내부에서 불화와 알력을 절차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개선을 위해 현재 절박하게 필요한 개혁 과제들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박동천
미국 일리노이(어바나 샴페인) 대학 정치학 박사(학위논문: 「Socrates' Simile of the Cave」),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저서로 『선거제도와 정치적 상상력』,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플라톤 정치철학의 해체』가 있고, 역서로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 IU, 『정치경제학 원리』(전4권), 『사회과학의 빈곤』, 『인권: 인간이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 dcp@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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