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신간

임철우 소설집 『황천기담』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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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이야기로 세계와 마주하는 존재다. 소설가를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이렇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란 모름지기 이야기로 먹고사는 이야기꾼. 그들은 이야기를 빌려 세계를 해석해왔고, 세계에 개입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가 아니라 이야기일 경우가 있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그간 자기가 해온 이야기가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의 이야기였는지 고민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임철우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임철우는 누구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크게 고민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철우가 누구던가. 가공할 폭력으로 은폐된 5월 광주의 진실을 이야기해야 되겠다는 절박감으로 문학을 시작한 작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 진실을 장편소설 봄날로 기어코 복원한 5월의 작가 아니던가. 임철우에게 5월 광주의 이야기는 소설가로서 그가 하고 싶은, 아니 해야 할 진심의 이야기요, 윤리의 이야기요, 실천에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봄날이후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임철우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봄날(문학과지성사, 1997)5월의 광주 이야기를 다 쏟아낸 임철우 아닌가. 개도둑이래 봄날이후 어떤 이야기를 이어갈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봄날이후 백년여관(한겨레출판, 2004)이 출간되었고 이번에는 황천기담(문학동네, 2014)이 출간되었다. 황천기담은 지금의 임철우가 어떤 이야기에 매료되어있으며, 어떤 문학을 갈망하는가를 확인시키는 출중한 사례다. 황천기담을 읽던 중 이런 대목에 눈이 가닿았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 제공

 

 

그러고는 무심히 고개를 내려와 다시 십여 분 정도 곧장 달렸을 터이다. 어느 순간 당신은 불현듯 차를 세우고 말았다. ‘황천 33km’. 아까 그 표지판엔 갈림길 표시와 함께 한글로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가만, 황천이라니. 전혀 들어본 기억이 없는 지명이었다. 저승, 죽음, 장례, 상여······ 잠시 그런 음산한 이미지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표지판 바로 뒤편 울울한 그늘 너머로 희미한 샛길 하나가 설핏 스친 것 같기도 했다.(9~10)

 

 

 

원작소설 황천기담의 첫 작품 칠선녀주. 인용은 칠선녀주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이 대목을 읽던 중 울울한 그늘 너머로 희미한 샛길 하나라는 문장이 확 다가왔다. 특히 눈에 띄는 말이 샛길이었다. 봄날5월 광주 이야기들이 불가피하게 광장과 거리를 배경으로 한다면 황천기담은 그렇지 않다. 황천기담의 임철우는 광장과 거리가 아니라 샛길에 이끌리고 있다.

 

샛길의 유혹. 이 유혹은 임철우 자신은 물론이요, 이 부황한 시대의 독자들을 구원할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도 보인다. 샛길을 따라가게 된 정체불명의 지역인 황천”. 그 황천은 악, 욕망, 사랑, 치유, 소멸, 재생 등의 상태를 대리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며 만들어 낸 기이한 이야기의 보고였다. 이렇게 임철우는 명부의 뜻이기도 한 황천을 휘감아 도는 기이한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고 있으니, 어쩌면 황천은 임철우 또는 임철우 문학을 갱신하는 표식 같기만 하다. 바로 이 대목이다. 나는 황천기담을 갱신의 표식,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자기 갱신을 희망하는 모든 이들을 살릴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로 읽었다. 황천기담은 그저 기담이 아니었다. 이 다섯 편의 기담들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건 바로 폭력적인 세계 앞에서 자기를 갱신하는 사랑의 열정이었고 구원의 갈망이었다.

 

칠선녀주, 나비길, 황금귀, 월녀, 묘약등 이 황천의 이야기들에는 한국 근현대사와 인간의 결여적 상태와 연계되는 전쟁, 파괴, 죽음, 도망, 살인, 소문, 폭력 등이 난무한다. 요컨대 황천기담은 이 세계가 폭력적이며 인간은 사악한 욕망의 존재라는 착잡한 명제를 이야기의 한 내용으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 명제가 황천기담에 갑작스레 나타난 건 아니다. 임철우의 초기 작품들에도 이와 같은 명제는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임철우는 황천기담에서 이 명제를 그대로 승인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로 이 명제를 뛰어넘는 문학적 정신을 구현한다. 요컨대 세계는 폭력적이고 인간은 사악하지만 새로운 삶의 질서와 인간관계를 열 사랑의 욕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황천기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임철우가 이번 작품집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구원의 가능성이다.

 

황천기담의 황천은 겨우 샛길로 출입이 가능한 익명의 공간 같지만, 이 공간도 식민, 해방, 전쟁 등 근현대사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이 황천의 거주자들이나 유입된 인물들도 가악한 욕망의 가해자와 피해자, 공모자가 되는 악연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 악연은 가족 해체와 인격 모독과 유린 등 극단적인 사건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임철우는 환천을 폭력과 사약의 욕망이 넘쳐흐르는 결여의 공간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는 황천을 이 모든 폭력과 욕망을 부드럽게 교정하거나 무화하는 재생의 에너지가 흐르고 박복한 사람들의 악연을 사랑의 인연으로 이어지게 하는 사랑의 공간으로 활성화 시킨다.

 

황천기담의 사랑의 욕망과 구원의 가능성이 월녀와 홍녀 등 황천의 여인들에 의해 실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소설 속 남성이 대개는 폭력의 가해자이거나 희생자라면 월녀와 홍녀 등 여성은 자신들이 당면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 남성들, 더 근본적으로는 이 폭력적인 세계를 구원하는 대모신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황천기담은 오랜 시간 5월 광주 이야기에 집중해온 임철우 자신의 갱생을 희구하는 재생담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렇다. 황천기담은 그저 기담이 아니다. 황천기담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폭력적인 세계에서 새롭게 그린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다. 그 사랑과 구원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과연 이 이야기가 임철우 문학을 새롭게 열 출구가 될지 독자로서 뜨겁게 지켜보고 싶다.

 

 

 

 

 

양진오

 

1965년생. 문학평론가. 1993비평의 시대등단. 저서 한국 소설의 형성, 임철우의 봄날을 읽는다, 전망의 발견, 당대의 한국문학, 한국문학의 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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