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정치철학에서 '주체'는 가장 첨예한 쟁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며, 어떤 경로를 거쳐 자신의 해방에 도달하는가 하는 등의 주제를 모두 아우르는, 주체를 둘러싼 질문들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법, 제도, 권력에 예속된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철학에만 국한된 관심사는 아니다. 1980년대 크게 분출한 민주운동이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일찍이 퇴조한 이후, 한동안 기대를 모았던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을 연계하는 정치 세력화의 실험이 민주노동당의 해체와 민주노총의 대표성 위기로 자초하고, 그 밖의 풀뿌리 사회운동들의 침체와 무력화가 지속되는 지금,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주체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또한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어떻게든 돌파해나가려는 문학과 예술의 장에서도 '주체'에 대한 사유는 회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된 지 오래다. '좋았던 옛 시절'에 이미 '실천'과 '문학'이라는 두 단어를 합체하며 창간된 '실천문학'은 전대(前代)에 민족, 민중문학을 지향하고 그 방법론으로 리얼리즘을 채택하며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선취한 바 있지만, 그것을 오늘날의 시대적 과제에 적합한 실천 주체의 담론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더디거나 미약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학적 실천 주체'라는 특집은 보이지 않는 저항 주체들의 들리지 않는 반역의 목소리를 쫓으려는 '실천문학'의 의지이자 출발점이다.
먼저 현대 정치철학의 논의에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회과학 이론의 빈곤 때문이다. 사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나 좌파 이론에서 실천 주체에 대한 사유는 제한적이었다. 대체로 자본주의 생산 관계에서 어떤 객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실천 주체를 상정하고 이를 노동자계급으로 특정하거나, 민중론처럼 가장 소외되고 고통을 겪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밑바닥의 하층민들을 민중이라는 역사적 주체로 명명해왔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객관적, 사회적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지배 체제에 저항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계급의식'이나 '역사의식'을 갖추지 못한 노동자와 하층민을 곧바로 실천 주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정은 계급이나 민중이 어떻게 실천 주체로 전환되는가 하는 별도의 개념과 이론을 요구한다. 즉자적 계급이 노동과정에서 계급의식을 갖춘 대자적 계급으로 필연적으로 이행한다는 헤겔적 논리는 사변적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물론 자본주의 생산 양식은 봉건전 신분제를 해체하고,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선언된 개인과 시민을 만들어 내는 토대로서 그 자체로 주체를 만들어 내는 기능이 있지만, 생산 양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인 주체화 양식에 대한 설명을 포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다른 하나는 이미 문학장에서 때로는 암묵적으로, 때로는 공개적으로 현대 정치철학의 관련 논의들이 깊이 수용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과학의 빈곤에서 비롯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990년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이후, 거칠게 살펴보자면, 한편으로 근대적 주체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원으로 미셸 푸코, 질 들뢰즈(그리고 이를 정치학으로 번역하는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주로 인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반(反)자본주의적인 혁명적 주체를 재차 요청하는 가라타니 고전, 슬라보예 지젝 등이 차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정치와 미앗의 대세처럼 문학장에서 비평과 토론을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장에서 수용되어온 주요 정치철학의 흐름들을 차후 본격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지금 시점에서 재점검하는 정초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또한 문학장에서 정치철학의 개념과 논변을 활용해온 방식이 실용주의적인 탈(脫)맥락화에 지나치게 의존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반성하는 계기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세 편의 원고가 배치되었다. 우선 서동진은 푸코의 실천 이론을 소개하고 평가하면서, 이를 마르크스, 알튀세르, 들뢰즈, 랑시에르 등과 간단히 비교하며 실천 주체에 관한 전체적인 논의 지형과 핵심 논점을 능수능란한 솜씨로 밝혀준다. 푸코는 권력과 지식이 결합해 만들어 낸 신체의 규율화 장치들을 통해 주체가 생산된다는 독창적인 주체화 이론을 확립한 바 있다. 하지만 푸코는 권력과 지식이 결합해 만들어 낸 신체의 규율화 장치들을 통해 주체가 생산된다는 독창적인 주체화 이론을 확립한 바 있다. 하지만 푸코는 권력과 지식의 내제적 장 안에서 무수한 힘들 간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고, 따라서 헤아릴 수 없는 실천들이 존재한다는 '존재의 미학'을 잘 보여주지만, 그것이 어떻게 권력 관계에 저항하는 실천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않는다. 이를 서동진은 저항 주체 없는 실천 이론이라고 요약하고, 이것이 푸코의 '난관'이라고 평가한다.
다음으로 이성민은 고진과 지젝을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읽어내면서 미학과 주체의 관계를 탐구한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지젝의 주요 작업은 공산주의를 떠맡는 새로운 혁명적 주체성을 사유하는 데 있다. 정신분석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단순하게 덧붙여 말하자면, '주체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를 참조하면서 지젝은, 주체가 대타자(주인 기표)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상(또는 이데올로기)을 횡단해야 한다는 주체 이론을 구성하고, 이를 위한 주체의 윤리로서 '자신의 욕망과 타협하지 말라'라는 라캉의 또 다른 명제를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욕망보다 더 심층에 자리한 충동이야말로 혁명적 주체성의 핵심이라는 주장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이성민이 지적하듯이 충동은 자신에게 만족을 가져다주는 부분 대상(라캉의 용어로 대상 a)을 어떤 타협도 없이(설령 이로 인해 주체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섬뜩하고 완고한 고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춤추는 빨간 구두' 이야기가 그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충동은 주어진 현실(상징 질서)을 전복하고 파괴하는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 이성민은 이와 같은 충동의 부정성을 집단적 차원에서 사유하기 위해 지젝이 심미적인 것을 끌어온다고 해석한다. 심미적인 것은 견고하다고 여겨진 현실을 정지시키는, 그리하여 주체가 자유와 해방을 일시적으로 체험하는 마법의 순간을 창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와 같은 짧은 순간의 심미적인 체험이 거꾸로 현실에서의 자유와 해방의 상실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미학은 '주체의 실패(대타자에 대한 종속)'를 정당화하고, 그 실패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체의 성공'을 위해서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고진의 문제 설정을 더 밀고 나가서, 근대문학과 더불어 탄생한 미학의 종언도 단언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진태원을 랑시에르를 발리바르와 비교하면서 그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이 갖는 장점과 한계를 매우 흥미롭고 일목요연하게 드러낸다. 랑시에르는 치안 질서에서 어떤 몫도 분배받지 못한 이들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는 정치를 민주주의로 개념화하고, 이를 통해 치안이 규정하는 감각적 짜임(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재구축함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해야 한다는 정치 미학을 제시한다. 반면에 발리바르는 평등자유의 권리를 모든 인간과 시민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서 전유하고 재구성해나가는 끝없는 민주화 과정(만주주의의 민주화)을 근본적인 대안으로 삼는다. 진태원은 두 사람이 민주주의를 완성한 원리나 제도가 아니라 부단한 갈등적 과정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발리바르가 공동체와 민주주의, 또는 헌정과 봉기를 동시에 사유하려고 시도한다면, 랑시에르는 공통체와 헌정에 대한 고민 없이 치안과 민주주의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킴으로써 치안 내부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를 위한 갈등과 투쟁을 간과하는 한계를 갖는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 세 편의 글이 '미학적 실천 주체'라는 주제와 관련된 모든 내용과 쟁점들을 물샐 틈 없이 채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유의 출점으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하고 귀중한 논점들을 제출해준다. 무엇보다 우리가 확인한 것은, 현대 정치철학의 미학적 관점이 실천 주체의 우연적이고 일시적이며 흔치 않은 출현의 순간과 장연을 포착하는 데 강점을 갖고 있지만, 반면에 법과 제도, 국가와 헌정 등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고 그로부터의 탈출만을 꿈꾼다면, 도리어 실천 주체의 저항과 봉기를 지속시키고 진정한 체제 변혁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난관'에 부딪히거나, 탈 현실화의 '마법'을 찬미하거나, 지배 체제의 '스탠들'을 불어 일으키는 데 머문다는 사실이다.
김정한
1970년생.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본지 편집위원. 저서 「대중과 폭력-1991년 5월의 기억」,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알튀세르 효과」(공저) 등. 역서 「폭력의 세기」,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공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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