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문 시집 『산벚나무의 저녁』
장철문은 첫 시집 『바람의 서쪽』을 몸의 기억과 그 기억이 흐르는 방향에 대한 불교적 상상력, 그리고 그것들이 결합하면서 도달한 빈 세계에 형상에 바쳤다. 아니, 바쳤다고 쓰는 것은 옳지 않을지 모른다. 차라리 그는 그것들과 함께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첫 시집에서 “비워진 숲의/한그루 참나무로 서서/여분의 피와 살 말리고 싶다”(「초겨울숲」)라는 바람을 드러내고, “꼭지가 듣도록, 한 생애를/채웠다 비우고/모세혈관처럼/허공은 껴안은 가지들”(「겨울 가지」)을 선망함으로써 그 정황을 드러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과거를 채색시켰던 아픈 기억이 작용했던 듯하다. 그는 격렬한 기억의 몸으로 이렇게 물었다.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한국 시의 한 정조를 이루는 것으로, 상실된 것들에 대한 지극한 아픔이 집착으로 변하려는 자리에서 그것들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결을 들 수 있겠다. ‘한’이라는 말로 상식화되어 있는 그 정조가 시를 있게 하는 셈인데, 장철문의 두 번째 시집 『산벚나무의 저녁』은 첫 시집에서부터 제기된 그 과제에 대한 응답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응답은 또 다른 질문을 준비하고 질문을 또 다른 질문으로 나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응답은 지속적 결여의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한다. 그가 지난 시절 살아왔던 명상 수행의 삶은 빈 세계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음이 분명한데, 그 준비를 통해서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적막하다
이 적막에 들려고
먼 뱃길 왔나?
적막하다
들여다볼밖에
그저 들여다볼밖에
도리없는
이 적막
움쩍할 수 없이
-「섬」 부분
시의 물음표들은 그 준비로 나아가는 마음의 징표와도 같다. 자기를 비우는 멀리 있는 길에서 “이 적막에 들려고/먼 뱃길 왔나?”(「섬」)라고 물을 때 시인은 지금까지 온 길을 되짚으며 세계에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세상을 사로잡은 것이 압도적인 적막이라면 “그저 들여다볼밖에” 없을 것이다. 시인은 움쩍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주체의 무능력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적막의 정황을 수락함으로써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는 능동적 대응이라고 해야 한다. 통증을 그대로 둠으로써만 세상의 통증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내 복통에 문병가다」)을 시인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적막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기 때문에 시인에게는 ‘비움’을 추구하면서 ‘배제’를 비켜 가는 섬세한 결의가 필요해진다. 『산벚나무의 저녁』은 그 ‘비움’과 ‘배제’의 길을 따라다닌 사람의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통증을 가족으로 삼고 그로써 통증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의 욕심 없는 마음이 있다.
모두 5부로 이루어진 시집은 각 부마다 의미의 층위를 별도로 세워놓는다. 1부는 ‘비움’의 화두에 지배되는데, 2, 3, 4부는 그런 삶의 싸움과 정관을 통해 획득된 맑은 마음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5부는 장철문이 첫 시집에서부터 그의 시의 주도적 상상력이 될 것을 보여준 바 있던 가족 이야기에 바쳐진다. 2, 3, 4부가 맑은 마음의 세계상이라고 해도, 그가 세계와의 손쉬운 타협으로 빠져들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눈은 산야에 뻗친 햇살 속의 삶을 향해 “무궁한 에로시즘에 대한 복무”(「서울-포항산」)라고 세밀한 시선을 던지기도 하지만, 그 시선의 밑바닥에 혼란한 정신이 움직이면서 삶을 성찰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 것이다. 「살생(殺生)」에 나타나듯이, “산다는 것이, 때로는/사방천지가 사지(死地)인 것을 모르는 때가 있다”는 진술이 그 혼란을 대변한다면, 같은 시에서 “살겠다는 것이 겨우/눈 가리고 아옹인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혼란 속에서 왜소해지는 존재에 대한 성찰의 표현이다. 이 혼란 속에서는 계속 움직여야만 살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사지(死地)는 배를 미는 것을 그치는 그곳이다”, 「살생」). 이 움직임에 대한 요구가 세상에 대한 그의 시적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겠거니와, 「미륵사지를 지나며」는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이 갖는 두 겹의 시선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쑤시개만도 못한 것이 붓다구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천년을 제사 지내준 절 하나 지키지 못했구나
제 형상 하나 일으키지 못해서
행려병자처럼 누웠구나
기운 돌탑에 비낀
초가을 짧은 햇살이여,
이 진실을 보이려고 누가 여기 왔었구나
-「미륵사지를 지나며」 전문
맑은 세계가 시적 정황에 꽉 차 있지만 시의 목소리는 어떤 비애감에 물들어 있다. 그것은 시인이 바라는 것과 눈앞에 나타난 것의 어긋남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 어긋남이나 결여가 시인으로 하여금 계속 혼란의 와중에서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지도록 하는 요인일 텐데, 그렇다고 해도 이 비애감은 절망이나 낙담과는 달리 진실의 한 켠을 쥐고 있는 자의 정서이다. 이 점이 장철문 시를 특이하게 만든다. 그것은 슬픈 자세의 비극적 진실도 아니고 기쁨 자체에 고양된 진실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맹한 진실이다. 그런데, 진실이 호오를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처럼 참된 맹함이 또 있을까? 장철문의 시들은 여기에서 세상을 보는 시선의 새 영토를 이룬 듯하다. 『산벚나무의 저녁』은 그 ‘맑은 맹함’으로도 시적 긴장을 잃지 않는 놀라움을 보여주었다.
이런 시편들 속에서 그의 가족사에 대한 시편들이 오롯이 솟는다. 첫 시집에 비하면 상당히 순화된 차원을 보여주는 5부의 시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기억의 통증을 동반한다. 아마 이것이 그의 시집에 긴장을 부여하는 의미의 저장고일 것이다.
모든 성스러운 것은 착취자들이다
-「어머니에게 가는 길」 부분
가족을 바라보는 이 한 구절에도 두 겹의 시선이 있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인식이 이렇다는 점에서 장철문에게 기억의 아픔이 다스려진 것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때로는 기억 자체의 통증으로 지속되고, 때로는 기억이 사라진 자리의 허망으로 지속된다. 이렇다면 마음은 계속 허방을 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가족 이야기는 허방을 짚으면서도 그 허방에 기꺼이 기댈 수밖에 없는 마음의 표상물이 된다. 시집 전체적으로 보면, 기억의 통증에 대해서는 「내 복통에 문병 가다」와 「쌀밥」이 있다면, 기억이 사라진 자리의 허망에 대해서는 「섬」과 같은 시가 있다.
『산벚나무의 저녁』을 크게 지배하는 이 통증의 정서가 지금의 한국 시단에서 장철문의 시집을 특이하게 만드는 요인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실로 현재의 한국 시단을 골고루 물들이고 있는 정서는 상실된 것들의 기억이 가져오는 아픔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지금 한국 시단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세대들이 경험했던 역사적 충만감의 실종이 밑바탕을 이룰 것이다. 상실감은 시인들을 자폐로 나아가게 하거나 텅 빈 주체의 생태적 풍경으로의 침몰을 가져오게 했다. 장철문의 ‘기억의 통증’이 그의 선배 세대들의 역사적인 기억과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기억은 역사적 경험에 충실했던 선배들보다는 그 경험에서 한 걸음 비켜선 채 또 다른 울음을 토해냈던 선배들의 기억에 가깝다. 장철문이 이번 시집에서도 끈질기게 대상화하고 있는 ‘집’의 상상력이 그것인데(「집」, 「봄날, 집을 보다」, 「이사」 등), 그는 이 집마저도 상실의 두려움 속에 맡겨둔다. “이 가벼운 집이 곧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집에 가는 길」)라는 시인의 걱정은 그러나 그의 선배들이 징후적으로 확장해 보여주었던 더 큰 집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의 아픈 집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이전 세대와 그의 세대 중간에 있는 듯이 보인다. 그가 한국 시단의 현재적 지형도에서 어떤 흐름에 합류할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가 그의 선배들처럼 ‘비움’이라는 화두에서 쉬운 희망을 찾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그의 시에 여전한 기대를 걸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박수연
1962년생. 문학평론가.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평론 「역사 속의 단절, 단절 속의 역사」, 「죽음의 두 변주」 등.
