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 사회의 본질과 권력의 정당성
진보적 운동은 사회를 개선하려는 운동이다. 사회를 개선하려는 운동은 먼저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전제는 사회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체질을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나온다.
권력을 차지한 집단이 그 권력을 어떻게 획득했는지 그리고 그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단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권력을 자기들 맘대로 행사해도 되는 것이라면, 사회를 개선한다는 발상은 설 자리가 없다. 누가 권력을 쥐든지 권력이 그들 맘대로 행사되는 사회에서는, 권력으로부터 시혜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권력의 편을 들 것이고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저항하다가 진압당하거나 아니면 더 큰 손해를 피하기 위해 아예 손해를 감수하면서 굴종하게 된다. 가끔 반란에 성공하는 세력이 나오지만, 그들 역시 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자기들 맘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그 결과로 시헤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지지하고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항하거나 굴종하는 결과가 반복된다.
이런 상태에서도 변화는 있다. 권력자가 바뀔 것이고, 때로는 권력 집단의 구성도 바뀔 것이며, 더욱 드물게는 하나의 권력 집단이 다른 권력집단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권리가나 권력 집단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지배하는 강자와 기배당하는 약자로 나뉘는 상태로 유지된다.
이런 상태에서도 공익은 실현될 수 있고 실제로 자주 실현된다. 살인,강도, 사기 따위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대개 공권력에 의해 색출돼 처벌을 받는다. 물론 공권력의 수사 능력을 따돌릴 만큼 도망치는 재주가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범죄자는 법망을 피하는 경우가 드물지만은 않게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전지전능하지 못한 탓이고, 사회를 개선하더라도 모든 범죄자를 빠짐없이 잡아들여 처벌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군주제나 독재 치하에서 범죄의 발생이 민주정치에서보다 낮아질수도 있다.
군사력의 증강이나 경제성장을 공익이라고 보면, 이런 공익 역시 군주나 독재자의 절대 권력에 의해 더 잘 실현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민주정은 스파르타의 군국주의에게 패배했다. 징기스칸,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 등, 역사적으로 독재자가 출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힘을 찬양하면서 추종했고, 더 많은사람들은 개인적 보신을 위해 굴종했다. 이들 대다수 인민은 독재자의힘에 저항한 사람들이 약할 때에는 외면하다가, 저항세력이 독재자를쓰러뜨린 다음에는 독재자의 권력욕을 비난했다.
이렇게 승자를 찬양하고 약자를 짓밟는 사유의 형식에는 사회의 개선이라는 발상이 깃들 여지가 없다. 오직 권력의 정당성을 따져 묻는 사유의 형식에서만 사회의 개선이라는 발상이 깃들 수 있다. 다른 나라를침략하고 정복하는 행위에서부터 한 개인의 인신을 구속하는 행위에이르기까지, 권력의 행사는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권력이 단순히 강하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생각은 곧 존재하는 권력은 모두, 그것이 권력으로 남아있는 한, 정당하다는 말과 같다. 이런 자세는 권력의 정당성을 따질 여지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고대와 중세의 정치는 주로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의해 주도됐다. 때로 권력의 정당성을 따지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문제제기는 대부분 기존 권력에 의해 묵살 당했다. 아주 드물게 문제제기에 그치지 잃고 기존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저항의 사례도 없지는 않지만, 이들 역시 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기존 권력과 대동소이한 체질을 드러냈다.
권력의 체질 자체를 변경하고자 하는 기획은 사회를 하나의 인위적 결합으로 이해하는 사유형식과 더불어 나타났다. 사람들이 단순히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면서 모여 사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남이 생산한 물품을 훔치거나 빼앗는 재주가 뛰어난 자들에게는 질서 잡힌 사회보다는 질서가 잡히지 않은 사회가 더 낫다. 반면에 인민의 대다수는 만약 사회에 질서가 없다면 강도나 깡패에게 무시로 시달려야 한다. 농사를 짓더라도 언제 누구에게 약탈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굳이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고 굳이 더 나은 농사기술을 개발할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회의 질서가 이익이다. 나아가, 질서가 잡힌 사회에서는 이들 대다수 인민이 열심히 일하고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할 테니 사회 전체에게도 풍요가 찾아온다.
정부는 일단 이래서 필요하다. 개인들의 행위 가운데는 사회의 건강한 질서유지에 도움이 되는 부류, 질서를 적어도 해치지는 않는 부류, 그리고 질서를 해치는 부류가 있다. 이 중에서 정부는 오직 세 번째 부류, 질서를 해치는 부류만을 권력을 가지고 통제해야 한다. 정부 권력의 정당성은 개인 또는 집단의 행위 중에서 이처럼 사회 전체의 질서를 해치는 부류를 억제하고, 색출하고, 나아가 처벌할 필요에서 비롯된다.
다음으로 일정한 공동기획을 위해서 정부권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외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한다든지, 개인들로서는 이룩하기 어려운 대규모의 공익적 사업을 벌이기 위해 인민의 지원을 끌어내는 과제가 그런 것이다. 범죄 처벌을 위해서나 공동기획을 위해서나 정부의 권력은 필요한 만큼만 행사돼야 한다. 필요한 이상으로 정부가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강도나 깡패의 권력과 다름이 없다. 필요한 한도 이상으로 남용되는 권력은 원천적으로 정당성을 상실한다. 이처럼 권력이 남용되는 경우에 사회가 건강한 상태로 유지되려면 인민이 힘을 합해서 남용되는 권력을 혼내줘야 한다. 공동체의 위임을 받은 권력이 개인들의 범죄행위를 처벌하듯이, 권력자가 권력을 남용하는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공동체 전체가 나서서 권력의 범죄를 처단해야 한다.
공동체가 권력 남용에 대항해서 힘을 합치지 못한다면, 사회는 약육강식의 체제로 전락한다. 권력이 남용되는데도 인민이 힘을 합해서 그런 권력을 처단하지 못하는 상태는 이미 공동체가 무너진 상태와 같다. 자기들이 사는 사회의 기본 질서에 관해 인민 사이에 합의가 붕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민 가운데 일부는 권력자의 힘을 찬양하면서 추종하고, 일부는 겁을 집어먹고 굴종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처단하려는 가장 건강한 인민의 일부가 소수로 주변화되는 등, 사회의 기본성격과 권력의 정당성에 관해 구성원들이 사분오열된 상태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가 약육강식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상태는 권력이 필요한 한도 안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권력의 남용의 감시와 제재가 철저하게 이뤄지는 상태다. 인간 사회를 인위적 결합으로 인식하고 들어갈 때, 정부의 권력은 일정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공동체로부터 위임받은 것으로 자리매김 된다. 정부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다시 말해 권력이 작동할 때마다 사사건건 인민이 필요를 따져서 위임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부 권력의 한계는 법과 제도에 의해 다시 위임된다.
정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조직은 내부적으로 굉장히 다양한 부분들로 구성된다. 흔히,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가 있다고들 말하지만,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행정부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각종 위원장들로 구성되고 나아가 차관, 국장 등을 비롯한 수많은 관료들로 구성된다. 국회에도 수백 명의 국회의원들과 보좌관들과 전문위원들과 관료들이 있고, 사법부에도 각급 법원의 판사들과 이들을 보좌하는 공무원들이 있다. 이들 각자가 법에 의해 지위를 보장받는 만큼 필요한 정부의 권력을 나눠가지며, 따라서 귀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감시될 필요가 있다. 이들 각자의 권력 남용을 방지할 제도적인 장치는 일차적으로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적인 견제와 균형이다.
관료, 공무원, 공직자들은 집단적 이기주의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한 부서의 권력이 다른 부서의 권력을 침범해 들어갈 때, 일차적 스로는 견제와 균형이 작동할 수 있지만, 이 두 부서가 집단적 이익을 공유하기 위해 담합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겅부의 직위를 차지한 공직자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외부적 감시 또한 항상 필수적이다. 언론기관과 시민사회 그리고 일반 시민들 전체로 구성되는 공론장이 이와 같은 외부적 감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권력이 오로지 필요한 만큼만 정당성을 가진다는 대원칙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합의되고, 일상적 권력이 일차적으로 법과제도에 의해 견제되는 가운데 균형점을 찾으며, 공직자들 사이에서 집단 이기주의가 발호할 수 있는 여지는 공론장의 감시에 의해서 통제되는 상태의 사회가 약육강식에 비해 진보된 상태의 사회다. 내가 이해하는 한, 한국 사회의 진보를 지향하는 모든 꿈은 무엇보다도 이런 상태를 지향하지 않으면 단편적이거나 감상적인 몽상이라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2. 한국 진보운동의 현재
현재 한국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들이 지리멸렬의 상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소리를 보수파보다도 '진 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더 자주 입에 담는 현실은 이 지리멸렬이 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각기 나름의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느라 열심인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하고 찢어질 때,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저주스러운 표어를 쉽게 들먹이면서 마치 그것으로써 분열이 정당화된다는 듯한 태도까지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환경적인 요인들이 굉장히 크게 작용한다. 논의에 필요한대로 몇 가지만 거론하자면, 첫째는 한국전쟁의 경험과 북한의 존재다.전쟁을 겪었던 세대, 그리고 그 세대의 참혹한 경험을 물려받은 전후 세대 가운데, 안보위기'라는 정치적 수사가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의미를가지는지를 따지는 물음 자체를 불안하게 여기는 정서가 광범위하게퍼져 있다. 둘째, 한국전쟁 이후에 이어진 독재체제의 결과, 사회적 자원이 대단히 불균등하게 분포한다.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자금, 조직, 설득의 통로 등에서 그들의 경쟁상대인 보수 세력에 비해 까마득한열세에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진보 진영에 종사하는 개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당장 불리한결과를 참아낼 만한 여유가 부족하다. 셋째, 한국 사회의 인구 가운데는 왕조시대의 정치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율이 매우 높다. 정파 사이에 벌어지는 정치적 경쟁 자체를 혼란으로 여기면서 불안해한다든가,공권력이 권력을 남용하더라도 자기가 직접 피해를 보지 않는 한 심상하게 넘기면서 오히려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을 귀찮게 여기는 정서등이 한국 사회에는 폭넓게 분포한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사회의 구조적 개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입지는 크게 제한된다.
그러나 진보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환경을 고치는 데 목표가 있기 때문에, 환경이 어렵다고 불평만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는다.이와 같은 환경적 요인과는 별도로, 한국의 진보 세력들이 지리멸렬에이르도록 연대하지 못하는 데에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운동가 및 지식인들의 정치의식 자체가 지극히 협소한 탓도 매우 크다. 나는 다른 곳에서, 가짜문제, 선험주의, 교조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한 바 있다. 여기서는 절차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유형식만을 거론하기로 한다.
두 사람이 피자를 나눠먹는다고 할 때, 어떻게 나누는 절차가 가장 공정할까? 진공관 속에서 벌어지는 분배의 절차라면, 한 사람이 자르고 다른 사람이 먼저 집어가도록 하면 가장 공정할 것이다. 자르는 사람으로서는 가능한 한 균등하게 잘라야 자기 몫이 최대한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균등한 분배가 정의를 보장하지 못한다. 피자를 생산하는 데 더 많이 기여한 사람으로서는 균등한 분배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한 사람이 몸집이 훨씬 크다면, 필요에 따른 분배여야 공정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분배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공정성의 기준으로는 이밖에도 무수한 고려사항들이 포함된다.
이 모든 고려사항들을 모두 충족시키는 공정한 절차는 없다. 다시 말해, 공정한 절차라는 것은 실제 행위자들 사이에서 흥정과 양보에 의해 합의가 이뤄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행위자들의 감정과 계산과 욕심과 이익 등을 불순물로 여겨서 제거한 다음에 어떤 순수한 지평으로부터 발견돼 행위자들에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공정한 절차가 사회안에서 확립되지 못하는 상황은 공정한 절차의 이상적인 표준을 사회구성원들이 찾아내지 못한 상태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스스로 당면한 문제의 본질적 성격을 오인하고 들어간 상태인 것이다.
유시민과 심상정이 통합진보당을 깨고 나갈 때의 사정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당시 그들에게 나름대로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당의 조직을 장악한 일파가 (그들을 '경기동부'라고 부르는 게 정당한지 여부에는 나는 관심이 없다) 자행하는 전횡에 절망했기 때문에 그들은 딴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었던가? 이런 질문은 당사자들에게는 어쩌면 잔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 그들이 심정적으로 느낀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그때 문제됐던 '대리투표'를 '관행' 이었다고 받아들이고 참는 길이 객관적으로 있었다. 그렇게 참고 (단 그런 식의 '관행'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원칙을 일단 정해놓고) 후일을 기약했더라면, 현재 통합진보당의 형편이 과연 지금 실제 형편보다 나빴을까?
피자를 둘이서 나눠먹을 때, 한 쪽이 공로'나 '필요'를 내세워 더 먹겠다고 기어이 고집을 피울 때 다른 쪽에서 균등 분배를 똑같이 고집만한다면 합의는 불가능하다. 각자 나름대로 '공정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쌍방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공정성'이라는 단어에 슬그머니 실어서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협상을 통한 합의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평화적인 분배를 위해 한 쪽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도 자주 있다. 합의를 이뤄내느냐, 그리고 합의가 나중에 얼마나 지켜지느냐에 비하면, 합의의 내용 자체는 언제나 덜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절차의 공정성이 외부의 초월적 지평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생활 내부에서 창출돼야 한다는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선거 때마다 벌어지는 부정선거 시비, 정당 내부에서 경선 과정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는 사태, 유권자들의 정당 혐오증을 탓하면서도 정작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로 당을 깨고 나가는 행위 등은 모두 결정의 절차가 내부에서 합의에 의해 생성돼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떤 추상적 원리에 의해 외생적으로 부과돼야 한다는 착각에 빠진 탓이다. 자신이 주체로서 공정성을 창출해야 한다는 임무를 망각하고, 추상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투사된 공정성'의 객체가 되고자 자원하기 때문이다.
진보운동이 집단적 의사결정의 절차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분열을 거듭한다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대안적 정치세력으로서 신뢰를 얻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새누리당이라는 매우 강력한 보수 정당이 있고, 그 배후에 자본과 관료와 군부와 사법부의 기득권이 도사리고 있으며, 나아가 학계와 언론계마저도 보수편으로 일방적으로 치우쳐 있는 정치지형에서, 집권할 수 있을 정도의 다수표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으로는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투표한다고 믿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에게 안정감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강력한 보수세력을 대신해서 집권한 다음에, 강력한 보수세력의 저항을 무릅쓰고 뭔가 진보지인 방향이 개혁을 달성해낼 수 있으리라는 안정감을 줘야 한다. 걸핏하면 안에 사기들끼리 싸우다가 판 자체를 깨버리는 무책임한 행태는 신뢰보다 불신을 자아내기에 알맞다. 2012년의 두 차례 선거, 2014년의 지방선기에서 모두, 민주당을 (또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포함한 범진보세력이 패배한 것은 유권자 다수가 보수 세력을 딱히 지지한 탓이라기보다는, 보수 세력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안세력에게 정권을 맡기기에는 불안한 까닭에 결단을 미룬 탓이라고 봐야 한다. 유권자들의 결정장애 증상을 치유할 수 있어야 진보운동에 희망이 있고 한국 사회가 개선될 희망이 열린다.
집단적 의사결정의 절차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내부에서 끝없는 논쟁과 분열만을 계속하다 보면, 동맹관계를 맺어야 할 사람들 사이에 적대감과 불신과 원한이라는 소모적인 감정이 자라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감정들은 자체로도 백해무익하지만, 나아가 적극적인 의제의 개발에 투자돼야 할 정신을 갉아먹는다. 김대중에게는 한반도 평화라는 필생의 목표가 있었고, 노무현에게는 균형발전이라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그들이 선거에서 당선된 데에는 정치공학적인 타산도 작용했고, 운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지에 관한 비전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노무현의 집권 이후 진보세력은 경제민주화라는 표어를 내걸기는 했지만, 박근혜에게 탈취당하고도 구체적인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가 공약을 완전히 묵살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허공에 고함지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민주화의 내용을 충실하게 개발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내부의 이합집산에 정신이 팔린 탓이다.
나는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 현재 시점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 의제를 제안할 것이다. 이 의제들은 경제적 분배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권력의 분배에 관한 내용 또는 권력의 분배가 바람직하게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정치의식의 배양에 도움이 될 내용들이다.
3. 진보운동이 추구해야 할 다섯 가지 의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