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오면 정운영 선생이 귀천(歸天)한 지 꼭 17년이 된다. 왜 하필 9월인가를 묻는 것은 헛된 일이겠지만, 그는 예상이라도 한 듯이 슬쩍 답을 준 적이 있다. “나의 비밀 제의(祭儀)<9월이 오면> 노래로 시작된다. 보비 데어린이 작곡하고 그의 악단이 연주하는 경쾌한 리듬으로 이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9월 첫날 센스 만점의 어느 프로듀서가 이 곡을 틀어주기라도 한다면 나는 코스모스 길섶의 팔푼이처럼 하루 종일 히죽거린다.” <9월이 오면>로 시작되는 그의 제의는 이병주의 단편 아무도 모르는 가을과 이 소설에 나오는 베라 피그넬(Vera Figner)의 수기 러시아의 밤으로 절정을 이룬다. 일제강점기 조선과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 각자 아나키즘 운동에 투신한 두 여자의 삶이 그에게 가을의 통증을 선사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사랑을 위해, 또 어떤 이는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삶들이 있었고, 가을이 오면 이런 상념들이 세상에 잠시 머물고 떠나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인생의 의미를 반추하는 방황을 일으키곤 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얼마간이라도 위로가 필요하다. 그는 인생의 통속을 가르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로 마음을 달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아홉 권의 칼럼집으로 남은 사내

정운영은 모두 아홉 권의 칼럼 모음집을 남겼다. 경제학으로 묶을 수 있는 세 권(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함축하는 제목이 붙은 세 권(시지프의 언어, 피사의 전망대, 레테를 위한 비망록), 그리고 새로운 세기를 집어삼킨 세계화 시대를 기록한 세 권(세기말의 질주, 신세기 랩소디, 유고집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이 아홉 권에 수록된 칼럼과 에세이의 집필 연대기는 1987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18년에 이른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에서 자신의 글에 대한 자괴와 피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을 정도로, 정운영은 아무리 짧은 분량이라도 치밀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썼다.

 

나는 주로 밤에 글을 쓴다. 진한 카페인과 이따금 독한 니코틴으로-다소 정결한 부분은 말러와 브람스와 베토벤의 음악뿐이다.-글자 하나하나를 짓이겨놓고 나면 문풍지 훤하게 새벽이 밝아오는 수가 많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밤은 나에게 낮보다 훨씬 더 친근한 반려가 되어왔다. (중략) 커피 냄새에 중독되고 담배 연기에 찌든 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제 내 생명의 한 조각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밤을 새우며 생명의 한 조각씩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일까, 다시 읽는 정운영의 글들은 놀라울 정도의 생명력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예컨대 무노동 무임금이라고?(1989616)에서는 노동자의 임금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생존의 비용이 되어야 한다는 논변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임금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는 오늘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내일의 노동력을 준비해주는 일까지, 보수가 아니라, 지적인 이유든 신체적인 이유든 남들보다 노동을 덜 하더라도 먹고살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며, 이는 결코 자비나 선심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한 원리이다. 따라서 자본가의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주장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당시 노동운동계에서 자주 불렸던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자본가여 먹지도 말라라는 노래나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라는 구호는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본다는 점에서 잘못이다.” 정운영은 이렇게 예측했다.

 

정녕 임금이 실제로 제공된 노동만의 대가가 되어야 한다면, 앞으로는 직장에서 화장하는시간이나 밥 먹는 시간은 물론 하품한 시간과 이빨 쑤신 시간에 해당하는 몫까지 몽땅 봉급 봉투에서 떼어내야 마땅하다. 그런 노동들은 생산에 쥐뿔도 보태는 게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이 오늘날 하청, 파견, 단기 계약 등 비정규직이라는 명목으로 일상적인 노동조건이 되어왔고, 단적으로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는 분급’(분당으로 받는 급여)이라는 임금 형태까지 도입되어있다. 불과 몇 년 전에 비로소 한국 사회에서 생활임금’(living wage)이 논의되기 시작하고 이를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도입하고 있는 것을 상기하자면 정운영의 논변과 예측은 선구적이다. ‘오늘의 이윤에 눈먼 개별 자본가들이 내일의 노동력을 준비하는 업무를 소홀히 한다면, 국가가 총자본가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광대의 정치경제학 비판

정운영은 비주류 경제학을 전공했고, 비주류답게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경제평론가라는 직업을 스스로 만들었다. 자신이 만든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때문에 학문 연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떨쳐내지 못했지만, 그의 모든 글 속에는 뛰어난 이론적 관점과 통찰력이 뼈와 살을 이루고 있다. 그는 한국 유학생 가운데 외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로 학위를 받은 최초의 박사였고, 그만큼 그의 말들은 한국 사회에 낯설면서도 요긴했다. 편저서(세계 자본주의론, 한국 자본주의론)와 편역서(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연구4)를 제외하면, 생전의 단독 이론서로는 노동가치 이론 연구와 미완성 유고집인 자본주의 경제 산책단 두 권이 전해져 있다. 하지만 여기에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은 쏠쏠한 논문들을 추가하면 그의 생산력은 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양적으로도 손색이 없다.

 

마르크스주의 중에서도 노동 가치론에 기반을 두고 이윤율 저하경향을 설명하는 것이 정운영의 학위 논문 주제였다. 마르크스의 자본 1에 해당하는 노동 가치론에 관해 그는 가치와 가격의 관계를 해명하는 이론이라는 통상적인 오해와 다르게, 누가 가치를 생산하고 어떻게 분배/착취되느냐를 설명하는 데 핵심이 있다고 강조한다. “노동 가치론의 핵심 기능이 가격으로 가치를 규명하는 것이 아닌 만큼 현상을 통한 본질의 인식 여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노동 가치 이론은 누가 가치를 만들어내고, 누가 그것을 빼앗아 가는지를 밝히는 이론입니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노동 가치 이론만이 그 질문을 경제학의 근본문제로 설정했고, 성공이든 실패이든 노동가치 이론만이 그 해답을 모색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노동가치론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노동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해, 한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어떻게 나누느냐를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노동가치론도 하나의 이론인 만큼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예컨대 소나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명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다만 이를 전제로 할 때 자본주의의 운동 원리를 과연 근본적으로 해명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운동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자본 3에 해당하는 이윤율 저하 이론이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한다는 명제는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주장과 결부되어 마치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붕괴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여기서도 그는 이윤율 저하의 필연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 저하의 변수들과 조건들을 경험적으로 타진함으로써 자본이 운동하는 방향과 성장 진로를 탐색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각종 수학 공식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세세한 내용을 여기서 감히 해설하기보다는, 프랑스어로 제목이 붙어 있는 1981년 학위 논문에 대한 서평 한 대목을 소개하는 편이 낫겠다. 서평 역시 비전공자가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마지막 단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chung)의 연구는 현 경제 위기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측면들에 관한 본격적인 논고를 제시한다. 유감스럽게도 정이 자신의 저서의 앞부분에서 시도하는 다양한 위기 이론 학파들에 관한 개략적인 평가는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참고문헌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출판물과 미발표 저술들을 포괄하고 있고, 이 주제[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뛰어난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실제로 정의 연구를 추천하는 주요 공적은, 작금의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인식을 향상할 수 있는 그 잠재력에 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문헌들을 섭렵해 뛰어난 출발점을 이룬 그 잠재력을 정운영은 더 밀고 나가지 못했다. 대학교수에서 해직되고 경제평론가로 활약하면서 학문으로 돌아갈 시간을 놓친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까지 여러 대학을 전전하며 개설된 그의 정치경제학 강의는 수백 명의 학생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는 소문난 명강(名講)이었고,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게하는 논쟁의 장이었다. “여기 엮은 글들의 어느 행간을 대하며 고함이 터지고, 분필이 날고, 발길질과 멱살잡이 반보 전까지 이르렀던(!) 그 아슬아슬한 장면들을 기억하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학창 시절 어느 한 교실에서 벌어졌던 그 활극들을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회상하는 그들의 선배들도 간혹 없지 않으리라. 사실 이 책은 그 치열한 전투의 산물이다.”

 

더구나 탄탄한 이론적 배경에서 우러난, 한국의 현실 경제에 대한 평론들(또한 경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정치·문화·국제관계를 아우르는)은 일견 생소한 주장과 논변으로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그의 탁월한 글솜씨로 버무려진 신선한 설득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개인적인 학문적 열망을 만족스럽게 추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의 말과 글은 분명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돈과 권력을 가진 높으신 양반의 경제학이 아니라, “곳간에 가득 쌓인 재물을 헐어 배를 주리는 백성과 나누라고”, “광문을 밀치고 들어가 썩어나는 재물을 나누어 쓰자고외치는 저 낮은 곳의 광대의 경제학, 시시한 사람들에게 밥과 자유가 있는 세상을 일러주고 밥의 크기와 자유의 영역을 확대라기 위해 함께 애쓸 방법을 끊임없이 찾자고 부추겼다.

 

거시기 사회주의와 세계화의 질주

경제학의 과제가 밥의 크기와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에 있다는 소신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에 현실 사회주의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따위의 진영 논리와 정치적 부정직(不正直)을 허용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에 관해 대다수 진보 지식인들이 더 나은 사회주의를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지만, 정운영은 그 개혁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적 시장을 수용할 뿐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라는 소유 형태까지 변경하는 것이라면 왜 사회주의냐고 반문하며, 굳이 사회주의라고 불러야 한다면 거시기 사회주의라고 하자고 제안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사회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은 진보 지식인들의 좌절을 예방하려는 엉뚱한 배려의 산물이라는 비판이었다. 여기서 그가 반복해서 요구한 것은 정치적 정직성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밥과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것 자체는 그들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사회주의 본연의 진로이고 그러한 타협이 이행을 위해 불가피한 절차라고 강변하는 처사만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페레스트로이카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여전히 이론적으로 유효하며 필요하다는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전언은 인간의 노동력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노동 가치 이론과 적대 계급 사이의 투쟁에 의해 사회가 발전한다는 계급투쟁이론이며, 그에 따르면 노동력이 아닌 자본이 그 가치의 분배에 참여하는-실제로 주도하는-행위는 합법을 가장한 수탈이기 때문에, 그 수탈을 저지하기 위해 전개하는 투쟁은 일종의 정당방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전언은 마르크스주의를 배태한 상황이 극복되지 않는 한 여전히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1991~1992년 이후 정세는 급변했다. 그가 1960년대 서구의 뉴레프트운동에 빗대어 1980년대의 특징을 지각한 뉴레프트 운동이라고 규정했듯이, 좌파의 언어와 운동이 활력을 찾았던 시대 상황은 그가 공부한 비주류 경제학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사회주의의 붕괴배타적 세계화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산업사회 등 각종 포스트 시리즈가 유행했고, “40~50개 학과에서 200~300명의 학생이 몰려들던 강의실에서도 학생이 쑥쑥 빠지기 시작했다. 그가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날이 갈수록 글이 쉬워야 도리인데, 노트북을 열면 자판의 회백색질서에 공포부터 느낄 만큼 요즘 나는 글이 두렵다라고 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칼럼집 제목으로 풀어보자면 그에게 1990년대는, 무의미하게 바윗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의 형벌처럼 자신의 말이 헛수고가 아닌가 하는 의심과(‘시지프의 언어’), 바로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갈릴레오가 낙체 실험을 하는 의외의 수학을 가져다준 피사의 사탑처럼 혼자라도 고독을 감내하면서 삐딱하게 바라보겠다는 다짐과(‘피사의 전망대’), 세계화와 문민의 희화(戱畵)를 벗어나기 위해 레테(망각)의 강을 지나 에우노에(구원)로 가고 싶다는 바람(‘레테를 위한 비망록’)이 교차하는 시대였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퇴조와 사회운동의 약화, 그리고 특히 세계화에 따른 변화들은 정윤영에게 한국 사회에서 더욱더 고독한 열외자가 될 것을 요구했고 그는 이를 감내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변화의 핵심을 생산자본의 투기화로 파악한다. 생산자본과 금융자본의 고전적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금융자본주의에서도 투기자본이 자기 증식을 위해 국경을 가로질러 생산자본까지 파괴하는 것이 세계 경제의 새로운 특징이라는 것이다. 1997년 동아시아 신흥 공업국들의 외환 위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 국가의 경제를 결딴내는 엄청난 규모의 투기자본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지만 이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일국적 생산자본만이 아니라 그에 기초한 노동자계급의 권력 기반이 와해하고, 대외 경제에서도 경제외적 폭력이나 부등가교환 등의 강제가 활개를 치지만, 이를 통제할 세계적 규제 장치는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에 대항하는 세계적 연대가 필요하지만 이것이 당분간 난망하다면 역시 국가 단위의 투쟁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세계화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세계적 저항이 시급하지만, 저항의 세계적 연대가 말처럼 쉽고 자본만큼 빠른 것도 아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국가 단위의 투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세계화 시대의 국민국가는 자본의 이해로 보자면 시효 다한 폐품 창고지만, 노동자의 처지로는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다. 일국적 저항이 성숙하면-아니 그와 동시에-세계적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도 국민국가가 노동자의 유일한 비빌 언덕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상당히 논쟁적이지만, 그가 일차적인 주적을 투기자본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각국 정부의 단속과 국제 협력 외에 투기자본을 제재할 뾰족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세계적 단결은 자본의 세계화 속도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 국민적 영역에서 정치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이와 더불어 1997년 외환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동아시아 국가 노동자들이 지역적 연대를 구축하는 아시아적 저항 모형을 조심스럽게 구상한다. 또한 세계화와 지역 통합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 통합체는 각국의 연대 세력이 국가 단위의 투쟁에서 세계적 규모의 투쟁으로 갈아탈 환승역구실을할 수 있으며 세계화 폭력에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와 같은 관점과 입장은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들에서 민족, 조국, 나라, 애국 등의 용어들이 자주 출현하는 이유가 되었다. 일찍이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취재하면서도 이념보다 질기고 제도보다 강한 민족이 자꾸 생각났고 한 바 있지만, “세계화 시대에도 국가 경제가 있고 민족 자본이 있어야 한다라거나, 정부가 기업의 신뢰를 얻기 위해 부자를 달래라! 그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들이 전대를 풀어야 담배보다 급한 점심이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주문하고, 해외에 나가 돈 쓰지 말고 국내에서 소비하라고 요청하는 지금은 소비가 애국이어서, 돈 쓰면 나라 사랑이라니 좀 좋은가등이 그렇고, “나는 나라를 사랑했고 나라에 나를 바쳤어라고 말하는 박태준을 각별하게 소개한 것이나, 기업과 노조 모두의 집단이기주의가 경제를 허약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는 것 등이 그렇다. 외국 자본이 국내 기업을 집어삼키는 와중이니 우선 국가 경제를 지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초조는 외자에 의한 국내 기업 초토화에 있소이다. 그러니까 한국 경제 초미의 현안이-이를테면 주적이-바뀌었다는 생각이고, 1980년대 풋내 나는 도식을 빌리면 피디(PD)에서 엔엘(NL)변절한것이지요. 재벌의 버릇은 고쳐야 하지만 한층 더 절박한 숙제가 우리 기업을 지키는 일이란 말이지요.

 

이처럼 정운영 자신이 농반진반으로 변절을 자임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투기자본을 주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당시 정세 분석의 귀결일 뿐이었다. 그가 돌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평론을 청할 수가 없지만,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와 더불어 세계 금융 위기가 현실화된 현시점의 정세라면 그는 틀림없이 더 삐딱해서 근사한대안을 모색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화 시대에 정운영이 열외자의 고독을 감수하면서까지 희망을 찾으려 한 곳은 한국이었으며, 바로 이곳이 그의 사랑과 혁명의 장소였다는 점은 기억하자.

 

지식인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지식인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이런 대답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지식인이란 거부하고 저항하는 사람이다.’” 김수영 시인이 자유당 독재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부가 태어나기도 전에 2공화국, 나는 너의 적이다라고 쓴 것에서 정운영은 지식인의 역할을 발견한다. “태어나지도 않은 권력을 상대로 어차피 나는 너의 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런 선언이야말로 마땅히 지식인이 본받아야 할 교훈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런 신념이 그의 삐딱함과 냉소와 고독의 연원이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때,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 모름지기 반대하는 일이 지식인의 임무이고, 혹시 그가 다소라도 그 반대의 소명에 유보의 자세를 취할 때는 즉시 지식인의 자격이 상실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중략) 모두에게 이 어느 한쪽에 관승하여 분별없이 자행하는 독선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는 의미에서 나는 나의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식인의 책무는 무엇보다 부수는 데 있으며, 그것을 다시 세우는 일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됩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지식인의 필수적인 임무이자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1980년대 대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할 때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했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포스트 시리즈가 유행할 때는 그래도 마르크스주의가 유효하다고 권고했으며, 대다수가 국가의 폭력성과 무능력을 성토하며 등을 돌릴 때 오히려 국민국가의 필요성(활용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그의 일관된 꿈은 사람다운 자유와 굶지 않을 정의를 누리는 소박한 세상이었다. “제가 바라는 세상은 그야말로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가 떠나는 인간은 그 머무는 순간이라도 자유롭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봄풀처럼 돋아나고 정의가 샘물처럼 솟아나는 사회의 건설이 책갈피의 이상이라면, 최소한 사람답게 사는 자유와 굶지 않을 정의만이라도 누려야 합니다.”

 

그는 딱딱한 이론을 쉽게 풀어주는 남다른 솜씨를 갖고 있었고,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논리적 이성을 견지했다. 하지만 투철한 지성 못지않게, <9월이 오면>을 들으며 히죽거리고 목마와 숙녀를 읊조리며 통증을 느끼고,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눈물을 떨어뜨리는 섬세한 감성도 간직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곳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평소의 신조를 깨고, 강의 뒤 자정 가까운 지하철에서 책을 펴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시울이 화끈하더니 책 위로 무언가 후드득 쏟아지는 게 아닌가. ‘내 이 아줌씨, 이럴 줄 알았다니까.’” “게다가 사랑이 없으면 혁명도 없다라고 즐겨 말하곤 했던 것처럼 늘 축축한 이야기한 자락을 곁들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이론과 뜨거운 심장이 있었기에 한국 사회는 적어도 그의 긴 목높이만큼은 보다 살 만한 곳이 되었을까?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희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9월이 오면 정운영을 통과하는 한국적 마르크스주의의 길을 묻고 싶다.

 

 

김정한

 

1970년생.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본지 편집위원. 저서 대중과 폭력-19915월의 기억,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알튀세르 효과(공저) . 역서 폭력의 세기,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